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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03화 (203/252)

203화

그리고 곧 지연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계약자들의 예사롭지 않은 살기를 느낀 거다.

“너희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야! 저 새끼야! 저 새끼라고!”

지연우는 입에서 피가 튈 정도로 외쳤다.

하지만 계약자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병장기를 쥔 손에 남은 마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

“이 새끼들아!”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지연우를 죽이려 한다.

지연우를 죽여야 이곳에서 숨진 동료들의 한을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래야 오랜 시간 지연우에게 속아 질질 끌려다닌 자신의 인생에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신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말과 동시에 한 계약자가 지연우의 앞으로 휴대폰을 툭 던졌고 지연우의 눈동자가 땅에 떨어진 휴대폰으로 틀어졌다.

“……!”

화면에는 지연우의 전투 장면이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는 거다.

벌레라고 했던 것.

재미 삼아 죽인 자의 유족이 고맙다고 했던 것.

그 모든 것.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지연우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것처럼 껄껄껄 웃었다.

“크핫핫핫핫!”

그 웃음이 그쳤을 때, 지연우의 눈빛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놈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먼 곳에서 뒹굴던 검이 허공을 날아 지연우의 손에 도착했다.

지연우가 타오르는 검을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너희를 속인 적도 없어. 너희가 멋대로 나를 따른 거지.”

“…….”

“한 놈은 죽인다. 아니, 두 놈도 죽인다. 내게 덤벼든 모든 놈을 죽인다. 적어도 너희를 죽일 힘은 있다.”

“…….”

“죽고 싶은 놈은 덤벼라. 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덤벼들지 않는 놈은 살려 둔다. 그러니까, 비켜라.”

지연우는 그 말을 끝으로 저벅저벅 계약자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계약자들이 둥글게 지연우를 포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덤벼들지 않는다.

지연우가 움직일 때마다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뒤로 물러서고 있다.

심지어 길을 터 주는 놈도 보인다.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지연우다.

이들은 오랜 시간 알게 모르게 지연우에게 길들여졌다.

지연우가 진정한 선(善)이라 생각하며 그 지시를 따랐다.

지연우만이 세상을 바꿀 영웅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지연우의 손에 처참하게 썰려 죽는 짐승을 봤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지연우에 대한 두려움은 섣불리 병장기를 휘두를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계약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지연우의 손에 친구를 잃은 계약자, 그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며 지금껏 분노를 삼키던 계약자가 움직였다.

“죽어!”

지연우는 암살자처럼 나타난 계약자를 보며 발을 뒤로 옮겼다.

후우우웅!

계약자의 칼이 지연우의 코끝을 스쳤다. 평소였다면 쉽게 피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지연우는 온몸이 망가진 상태. 완벽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지연우는 코끝에서 서늘한 칼날의 감촉을 느끼며 팔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덤벼든 계약자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욕은커녕 비명조차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즉사한 거다.

하지만 계약자는 눈을 감지 않았다. 부릅뜬 눈으로 지연우를 노려보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연우는 그 억울한 눈동자를 외면했다.

온몸에 그 계약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 다른 계약자들을 향해 외쳤다.

“말했다. 덤벼드는 놈은 죽인다. 살고 싶으면 비켜라.”

지연우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성현의 손에서 도망친 후 훗날을 기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여겼다.

앞에 선 계약자들이 겁을 먹은 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덤벼든 계약자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고 그것은 신호탄이 되었다.

“죽여!”

“저 개새×!”

계약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지연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 채애앵!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 * *

그 시각.

플로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지연우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지만 어떤 의미로 즐거워 보였다.

‘이제 내 말을 더 잘 듣겠어……. 유성현의 계략이 오히려 날 도와줬어.’

지연우는 생각만큼 플로르의 말을 잘 따르지 않았다.

한 번씩 고집을 피워 댔고 자신이 최고라는 망상을 갖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싸움으로 지연우는 고립됐다.

그의 곁에는 사람이 없다.

