195화
성현과 비교하면 지연우가 한참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이 작은 마력조차 견디지 못하다니, 플로르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이 정도였나?’
성현은 셀 수 없는 전투를 겪어 왔고 언제나 죽을 것 같은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비록 꼼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강자를 꺾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반면 지연우는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 왔지만 살이 떨릴 정도로 무서운 강자와 싸운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게 지금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플로르가 봤던 지연우의 재능은 본 적 없을 만큼 뛰어났지만 노력하지 않은 천재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야.’
그래도 플로르는 희망을 놓치 앉았다.
지연우의 재능은 우수하다. 벼랑 끝에 몰려 발버둥 치는 극한의 전투를 이어 간다면, 반드시 강해질 거다.
거기에 플로르의 힘이 더해진다면, 성현과의 전투에서 그 결과는 어찌 될지 모른다.
그때였다. 쿨럭! 지연우가 피를 토하며 정신을 차렸다.
조용히 지연우를 지켜보던 플로르가 무심한 눈빛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밝은 빛이 뻗어 나왔고 지연우의 망가졌던 신체가 재생되었다.
“할 수 있겠느냐?”
“해야죠.”
지연우는 입술에 묻은 피를 슥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며칠 후.
지연우는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제 플로르의 작은 마력은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올리비아와의 전투, 그게 문제다.
올리비아는 어떤 마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얻은 강한 신체, 그 능력 그리고 인간의 전투 기술을 흉내 낼 뿐이었지만 지연우는 그 움직임조차 쫓아가지 못했다.
콰직!
지금도 올리비아의 주먹이 복부를 쑤셨고 지연우는 갈빗대가 박살 나며 폐부를 찢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컥!”
지연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올리비아가 비웃었다.
“약해.”
올리비아는 웃기기만 했다. 저런 게 어머니의 그릇으로 선택된 자라니.
그냥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치솟았다.
하지만 그런 반응도 순간이었다.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지연우는 플로르가 구해 온 알약을 먹으며 모든 스텟을 한계까지 올렸다.
그리고 단 며칠 만에 올리비아의 주먹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볼 수 있다는 게 전부다. 여전히 처참할 정도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쩌어엉!
올리비아의 발길질에 지연우의 광대뼈가 부서졌고 놈은 결국 또 쓰러져야 했다.
쓰러진 지연우를 향해 플로르가 다가갔다.
“어떠냐?”
“한 번 맞을 때마다 의식이 끊기는 것을 간신히 붙잡는 중입니다.”
“하나 알려 주겠다. 유성현은 저 올리비아를 가지고 놀았지.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올리비아의 팔을 뽑았으며 신체를 망가뜨렸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들으면 의지가 꺾이기도 한다. 좁힐 수 없는 차이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연우는 달랐다.
“저도 조만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연우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감 있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힘이 있다면 지금 당장 올리비아의 사지를 뒤틀어 버리겠다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올리비아의 입술이 뒤틀어졌다.
“감히…….”
* * *
-지연우, 놈의 제법 실력이 올라왔다. 비록 내가 마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해도 나에게 밀리지 않는다. 아직은 어머니의 그릇으로서는 부족하지만 점차 갖춰지는 게 느껴진다.
성현은 올리비아의 메시지를 통해 지연우의 수련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제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올리비아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
플로르의 마력을 1cm 구체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언제 나와 싸운다는 거지?”
-머지않은 것 같다.
올리비아의 메시지와 동시에 성현의 눈에 시퍼런 살기가 올라왔다.
회귀의 목적 중 하나. 지연우를 죽이는 것. 그 순간이 다가오는 게 확실히 보이고 있다.
‘조만간…… 조만간!’
놈이 플로르의 마력을 받아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성현과 지연우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지연우는 권력을 쥐기 위해 강해지려 한다. 하지만 성현은 반드시 놈을 죽이려 한다.
생사의 살림길에서 그 차이는 크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다.
“뭐든.”
-네가 지연우에게 죽는다면, 그래서 어머니가 지연우를 사랑하게 된다면 난 어쩌지?
올리비아의 목적은 오직 플로르에게 사랑받는 것.
그런데 지금 플로르의 관심은 오로지 지연우에게 향해 있다.
만약에 지연우가 성현을 이긴다면, 플로르의 사랑은 지연우에게 집중될 게 분명하다.
올리비아는 그게 걱정됐지만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끌끌 웃었다.
“됐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다른 일 있으면 이야기해 줘.”
-하…… 그러지.
올리비아는 성현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며 자신의 꿈을 이뤄 줄 자다.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불편한 동맹을 이어 가야 한다. 성현을 죽이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렇게 올리비아와의 메시지가 끊긴 후 성현은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느껴졌던 시선을 만나야 할 날.
오랫동안 미뤄 왔던 그 숙제.
성현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섰다.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경기도 양평의 한 공터.
짐승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인적은 없다. 우거진 수풀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곳에 내린 성현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와. 알고 있으니까.”
“…….”
“알고 있다니까.”
그 목소리와 함께 바스락바스락 수풀이 흔들렸다.
