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플로르는 오랜 시간 성현을 지켜봤다.
그 마력과 권능을 알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갈구하는 탐욕을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성현은 다르다.
계약자들과 정면으로 붙었으며 마약까지 마셨다고 한다. 심지어 오즈에게 치명상까지 입었다.
‘……유성현이?’
플로르는 입술을 쓸며 생각을 이어 갔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현은 지연우의 계략에 넘어가긴커녕 이런 상황까지 예측했을 놈.
뭔가를 반드시 보여 주는 놈.
일방적으로 당하는 놈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플로르는 곧장 지연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심하라. 유성현은 너를 유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온 메시지, 지연우는 과신에 차 있었다.
-기껏해야 독이겠지요. 유성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페이트 길드에서 독을 수련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적을 알고 있는데, 제가 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연우가 보낸 메시지는 플로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사활을 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연우는 사자가 아니며 성현 역시 토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이다.
성현은 포식자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능력이 있다.
그래서 플로르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조심하라 했다!
그런데 메시지가 전송되지 않는다.
누군가 마력으로 메시지를 막아서고 있다.
‘마법사가 움직였나?’
플로르는 뭔가 시작됐다는 것을 느꼈다.
유성현이 노리는 게 분명히 있다고 확신하며 길쭉하고 하얀 손을 주먹 쥐었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자신의 마력을 보내기 위해서다.
마법사의 마력이 막아서고 있다 해도 마력은 보낼 수 있을 거다.
플로르에게 지연우는 강림을 도울 그릇.
지연우가 있어야 플로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성현의 꾀에 넘어가 죽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건 안 돼!’
하지만 플로르의 머릿속에서는 지연우가 처참할 정도로 찢겨 죽는 게 예상되고 있었다.
성현의 손에 당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지연우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안 된다고 했다!’
플로르의 눈동자가 시커멓게 물들며 그 아름다운 몸에서 추악할 정도로 검고 짙은 연기가 흘렀다.
그것은 살기.
모든 신하들이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플로르의 기분이 언짢아질 때는 그걸 피해야 한다.
그것이 이곳의 룰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녀 하나가 성으로 들어와 플로르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신하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하나의 존재가 생명을 잃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플로르는 시커멓게 변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 꿇는 마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냉혹한 목소리.
혹시라도 별일 아닌 것으로 자신의 시간을 빼앗았다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
마녀가 고개를 들어 플로르를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에느가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
모두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수십억 년 동안 전 우주를 뒤져도 나오지 않았던 것.
그 에느가인을 찾았다는 말.
빌어먹을 지르힐과 마법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에느가인을 손에 얻으면 이 세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고 이 척박한 땅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있다!
플로르가 벌떡 일어서며 다급히 물었다.
“어, 어디에 있느냐!”
어떤 경우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던 플로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플로르의 살기를 피하던 신하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녀를 바라봤다.
모두가 마녀의 목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요한 적막 속에서 이어진 마녀의 음성은.
“……아직은 모릅니다.”
플로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어이없는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거다.
깔깔깔 웃는 그 목소리에 신하들은 입술을 씹었다.
‘저 멍청한 것이…….’
‘감히 어머니를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한참 웃던 플로르가 웃음을 뚝 그치며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마녀를 향해 손을 펼쳤다.
“재미없는 농담은 잘 들었다. 목숨을 끊고 싶은 게로구나. 내 너에게…….”
마녀를 향해 뻗어진 플로르의 손이 검은 마력에 휩싸였다.
드넓은 성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드드드 흔들렸다.
마력이 뻗어 나가면 마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그때 마녀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지, 지구의 한 사막에서 사라진 예언서의 일부를 찾았습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에 에느가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언서?”
플로르의 손에 있던, 금방이라도 마녀를 죽일 것처럼 꿈틀대던 마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가져오라.”
플로르의 지시에 마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플로르가 앉은 왕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마녀의 몸은 바르르 떨리고 있다.
방금 자신을 죽이려던 플로르의 마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녀 정도는 우습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 힘.
지금 손에 든 예언서가 거짓으로 판별되면 마녀의 미래는 뻔하다.
죽음의 세계로 인도될 거다.
어느새 플로르의 앞에 선 마녀가 고개를 숙인 채 공손이 예언서를 꺼내 바쳤다.
플로르는 무심한 눈으로 예언서를 받아 들어 읽기 시작했다.
달이 찼을 때 신이 될 돌덩이가 인간의 새 생명에 파고든다.
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탐욕을 위해 백 명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지어다.
태고의 강에 피가 채워지면 에느가인은 나타…….
예언 속 묘사는 직접적이었다.
에느가인이 갓난아기의 몸에 들어간다는 것.
한 번에 백 명의 아기를 죽이지 말라는 것.
‘그런데…… 태고의 강에 피가 채워지면 에느가인은 나타……?’
그 구절의 뒷부분이 찢겨 있다.