응원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심지어 혼자 고립되어 수천 명과 싸우는 중이다.

이제 지연우가 손을 뻗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플로르뿐이다.

플로르가 손가락을 툭툭 움직였다.

그녀는 적당한 시간에 자신의 마력을 보내 지연우를 지원할 생각이다.

유성현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도망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지연우가 도망치는 곳은 당연히 플로르의 품속이다.

‘마법사에 의해 메시지는 막혔지만 마력은 보낼 수 있지.’

플로르는 지연우를 그릇으로 키운 후 그 몸을 차지할 미래를 떠올렸다.

그리고 플로르의 머릿속은 에느가인을 찾기 위한 다음 계획으로 이어졌다.

달이 찼을 때 신이 될 돌덩이가 인간의 새 생명에 파고든다.

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탐욕을 위해 한 번에 백 명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지어다.

태고의 강에 피가 채워지면 에느가인은 나타…….

플로르는 보름달이 뜰 때 태어나는 갓난아기, 그곳에 에느가인이 숨어 있으며, 에느가인을 찾기 위해선 한 번에 백 명을 넘지 않는 수의 아기만을 사냥해야 한다고 예언서를 해석했다.

그래서 플로르는 예언서에 따라 에느가인을 찾기 위해 보름달이 뜰 때마다 백 명의 갓난아기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원대한 계획의 성공을 위한 두 가지 시나리오…….’

인류 전체를 식민지로 삼든가, 아무도 모르게 백 명의 아기를 납치해 올 부대를 만드는 방법.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백 명의 아기를 납치해 오는 것은 어머니급의 존재라 해도 불가능한 일.

생각은 자연히 인류 전체의 식민지화에 집중됐다.

처음엔 지연우를 그 식민지의 왕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식민지의 왕이라 해도 주변에 그를 동조하는 세력이 필요한 법.

지연우의 곁에 그런 세력은 없다.

‘넌 단지 그릇이야.’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플로르에게는 지연우 외에도 다른 계약자가 존재한다.

그들을 적당히 구슬린다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뤄 낸다면, 인간을 움직이는 것 따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슬슬…….’

플로르는 지연우에게 마력을 공급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면 지연우의 생명이 다른 계약자들의 손에 끊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 * *

-직접 안 죽이나?

성현의 머릿속에 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법사는 성현의 시선을 통해 공터를 바라보며 낄낄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알겠지만, 난 네 손에 더 많은 피를 묻혔으면 한다.

마법사가 즐거운 이유다.

공터에 쓰러진 시신, 그 대다수는 성현의 손에 의해 삶을 마감했다.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마법사는 단 하나의 생명체라도 어서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성현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지연우의 마지막 싸움을 지켜보는 게 전부다.

“카메라는 껐지?”

성현이 던진 질문은 마법사를 향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촬영을 끝내고 옆에 선 이서아에게 한 거다.

이서아가 카메라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싸움이 끝나면 지르힐을 구하러 가는 것인가?”

이번에도 이서아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처음으로 얼굴 한번 마주 보겠네.”

성현은 지르힐과 수십 년을 함께했다.

코어의 세상에서 봤던 지르힐은 나모르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

그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처음이다.

“쉽지는 않을 거예요.”

이서아의 말에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연우를 죽이는 것도 무량대수 중의 하나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되었어. 우리가 토벌대에 휩싸여 죽었던 것처럼, 저놈은 자신의…….”

성현이 뒷말을 줄였다.

위력적인 마력을 느낀 거다.

그리고 그 마력은 지연우의 몸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왔구나.”

성현은 지연우의 몸에 플로르의 마력이 닿았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성현의 입술이 죽 찢어지며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성현의 머릿속에 회귀 전, 마지막 싸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플로르는 수천 명의 피를 제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지연우를 그릇으로 삼기 위해, 그 가능성을 보기 위해 마력을 주입하는 게 전부다.

‘그 계획, 내가 찢어 주마.’

