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하지만 인간이라는 게 그렇다.
지금껏 믿고 있던 게 틀렸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틀린 것을 인정하는 순간 믿어 왔던 그 시간마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이, 이거 편집 같은 거 아냐?”
“맞아, 편집. CG로 똑같이 할 수 있다며?”
“목소리도 조금 다른 것 같아.”
“조작이야.”
그들에게 지연우는 영웅이다.
그를 따라 이곳에 와서 처참하게 죽은 동료들이 있다.
이름 없이 죽어 간 그들의 원혼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영상 속의 사람이 지연우 총장이 맞는다고 해도 괜찮아.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들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근거를 가져다 붙였다.
진실을 외면하며 현실에 눈감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느끼고 있었다.
이게 진실이라고.
그렇게 그들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현이 원하는 과정 중 하나다.
지금은 작게 금이 간 정도지만 그 균열이 아물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면, 그들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다.
세상엔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영상에 집중했다.
* * *
그 시각, 지연우가 불에 타오르는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성현은 뒤로 물러서는 게 전부다.
공격은 물론 방어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성현을 지켜보던 지연우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체력이 다했구나.”
게다가 성현의 복부, 오즈에게 당한 상처에서 쉬지 않고 피가 꿀렁거린다.
지연우와의 싸움에서 베인 상처 역시 깊다.
심지어 눈동자에 초점도 희미하다.
이미 마력이 바닥을 쳤다는 뜻.
“이제 그만 죽어라. 그 고통을 끝내 주마.”
지연우의 검에서 검은 마력이 휘몰아쳤다.
이어서 마력이 지연우의 몸을 휘감더니 검은 연기가 불꽃처럼 출렁였다.
그 마력의 후폭풍에 성현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다.
지연우는 잠시 핏줄을 타고 용솟음치는 마력을 즐겼다.
느껴 보지 못했던 폭력성이 가슴을 간질거린다.
당장 붉은 피를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싶다.
지연우가 스산하게 웃으며 성현을 바라봤다.
거친 숨을 내뱉는 성현은 초라했다.
살기 위해 주춤주춤 물러서는 게 안쓰럽기까지 하다.
‘벌레.’
지연우는 성현을 보며 벌레를 떠올렸다.
징그럽지만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
이 정도의 놈을 플로르가 왜 신경 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저만큼의 권능을 얻은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며 끝이다.
마력을 주체 못하고 멋대로 쓰다가 한계를 느낀 철부지 애송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결국 지연우 본인에게 목을 베이고 죽을 미래다.
“……처음부터 내가 나섰어도 상관없을 듯했어.”
지연우는 끌끌 웃으며 저벅저벅 성현을 향해 다가섰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담긴 마력이 엄청나다.
‘쿵! 쿵!’ 소리가 나며 땅이 쪼개졌고 발끝에 불꽃이 일었다.
흙먼지가 일었고 돌덩이가 허공으로 붕붕 떠올랐다.
“……죽기 전에 하나만 더 묻자.”
성현의 힘 빠진 목소리에 지연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픽 웃었다.
“귀찮다.”
지연우는 건조하게 답하며 성현의 목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불덩이가 성현을 향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후우우웅!
성현은 다급히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스쳐 간 검의 불꽃에 화상을 입은 것 같지만 지금은 그 통증을 느낄 시간이 없다.
그렇게 성현이 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자 지연우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지금 공격으로 성현의 목숨을 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연우의 시선이 성현에게 틀어졌다.
성현은 다리가 풀렸다.
검은 피했지만 균형을 잃고 땅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성현이 다급히 물었다.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뭐겠어? 평화지.”
지연우는 끝까지 뻔뻔했다.
성현은 지금 당장 지연우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분노를 간신히 삼키며 입을 열었다.
“평화? 그런 가식적인 소리는 집어치워.”
지연우의 눈이 찌푸려졌다.
성현의 눈빛이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지연우가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식이라…….”
“위선이기도 하지.”
“착한 척하는 게 나쁜 건가? 나쁜 척하는 것보다 낫잖아?”
지연우가 다시 성현과의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재밌잖아, 병× 같은 새끼들이 만들어진 이미지에 속아 꺅꺅 소리 지르는 거.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면서 정치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
“…….”
“그거 알아? 내가 사람들을 구한 다음에 인터뷰할 때, 항상 피해자들의 이름을 말하잖아? 그 피해자 중에 내가 죽인 사람도 많아. 그런데 그 유족이 찾아와서 뭐라 하는 줄 알아? 고맙대. 미친 새끼들.”
“…….”
“더 재밌는 것은 그 유족 중 하나가 이곳까지 날 쫓아왔다는 거야. 방금 내 마력에 휩쓸려 죽기는 했지만.”
한 번 터진 목소리는 끝을 모르고 내뱉어졌다.
혼자만 알고 있던 보물 상자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것.
