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 *
며칠 후, 지연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플로르의 공간이 아니라 경기도 여 주의 한 공터였다.
예전에는 아울렛이 있었던 곳이지만 짐승의 잦은 출몰로 모두 부서지고 망가졌으며 이제는 풀 한 포기 없는 곳.
그 공터를 눈으로 훑으며 지연우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돌아왔다.”
플로르와의 수련이 끝났다.
죽을 것처럼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얻은 능력을 생각하면 만족스러웠다.
지연우는 잠시 올리비아와 싸웠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존재와 인간, 그 압도적인 차이.
개미가 코끼리를 이길 수 없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주로 나설 수 없다.
절대적인 불가능.
지연우는 올리비아와 싸우며 그 차이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플로르의 지원으로 그 갭이 좁혀졌다.
날아오는 주먹을 볼 수 있게 됐으며 물러서지 않고 반격할 수 있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올리비아를 몇 번이나 궁지로 몰아넣었다.
올리비아가 끝까지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지연우에게 맞은 그녀는 분노했고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끌어냈다.
하지만 지연우는 그것조차 피해 냈다. 심지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지금의 지연우는 수련을 받기 전과 다르다.
올리비아에게 두들겨 맞던 지연우는 없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됐다.
게다가 플로르의 순수한 마력은 지연우를 인간 이상의 생명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연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봤다.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다.
그동안 기술의 향상은 확실히 느꼈지만 마력의 발전을 확인할 순간은 없었다.
그래서 발끝에 마력을 집중했는데, 걸음을 옮기는 순간마다 불꽃이 화르륵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조금만 힘을 줘도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흙과 돌멩이가 하늘로 치솟는다.
지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 전부를 불태워 없앨 수도 있을 것 같다.
끊임없이 느껴지는 마력은 상대가 존재라 해도 단숨에 죽일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이 정도라면…….’
성현을 만나도 될 것 같았다.
즉,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지연우가 걸음을 멈춘 후 휴대폰을 꺼내 귀에 댔다.
상대는 한지혁.
잠시 통화 연결음이 이어진 후 한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총장님! 며칠 동안 어디 계셨던 거예요?
“일이 있었어. 어쨌든, 이제 시작할 거야. 아성이에게도 전해 줘, 준비해 달라고.”
-네, 알겠어요.
지연우는 한지혁의 시원한 대답을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력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지연우가 다리를 들어 땅을 꽝 찍었다.
‘쩌어어어엉!’ 소리와 함께 대지가 흔들린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쩌어억 갈라진다. 멀리 숲에 있던 새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지연우가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마력을 사용했을 뿐인데, 땅을 가를 수 있고 불태울 수 있다.
‘유성현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겠어.’
지연우가 성현을 죽이려는 이유는 하나.
지연우가 플로르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곧 전쟁이 일어날 테고 성현이 그 틈을 이용해 지연우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말.
성현은 플로르와 반대되는 존재와 계약한 자, 그 목표는 지연우의 목이 될 게 명확하다.
지연우는 잠시 성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군주 나모르와 싸울 때의 그 모습.
성현은 짐승처럼 나모르를 향해 달려들었고 고위 존재라 불리는 군주를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까지 이뤄 냈다.
‘문제는…….’
성현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지금은 당시보다 더 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연우는 두렵지 않았다.
‘나도 강해졌어.’
지연우는 자신 역시 인간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은 힘만 믿는 머저리가 아니라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높인 후 싸우는 전략가라고 여겼다.
성현을 죽이기 위한 계략.
한아성을 통해 성현에게 마약을 먹일 테고 그것은 성현의 힘을 절반 이하로 줄일 거다.
‘힘이 없어진 상태로 계약자와 싸워야 할 거야.’
지연우는 수천 명에 달하는 계약자들을 준비해 성현과 싸우게 만들 거다.
성현이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마약을 먹은 상태에서 수천 명의 계약자들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오즈.’
지연우는 성현의 마력이 바닥을 친 순간 오즈를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오즈가 유성현을 상대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오즈의 몸에는 마력을 제한하는 봉인이 걸려 있다. 그 봉인이 풀리면 적어도 3배, 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유성현이라 해도…….’
마약을 먹은 상태에서 수천 명의 계약자 그리고 봉인이 풀린 오즈와 싸워 멀쩡할 수는 없다.
‘그때 내가 유성현의 목을 벤다.’
지연우는 마지막에 나타날 거다.
성현이 비틀거릴 때, 온 힘이 다했을 때, 삶의 의지를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때, 지연우는 직접 성현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 한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한 지연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 바로 오즈 때문이다.
오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모르를 토벌하러 가던 날, 이계의 땅에서 성현을 죽이러 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것도 아닌데…….’
지연우는 오즈의 생명을 느낄 수 있기에 그 생명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로르에게 오즈의 위치를 물어봤지만 답변은 듣지 못했다.
‘어디서 뭘 하는 거냐…….’
하지만 지연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즈는 지연우의 노예다.
지연우가 전하는 약이 없다면 끝없는 고통에 허우적거려야 한다.