피가 채워지면 에느가인이 나타나는지, 나타나지 않는지.
“하…….”
플로르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것 중 하나.
그것도 정말 중요한 곳에서 찢겨 버린 구절.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플로르가 태고의 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거다.
한때는 맑은 물이 철철 흘렀지만 수억 년 전에 말라붙어 지금은 사막으로 남아 있는 곳.
플로르는 직접적으로 적힌 예언서인 만큼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그때 태어난 백 명의 아기를 죽이고 그 피로 태고의 강을 채우기로.
그 강에 피가 가득 담겨 흐를 때, 에느가인이 나타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플로르의 시선이 마녀에게 향했다.
마녀는 화들짝 놀라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방금 플로르가 내뱉은 그 한숨을 비관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거다.
하지만 마녀의 예상은 틀렸다.
플로르가 빙긋이 미소를 그리며 마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내 너에게 상을 주고 싶구나. 원하는 게 있느냐?”
* * *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지연우의 공격.
성현은 망설임 없이 창을 휘둘러 불꽃을 막아 냈다.
파파파팡!
창에 막힌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주변에 서 있다가 불꽃에 맞은 계약자들이 비명을 지른다.
물을 뿌려도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이 타들어 갈 때까지 불꽃은 이어진다.
“아아아악!”
하지만 지연우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손에 쥔 검을 땅에 꽈아앙 찍었다.
동시에 땅이 갈라지며 용암이 솟구쳐 올랐고 벽이 되어 사방을 가로막았다.
성현의 도주로를 막는 거다.
지금껏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성현이 얄미웠나 보다.
‘끝내자!’
지연우가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성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지옥의 불꽃으로 타들어 가는 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그때마다 ‘화르르륵!’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난다.
성현은 검을 피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지연우의 마력은 성현보다 떨어진다.
그 실력은 몇 단계 아래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놈의 검은 다르다.
플로르에게 받은 것.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스치는 순간 중상을 입을 거다.
‘젠장.’
성현은 몸을 최대한 낮추며 지연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창을 단도로 바꾸고 놈의 복부를 노렸다.
‘멍청한!’
지연우는 비웃었다.
성현의 공격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부를 노렸던 것은 거짓.
진짜는 다른 곳에 있다.
지연우가 검을 뻗을 때, 성현은 몸을 빙글 틀어 놈의 멱살을 잡았다.
예상과 다른 성현의 행동에 지연우가 눈을 찌푸렸다.
‘주먹질을 하자고?’
하지만 그것 역시 예상을 벗어났다.
성현은 지연우가 ‘어?’ 하는 순간 먼 곳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성현은 땅을 박차고 던져진 지연우를 쫓아 몸을 날렸다.
수천 명의 계약자들에게 벗어난 곳.
지연우는 땅을 몇 바퀴 구른 후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앞에 도착한 성현을 보며 히죽 웃었다.
“왜? 이곳에 오면 네가 유리할 것 같나?”
“길게 말할 것 있나?”
성현은 건조하게 답하며 다시 단도를 창으로 바꿔 들었다.
다시 싸움이 시작됐다.
* * *
성현과 지연우가 사라졌다.
계약자들은 먼 곳으로 이동해 싸우면서도 여기까지 느껴지는 두 사람의 마력에 혀를 내둘렀다.
“괴물이야. 괴물…….”
그들은 누가 이길지 궁금했지만, 거기까지 쫓아가 구경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려 죽은 게 수십 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지연우의 불꽃에 모두 타 죽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지연우는 악마 같은 성현과 싸우며 주변을 살필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같은 편이 자신의 공격에 타 죽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다.
“일단…… 수습을 하자고.”
한 계약자가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며 아버지 그리고 형제.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똑같이 이름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방송 나오는데?”
누군가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계약자다.
“무슨 소리야? 방송이라니?”
“지연우하고 유성현이 싸우는 게 지금 인터넷 방송에 떴어.”
계약자들이 너도나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누가 찍고 있는지 모르지만 인터넷 방송으로 그들의 그 처절한 싸움을 볼 수 있다.
“지연우가 이기고 있잖아!”
성현의 몸에는 어느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피가 아니라 성현의 피다.
많이 지쳤는지 허리를 굽히고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다.
계약자들은 지연우의 승리를 확신하며 환호했다.
“됐어!”
“살아서 갈 수 있어!”
“이겼어!”
하지만 그 환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현과 지연우의 대화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성현이 끌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왜 죽였냐?
-뭘?
-그 검으로 내지른 불꽃, 조금만 신경 썼어도 네 동료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것조차 피하지 못하는 벌레를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계약자들은 적막했다.
수천 명이 서 있었지만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둘러볼 뿐이다.
지연우의 검에 죽은 자들, 그 시체, 그리고 지연우의 지시에 따라 싸웠음에도 벌레라고 불리는 그들이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