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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05화 (205/252)

205화

* * *

창을 횡으로 휘두르자 후두둑, 8명의 허리가 끊어져 나갔다.

성현은 허리가 끊어진 한 명의 머리를 바로 낚아챈 후 날아오는 화살의 방패로 삼았다.

파파팟!

고슴도치처럼 방패막이 된 계약자는 볼품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저 일회용 방패막이.

성현의 행동은 막힘이 없었다.

사방이 다 적이고 죽이면 된다.

성현의 눈동자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고 곳곳에서 지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수천 명이 모여 떠들어 대던 공터는 피 냄새가 가득했다.

토악질이 날 정도로 끔찍한 시체가 뒹굴어 다녔고 까마귀가 곳곳 앉아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제 넷.

성현과 이서아, 오즈, 마지막으로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고 있는 한 계약자였다.

성현이 계약자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계약자를 향해 창끝을 겨눴다.

“사, 살려 주세요.”

계약자가 손바닥을 비비는 행동은 빨랐다.

이 상황에 잔머리는 필요 없다.

어떻게든 빌고 또 빌어서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 같은 성현이 망설임 없이 창을 찔러 넣을 거다.

“제발요!”

계약자는 울부짖었지만 성현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끝을 곧게 겨누고 있을 뿐이다.

그러자 계약자가 자신의 품을 뒤지더니 돈과 시계 그리고 몇 개의 아이템을 꺼내 내밀었다.

그런 계약자의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성현은 계약자가 내민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돈과 시계는 필요 없다.

돈은 충분히 많고 고가의 시계는 관심 밖, 아이템 역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계약자는 성현의 무심한 눈빛을 읽었다.

“지금 제가 가진 전부예요. 하지만 살려 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다 드릴 수 있어요. 쓸 만한 반지도 있고……. 살려 주세요! 제발!”

성현의 대답은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계약자는 죽어 있는 동료들의 품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 이 아이템은 어떠세요? 이것도 별로면……. 잠시 만요. 저, 저놈이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항상 자랑하던 놈인데요.”

계약자는 질척거리는 내장을 뒤지며 사방에 놓인 시체를 파헤쳤다.

몸에 피가 덕지덕지 묻었지만 상관 않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다시 성현의 앞으로 무릎을 꿇고 기어 왔다.

“여, 여기……. 모든 스텟을 1씩 올려 주는…….”

계약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성현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계약자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이제는 온몸을 달달 떨며 성현의 자비를 바라는 게 전부다.

“이름이?”

“성근입니다! 성근!”

성현은 성근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봤다.

기억에 없다.

그저 그런 계약자라는 뜻이다.

“계약자가 되기 전에 뭐 하던 놈이지?”

“배, 백수였습니다!”

계약자는 성현의 모든 말에 있는 힘껏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성질을 건들면 안 된다.

수천 명을 몰살시킬 정도로 잔혹하다.

눈 밖에 나면 죽는다.

“살려 주십시오!”

“넌 살려 준다.”

“네?”

“살려 준다고.”

성현의 건조한 목소리에 계약자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눈앞에 보인 거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성현의 말에 조건이 붙었다.

계약자는 정말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약속했다. 그리고 기억해. 난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정말 싫어해. 지옥이라도 쫓아가서 가장 잔인하게 죽여 버릴 거야.”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약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 * *

-지연우 씨와 하우치가 계약자들을 전부 죽였고 유성현 씨가 그 둘과 싸웠습니다.

뉴스가 시끄러웠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살아남은 계약자가 보였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지연우와 하우치가 계약자들을 도륙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성현이 뛰어들어 싸웠다는 것.

그리고 성현이 두 사람을 해치웠다는 결말.

-유성현 씨가 아니었다면 저도 죽었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려 유성현 씨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삑.

텔레비전의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서은서가 시선을 뒤로 틀며 소파에 앉아 있는 성현을 향했다.

“정말이에요?”

“어떤 게요?”

“지연우와 하우치를 이겼다는 거요. 정말?”

서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긋이 웃었다.

“제가 질 것 같았어요?”

“아뇨. 당연히 이기죠.”

서은서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녀는 성현의 강함을 잘 알고 있다.

플로르의 딸을 처참하게 박살 내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하우치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성현에게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의문을 가진 것은 하나.

“지연우와 하우치가 손잡았다는 게 의아해서요.”

“손잡은 것은 아니고, 어쩐 일인지 하우치가 그 자리에 나타났네요. 그래서 싸웠을 뿐이에요.”

서은서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음 달 초에 발표될 성현의 랭킹이 벌써부터 기대됐기 때문이다.

“적어도 10위 안에는 랭크 될 것 같아요.”

높은 랭크가 나올수록 페이트 길드에는 이득이다.

서은서의 눈이 반짝일 때, 성현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걸 바라고 저런 쇼를 한 겁니다.”

“네? 쇼?”

“그런 게 있어요.”

성현이 한 명을 살려 두며 언론에 이름을 내보인 이유는 유명해지기 위해서다.

인지도가 높을수록 앞으로의 행동에 거침이 없어진다.

이름이 알려질수록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의 전쟁에 유리해질 거야.’

중립에 선 존재와 계약한 자들은 성현의 편에 서서 플로르의 대군과 싸울 거다.

그 처절한 싸움 속에서 그들과 계약한 존재는 자신의 계약자를 지키기 위해 성현을 도울 게 분명하다.

전쟁에서 숫자가 많아 나쁠 것은 없다.

성현이 찻잔을 손에 들며 말했다.

“어쨌든,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말씀하세요. 뭐든.”

“오즈라고 알고 있죠?”

“……오즈요?”