나온 것은 검고 긴 머리를 흩날리는 소녀, 짙고 검은 눈동자와 흰 피부 때문에 마치 인형처럼 보일 정도다.
그 검은 눈동자가 성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었다고?”
“살아 있었네? 그런데 그 모습은 진짜인가? 아니면, 여전히 거짓?”
그녀는 지연우의 호위 무사 오즈.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다니기 때문에 그녀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지연우도 그녀의 모습을 모른다는 소문이 존재할 정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오즈는 살인귀, 살육에 미친 자.
그리고 얼마 전 이서아는 말했다, 오즈가 같은 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성현은 오늘 오즈와 싸우며 같은 편이 될 가능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 모습 진짜냐고 물었는데?”
“왜? 이런 취향이야? 예뻐? 변태 같네?”
오즈는 소녀의 모습이다. 입고 온 짧은 치마를 나풀거리며 살짝 웃어 보였다.
지금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평온하다.
하지만 주변을 감싸는 냉랭한 공기는 살갗을 찢을 것 같은 살기가 채우고 있다.
성현이 픽 웃으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왜 내 주변을 맴돈 거지?”
“왜긴? 오랫동안 찾아다녔어.”
“이유는?”
“마음에 들어. 그래서 죽이고 싶어. 그 외에 이유가 더 필요할까?”
성현이 오즈를 만난 것은 군주 나모르를 토벌할 때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승부를 내지 못하고 헤어진 게 찜찜했는데, 찾아 다녔다니. 그것도 마음에 들어서 죽이고 싶다니.
“징그러워.”
성현의 말에 오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천천히 단도를 꺼내며 말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지?”
“이왕이면, 본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듣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건 일단 나중으로 미루…….”
성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쉬이이익!
오즈가 엄청난 속도로 성현을 향했고 시퍼런 단도가 그대로 성현의 목을 노렸다.
예전의 성현이었다면 오즈의 속도에 당황했을 테고 피하느라 급급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갑주를 착용하지 않아도 오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부채를 창으로 바꾸지 않아도, 맨손만으로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성현은 그만큼 성장했고 이제는 자신이 인간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짐승인지 모를 정도였다.
후우욱!
오즈의 단도가 성현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 것, 성현을 딱 그 정도만 피한 거다.
즉, 여유가 넘친다는 것.
오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금 단 한 번의 공방만으로 그녀는 느꼈다, 자신은 더 이상 성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쉭! 쉭! 쉭!
하지만 오즈는 계속해서 단도를 그었다.
뭔가 억울한 듯, 자신의 힘이 이 정도가 아니라는 듯, 그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몸짓.
처음에는 목을 노렸고 다음은 팔과 다리, 다음은 빈틈, 마지막으로 운 좋게 스치기라도 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후우우웅!
오즈가 휘두른 단도에 흙먼지가 일었고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무리 휘둘러도 단도는 허공을 휘저을 뿐이고 성현의 머리카락 하나 건들 수 없다.
쉬쉬쉬쉬식!
있는 힘을 다해 더 빠르게 공격해도 마찬가지.
여전히 오즈의 단도는 농락당하고 있다.
그런데 오즈의 입가에 음울한 미소가 걸렸다.
명확한 실력 차에도 짓는 미소.
분노를 표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웃고 있다.
그리고 오즈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무리한 공격이다. 빤히 보이는 큰 몸짓, 반격을 당하면 내장이 쏟아지고 곧 죽을 것 같은 그런 공격.
하지만 성현은 반격하지 않았다. 턱!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 뭐 하는 거야!”
오즈가 외치며 팔을 빼 보려 했지만 성현의 악력은 오즈의 힘을 아득히 넘어선 상태, 벗어날 수 없었다.
오즈가 분노가 가득 실린 살벌한 목소리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냥 죽여!”
성현은 대답 대신 그녀의 팔을 비틀었다.
꽈드드득,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꿈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릴 정도, 그녀가 쥐고 있던 단도는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오즈는 피가 밸 정도로 입술을 씹었다.
“죽이라고! 그냥 죽이라고! 이 미친 새끼야! 그냥 죽여!”
뭐가 그녀를 그리 분노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공을 보면 약을 한 것도 아니고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 이 모습이 오즈의 본모습이라면, 살육과 살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서아와 핫도그나 사 먹으며 학원을 다니는 게 딱 좋을 것처럼 여겨지는 외모다.
성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속할까? 아니면 멈출래? 계속할 거라고 대답하면 이 팔부터 뽑아 버릴 거야.”
“됐고. 죽여.”
“이유나 듣자, 너 정도의 계약자가 왜 지연우의 밑에 있는 거지?”
지연우의 이름이 나오자 오즈가 버럭 화를 냈다.
“죽이라고 했잖아!”
“……지연우를 죽여 줄까?”
“하! 지연우를 죽여? 넌 지연우의 계약 존재가 누구인지……!”
“플로르잖아?”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오즈의 행동이 뚝 멎었다.
그리고 성현은 오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약속할게. 죽여 주지. 그런데 지연우를 죽이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