상대가 곧 죽을 성현이기 때문에 살짝 보여 주는 그것.
그런데 그 안에는 끔찍한 괴물이 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역겹고 토악질을 할 것 같은 괴물.
성현은 입술을 꽉 씹었다.
회귀 전, 성현 역시 지연우의 가식적인 모습에 속아 삶의 끝을 봤었다.
그때도 놈이 저런 식의 생각을 했다는 게 생각만 해도 목구멍까지 불덩이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개새×.”
“네가 어려서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세상이 그렇더라. 위에 있는 인간 중에 개×끼 아닌 인간이 없더라. 다 그런 거지.”
“그래서 너도 똑같이 하려고?”
“금동이의 좋은 술은 일천 백성의 피요, 옥쟁반 위의 좋은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시를 중얼거린 지연우가 조용히 웃었다.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지? 세상은 똑같아. 원망 소리 높다고 위에서 들을 것 같아? 안 들어. 벌레 새끼들이 원망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
“죽기 전에 알고 죽어라. 난 잘못한 게 없어. 날 따른 놈들이 멍청한 거지.”
지연우가 다시 검을 세웠다.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성현을 노려보며 냉랭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말이 많았어. 그만 죽자.”
순간, 성현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조금 떨어진 곳.
그곳에 이서아가 카메라를 들고 숨어 있었다.
성현과 눈을 마주친 이서아는 눈을 감았다.
지금의 상황을 바탕으로 펼쳐질 수만 가지 미래를 확인하는 중이다.
지연우는 시커먼 속을 게워 냈고 많은 사람들이 그걸 지켜봤다.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는 사람만 해도 이미 수만 명이다.
그중에는 앞서 계약자들처럼 이 영상을 조작이라며 욕을 내뱉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지연우가 있어야 한다며 댓글을 남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욕을 한다.
그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서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성현과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성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껏 지연우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하나.
바로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다.
지연우의 가식을 진실로 받아들인 그 마음.
그들이 성현과 그 주변에 테러를 가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하지만 끝났다.
이서아는 미래를 봤고 지연우를 죽여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렸다.
“……웃어?”
지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현은 웃고 있었다.
곧 죽을 놈이 정말 환하게 웃는 중이다.
뭐가 즐거운지 급기야 배를 잡고 폭소한다.
웃다가 검은 피를 토해 내면서도 ‘끅끅’거리며 웃고 있다.
지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성현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 버렸다고 판단했다.
그때 성현이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 내며 입을 열었다.
“약속할게. 넌 쉽게 안 죽일 거야. 최대한 고통스럽게, 치욕스럽게, 비참하게 죽여 줄게.”
지연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현이 내뱉은 말을 허세라고 여기려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약물의 효과가 풀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다시 마력이 샘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다를 것은 없다.
성현은 이미 만신창이, 온몸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다.
저대로 싸운다는 것은 무리다.
다시 승리를 확신한 지연우가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미쳤구나?”
“미쳐? 살면서 이렇게 정신이 맑은 적은 지금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믿어. 내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거든. 죽여 줄게.”
“이런 미친 새끼가!”
지연우는 더 이상 성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고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휘둘렀다.
‘쩌적!’ 소리와 함께 공기가 깨진 것처럼 흩어질 정도였다.
그 검이 정확히 성현의 목을 노리고 있다.
‘끝이야.’
하지만 지연우는 베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후우우웅!
검은 허공을 갈랐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런데 성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지연우의 눈으로도 좇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그 자리를 벗어난 거다.
“씨×…….”
지연우가 식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성현의 마력이 회복됐다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성현의 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칼질을 당했다.
수천 명과 싸웠고 오즈를 상대했으며 지금은 지연우와 사생결단을 내고 있다.
반면 지연우는 멀쩡하다.
귀가 찢어진 것을 제외하면 상처는 없다.
마력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나 마약 안 마셨어.”
성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은 지연우의 바로 뒤.
지연우는 휙 고개를 틀었다.
중세 유럽에서 볼 법한 거무튀튀한 갑주를 입은 성현이 보였다.
“……뭐라고?”
성현이 창을 툭툭 털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약 안 마셨다고.”
지연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신을 당했다는 거다. 한지혁인지 한아성인지, 둘 중 하나가 자신의 계획을 짓밟았다.
“이 새끼들이…….”
지연우는 한지혁과 한아성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성현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심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네가 생각할 것은 누가 배신했는지가 아니야. 내가 마약을 먹은 척 행동한 이유를 궁금해해야지.”
“……뭐?”
지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마약을 먹지도 않은 놈이 마력이 떨어진 척 연기했고 스스로 위기에 내몰렸다.
지연우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이유가 뭐야?”
“뭐긴, 내 손에 놀아난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성현은 주먹을 휘둘러 지연우의 복부를 가격했다.
꽈앙!
지연우는 피할 생각은커녕 성현의 주먹조차 볼 수 없었다.
내장이 터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