서은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바닥에서 오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살인귀이며 사이코.

“설마, 다음 타깃이 오즈?”

하지만 성현의 목소리는 예상과 달랐다.

“오즈가 약물에 중독되어 있어요.”

“……네?”

뜬금없는 말에 서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현이 찻잔을 내려 두며 계속 말했다.

“원래는 이곳으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성현은 일부러 혼자 왔다.

오즈가 나타나면 아무래도 페이트 길드의 길드원들이 동요할 수 있어서다.

오즈의 본모습은 아무도 모르지만 이곳은 능력자들이 즐비한 페이트 길드.

정체가 언제 드러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혼자 왔고…….”

성현은 서은서에게 오즈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오즈가 어떤 이유로 지연우의 지시를 받았는지.

“지연우가 오즈에게 투여하던 약물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페이트 길드의 베이스는 독이다.

웬만한 약은 그들의 손으로 제조할 수 있다.

“다음 계획에 필요하거든요.”

일어날 전쟁에서 오즈와 같은 실력자는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오즈는 배신할 가능성이 적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서은서는 이런저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성현의 행동이 자신에게 득이 될 거라 생각해서다.

서은서는 성현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 *

며칠 후.

성현은 이서아와 함께 소고기 전문점에 앉아 있었다.

이서아는 소고기를 입에 넣으며 음미했다.

“이게 한우 최상 등급이라는 넘버 나인이죠? 너무 맛있어요.”

소멸의 바다에서 돌아온 이서아는 음식에 집착했다.

쉴 새 없이 먹어 댄다.

볼이 터질 것처럼 소고기를 입에 담고 눈까지 감는다.

심지어 두 손을 꼭 쥐고 웃기까지 한다.

“넘버 나인, 넘버 나인.”

중얼거리며 음식을 즐기는 이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현은 진실을 알려 줄까 고민했다.

‘그거…… 호주산이야.’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달고 맛있다고 생각한 원효 대사처럼, 생각은 신체를 지배하는 법이다.

“더 시켜 줄까?”

“네!”

이서아는 성현에게 정말 고마워했다.

그렇게 한참을 먹은 후 이서아가 음료를 입에 대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둘이 가요?”

“어.”

지르힐이 갇힌 탑으로 향하는 원정.

성현은 많은 사람들과 동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서아는 고민하는 표정이다.

“왜?”

“플로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성현의 행동이 멈칫거렸다.

플로르가 어떤 대비를 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99% 현실로 이뤄진다.

“몇 마리나?”

“20마리 이상이요. 그런데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에 플로르의 딸들이 대거 포진될 거예요. 그중에는 대장이 갑주를 입는다 해도…….”

“못 이길 것 같나?”

“그건 아닌데, 버거운 정도? 그런데, 그 한 마리와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거기에 다른 존재까지 합세하면…… 질 거예요.”

성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갑주를 입었을 때의 성현은 올리비아조차 가지고 놀 정도로 강하다.

그런 성현이 버거워할 상대라면, 적어도 서열이 꽤 높은 딸이 나온다는 것.

‘넷째? 아니면 셋째?’

잠시 고민하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꼬마와 만나 볼게.”

“꼬마요?”

이서아는 꼬마를 모른다.

“있어, 그런 애. 며칠 동안 얼마나 세력을 모았는지는 몰라도, 도움은 될 거야.”

지구와 이계의 시간은 다르다.

성현이 소멸의 바다를 떠나온 게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계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꼬마는 적게나마 세력을 키웠을 게 분명하다.

‘문제는…….’

성현은 잠시 마법사의 갑주를 떠올렸다.

갑주를 사용한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용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이건 살아 있어.’

갑주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여겨졌다.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성현의 정신력을 갉아먹으려 한다.

상처가 난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파고들어 성현의 신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수천 명의 계약자들과 싸울 때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게 몇 번이나 됐다.

이대로 계속 사용하면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마법사에게 신체를 빼앗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계에 가면 지금보다 더 자주 사용할 게 분명하다.

사용하지 않으면 존재의 이빨에 찢겨 버릴 테니까.

그때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을 이어 가던 성현은 물끄러미 이서아를 바라봤다.

순간, 자신의 미래를 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됐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성현의 삶은 언제나 벼랑 끝을 달리고 있었다.

‘다를 게 없잖아.’

성현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다시 소고기를 먹는 데 열중하던 이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며칠 외박해야 하잖아?”

“조금 있으면 방학이에요.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 온다고 했어요.”

이서아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 * *

-나에게 올 필요는 없다.

“간다고 했잖아.”

-위험하다.

“궁금해. 네가 풀려났을 때, 내가 얼마나 강해질지.”

성현은 창고에 있었다.

필요한 장비, 이계에서 먹을 음식을 살피며 지르힐과 대화 중이었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그대가 내 앞에 온다고 해도 날 풀어낼 수는 없다. 그리고 난 내 두 눈으로 그대를 볼 수 없다. 그러니…….

장비를 정리하던 성현이 고개를 틀어 지르힐을 향했다.

“곧 보자. 보고 싶다, 네 진짜 모습.”

* * *

지르힐이 갇힌 탑.

지르힐은 한 팔과 양다리, 그리고 목과 허리가 쇠사슬에 감긴 채 벽에 붙들려 있었다.

게다가 눈은 붕대로 감겨 있다.

그런 그녀가 성현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난 널 보고 싶지 않다!”

-왜? 다른 존재들은 계약자와 한 번씩 본다던데? 우리도 얼굴 한번 봐야지?

“됐으니까, 오지 마라.”

그때였다.

끼이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낯선 기운을 느낀 지르힐이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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