죽지도 못한 채 모든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을 억겁의 시간 동안 누려야 하는 게 오즈의 운명.
지금쯤 오즈의 신체는 한계에 도달했을 거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돌아오겠지.’
지연우는 몸을 틀었다.
* * *
잠시 후, 지연우는 집에 도착해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플로르와 함께한 수련 기간, 인간의 시간으로는 며칠 이었지만 이계의 시간은 다르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지연우는 어서 씻고 휴식을 취할 생각을 이어 가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낯선 기운이 집 안에서 느껴진다.
‘뭐지?’
대한민국에 지연우의 집에 침입할 간 큰 인간은 없다.
설마 성현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기운이 느껴지는 거실로 향했다.
그곳에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50대 초반의 남성이 보였다.
처음 보는 외모지만, 지연우는 그 남성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오즈다.
오즈가 지연우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돌아왔어요.”
지연우가 오즈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손을 휘둘렀다.
짝!
오즈의 얼굴이 틀어졌다.
지연우는 멈추지 않고 오즈의 복부를 가격했다.
퍽!
오즈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반항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간절히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지연우가 오즈의 머리채를 콱 잡았다. 이어서 오즈의 얼굴을 들어 올린 후 살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디를 갔던 거냐?”
“야, 약을…… 주세요.”
“미친년.”
지연우가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오즈는 플로르가 지연우에게 줬던 선물.
중급 존재를 넘어설 정도의 힘을 가진 인간형 짐승.
지연우는 그녀에게 일정 기간마다 약을 먹이고 있다.
약을 통해 길들이는 중이다. 약이 없으면 그녀는 살이 찢어지고 썩어 가며 벌레가 기어 다니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오즈는 죽고 싶었고 지연우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플로르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 지연우에게 애완동물로 보내질 때, 작성했던 계약.
스스로 죽을 수 없다는 룰과 오즈의 손으로 지연우를 죽일 수 없다는 룰.
오즈는 억지로 살고 있을 뿐이다.
“약부터 주세요! 아아아아악!”
“주지. 네가 할 일이 있으니까.”
지연우가 잡았던 오즈의 머리채를 놓았다. 그리고 품에서 알약을 꺼내 바닥에 툭 던졌다.
오즈가 알약을 받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지연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유성현을 죽여야 할 거다. 감사히 생각하라. 봉인 또한 풀어 줄 생각이다.”
오즈의 몸에 봉인을 걸어 둔 이유는 하나.
그녀는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짐승이다. 봉인이 풀려 날뛰면 지연우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계약의 룰이 있다 해도 언제나 변수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지금의 지연우는 그녀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오즈를 보며 지연우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때맞춰 오즈까지 돌아왔다.
계획은 완벽하다.
* * *
성현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연우에게 온 연락, 미룰 것 없이 끝을 보자는 말, 장소는 여주의 한 공터.
성현 역시 기다리던 순간이다.
이런저런 말없이 놈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연우가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 성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이 없었다면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다.
저 멀리 언덕에 앉아 있는 지연우가 보였고 그 앞으로 엄청난 숫자의 계약자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성현이 나타나자 놈들이 웅성거린다.
“왔다!”
“쟤가 군주를 이긴 놈이라고?”
“약해 보이는데?”
성현은 이제 막 군대를 제대했다. 그 전까지는 고등학교에 있었다. 활약은 축소되었고 어린 나이에 이뤄 낸 업적은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저놈 하나 죽이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필요 있어?”
“씨×, 나 혼자도 죽일 수 있겠네.”
“마력도 없는 것 같은데?”
성현은 이런저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놈들의 얼굴을 확인할 뿐이다.
허접한 계약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강자다.
이름 꽤나 알리며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자들.
그리고 모두 플로르와 연관된 존재와 계약한 자들이다.
그리고 저 멀리 언덕에 앉아 있던 지연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지금 군대와 계약자는 짐승을 몰아내고 우리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념하고 있다! 하지만 저 유성현이란 놈은 전쟁을 일으켜 세상에 혼란을 만들어 내려 한다! 전쟁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꾀하려는 자! 이 나라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자!”
계약자들도 존재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곧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그 원흉은 성현이라고!
성현을 죽이면 막대한 보상을 주겠다고!
지연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이어졌다.
“죽여라! 평화를 위해 저 괴물 같은 놈을 죽여라! 그래야 우리의 가족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다!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싸워라!”
“와!”
계약자들이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현의 변명 따위는 듣지 않는다.
성현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나왔는지도 필요 없다.
가족을 위한다는 것은 핑계.
성현을 죽여 얻을 보상.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뿐이다.
그리고 지연우는 웃었다.
이제 성현이 계약자들과 싸운 후 지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다 죽으면 더 좋다.
하지만 살아남는다 해도 오즈가 있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나서면 되는 거다.
게다가 지연우는 지금의 성현과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저놈이 올리비아를 가지고 놀았다고? 죽어라, 유성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성현이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계약자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탁!
눈을 부릅뜰 새도 없을 정도로 정말 찰나였다.
성현은 모든 계약자를 뒤로하고 순식간에 지연우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귀부터 찢자.”
성현이 지연우의 귀를 콱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