성현이 부채를 펼쳤다.

*

지연우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고 그 입에서는 참기 힘든 신음이 저절로 흘렀다.

“끄어어어어!”

인간이 존재의 순수한 마력을 받아들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끝없는 고통은 쾌락마저 얹어 주고 있었다.

지연우는 웃었다.

플로르의 마력이 들어온 이상 자신을 향해 덤벼든 계약자를 모두 도륙할 수 있다고 여긴 거다.

“벌레 같은 새끼들!”

지연우가 검을 휘둘렀다.

쇄애애애액!

‘퍽!’ 소리와 함께 계약자들의 몸뚱이가 터져 버렸다.

검 날이 닿기도 전에 그 마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난 거다.

죽은 계약자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그들의 피로 흠뻑 적셔졌다.

“아아악!”

놀란 계약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연우가 화르륵 타오르는 검을 들고 계약자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설마, 나를 이길 것이라 생각했나?”

계약자들은 치아가 으스러질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씨× 새끼야!”

이어서 욕지거리와 함께 지연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방패로 막아!”

“좌측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전술을 짜 보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계약자들의 머리가 분리됐고 불에 타 버렸으며, 핏물이 땅에 고였다.

“으아아아악!”

신체가 잘리고 불에 타는 기괴한 소리가 비명을 덮었다.

서걱! 서걱! 화르르륵!

허벅지부터 어깨까지 찢긴 계약자가 무릎을 꿇었다.

지연우는 계약자들의 비명소리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오히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히죽 웃기까지 하고 있다.

“벌레 새끼들이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해?”

“아아아악!”

“놀아 줬더니, 친구라고 생각했나?”

“끄어어억!”

“오늘 너희 모두를 죽인다!”

플로르는 지연우가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연우는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팔과 다리가 떠다니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내장을 온몸에 치렁치렁 달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플로르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이곳은 마법사의 권능으로 모든 메시지가 막힌 상태.

지연우는 폭주했다.

“아아아악!”

땅에 쓰러져 사지를 꿈틀거리는 계약자의 머리 위로 푹, 지연우의 검이 찔러 들어갔다.

몸통을 잃은 머리가 눈을 껌뻑거린 채 데굴데굴 굴러갔다.

하지만 지연우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계약자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부아아아악!

그때였다.

쩌어어어엉!

둔탁한 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계약자는 죽지 않았다.

지연우의 검은 성현의 창에 막혀 버렸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성현을 본 지연우가 입술을 죽 찢어 웃었다.

“너 이 개×끼. 기다렸다. 내가 너를 두고 갈 수는…….”

촤아아아악!

성현의 창이 지연우의 몸을 갈랐다.

정말 찰나의 순간.

지연우의 어깻죽지가 주욱 갈렸다.

이어서.

콱!

성현의 창이 빙글 돌더니 지연우의 허벅지를 가차 없이 찔러 버렸다.

‘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지연우의 몸이 스르륵 땅으로 무너져 내렸다.

“쿨럭!”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지연우의 입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이내 원망스러운 눈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너…….”

하지만 지연우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죽음을 확실히 느낀 거다.

이 정도의 상처는 플로르라 해도 고쳐 줄 수 없다.

꺼져 가는 생명력을 다시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다.

지연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 죽였어야 했어.”

“…….”

“유언을 남겨도 되겠…….”

퍽!

성현은 놈의 목소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성현이 휘두른 창에 지연우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허공으로 뇌수와 핏물이 떨어진다.

동시에 뒤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와!”

계약자들이 손을 치켜세우고 좋아한다.

지연우의 죽음을 보며 승리한 것처럼 방방 뛰고 있다.

역겨운 위선자.

그 끝은 초라했다.

“죽었어! 지연우가 죽었다고!”

방금까지 지연우를 환호했던 자들.

지금은 지연우의 죽음에 즐거워하고 있다.

성현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이 조용해졌다.

성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성현이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너희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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