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06화 (206/252)

206화

문틈으로 플로르의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르힐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이곳은 신이 만든 탑, 지르힐에게 악감정을 가진 생명체는 드나들 수 없다.

그게 룰, 그것은 신이 정한 법칙이며 누구도 어길 수 없다.

그런데 플로르는 지르힐과 대치하는 대표적인 존재.

태초부터 지금껏 그 억겁의 시간 동안 남은 것은 적대적인 감정.

마주하면 죽여야 하는 원수.

플로르가 이곳에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문 밖에 있는 것이 정말 플로르라면, 이유는 세 가지다.

신이 죽었거나.

플로르가 신보다 더한 권능을 손에 얻었거나.

또는 지르힐도 모르는 사이에 신의 룰이 바뀌었을 경우.

지르힐은 그 세 가지 이유 모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대에 집중했다.

지르힐은 그 상대가 정말 플로르가 맞는다면, 당장 목을 찢어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손에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지르힐의 눈은 붕대로 가려져 있다.

그래서 들어오는 자가 누구인지 눈동자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르힐은 영안을 통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문이 완벽히 열렸고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들어온 것은 플로르가 아니다.

꼬마가 약 30cm 크기의 구체 관절 인형을 손에 들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꼬마?”

이제야 꼬마의 기운을 느낀 지르힐이 중얼거렸다.

“맞느냐, 꼬마?”

지르힐은 눈이 가려져 있기에 앞에 선 것이 꼬마인지 플로르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꼬마의 기운인데 그 위에 플로르의 역겨운 마력이 느껴지고 있어서다.

“맞느냐고 물었다!”

“마, 맞습니다.”

꼬마가 다급히 대답하며 지르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드나드는 것을 플로르가 알아 버려서…….”

성현이 왕좌의 계곡에 있을 때였다.

소멸의 바다에 오가고 올리비아와 싸우던 그때, 플로르는 꼬마가 성현과 함께 있을 것을 봤고 알게 됐다.

평범한 관계가 아니란 것.

성현과 꼬마의 사이에 작은 신뢰가 있다는 것.

모든 것을 파악한 플로르는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카심의 아들! 저놈의 뒤를 캐라! 숨기고 있는 게 분명 있다!”

그때는 성현이 지연우를 박살 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동안 꼬마는 몇 번이나 지르힐의 탑을 오갔고 플로르의 부하에게 그 뒤를 밟히게 됐다.

“……플로르가 이곳에 직접 올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저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인형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분명 저는 싫다고 거부했지만, 인형을 전하지 않으면 제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고 해서…….”

꼬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형을 앞에 내려 뒀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지르힐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플로르의 인형을 가지고 왔지만 배신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뿐, 자신은 성현과 지르힐의 편이라는 것.

그 눈빛을 계속해서 지르힐에게 보냈다.

그리고 꼬마는 지르힐의 표정을 살피며 긴장했다.

상대는 지르힐이다. 그녀의 분노를 사는 순간 이 탑 안에서 타 죽어 버린다.

잠깐의 반항도 할 수 없을 거다. 단말마의 비명이라도 지르면 다행이다.

비록 지르힐이 쇠사슬에 박혀 있다 해도 그녀의 권능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이 공간에 들어서며 느낀 지르힐의 살기, 그 살기는 분명 플로르를 향한 것이었지만 꼬마는 살갗이 찢기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결백을 알려야 한다.

“……저, 정말이에요. 믿어 주십시오.”

다행스럽게도 지르힐은 꼬마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어도 태워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팔 하나가 자유롭게 된 것도 꼬마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됐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인형이나 움직일 수 있도록 하라. 무슨 말을 지껄이려 하는지 궁금하구나.”

“알겠습니다.”

지르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꼬마는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겨우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한 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꼬마의 작은 손이 인형에 올려졌다.

메이드 복장의 구체 관절 인형, 입에는 무엇인가의 피가 묻어 있어 섬뜩하게 보인다.

곧 꼬마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고 인형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이어서 인형의 머리가 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였다.

인형이 이곳저곳을 살핀다.

그 눈동자를 통해 이곳의 상황이 플로르에게 전달되는 중이다.

그리고 인형의 피 묻은 입술이 움직였다.

-넌 나가라.

그 말과 동시에 꼬마는 고개를 굽실거리며 공간을 벗어났다.

그러자 인형이 다시 말한다.

-이곳은 변한 게 없구나.

플로르의 또렷한 목소리.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인형의 머리가 드드득 지르힐에게 틀어졌다.

그리고 벌거벗겨진 채 쇠사슬에 묶인 지르힐을 본 인형의 입술이 비웃듯 뒤틀렸다.

-이곳에서 참 치열한 싸움을 벌였지.

플로르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탑의 주변, 푸른색의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깊은 바다가 사체로 채워졌다.

-그때, 신이 막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할 일은 없었을 텐데. 다시 이런 비극적인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신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지르힐 역시 그때 죽일 수 있었다는 뜻.

기분 나쁠 이야기였지만 지르힐은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물론 말투만 다정했다.

“플로르, 나도 아쉬워. 네가 직접 이곳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환영이나 인형이 아닌 지금의 네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면 정말 좋을 텐데, 보고 싶거든. 네 머리가 부서지는 것을 정말 간절히 보고 싶어.”

인형이 활짝 웃었다.

-어마……. 그런데 어쩌지? 나도 그렇게 해 주고 싶지만 넌 영원히 이곳에 있게 될 거야.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넌 죽지도 못한 채 이곳에 갇힌 채 지금처럼 살게 될 거야. 그래서, 그럴 일은 앞으로도 있을 수 없겠지.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지르힐과 플로르의 이어진 대화, 목소리는 계속해서 평온했지만 그 내용은 끔찍할 정도로 살벌했다.

내장을 뽑아 주겠다느니, 눈동자를 도려 내겠다느니…….

문밖에 서서 두 존재의 대화를 듣던 꼬마가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그리고 플로르가 입을 열었다.

-답 없는 대화는 그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이제 말하겠다.

“어서, 말하고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제안을 하고 싶다.

지르힐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구체 관절 인형이 지르힐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전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지르힐이 모를 수가 없는 일.

전쟁의 타깃이 지르힐과 마법사다.

플로르와 그 세력은 지르힐과 마법사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의 감정 깊숙한 곳에 두 존재에 대한 공포가 새겨진 상태.

그들은 지르힐과 마법사를 죽이며 그 공포를 뿌리 뽑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제안은?”

-유성현을 인간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고 싶다.

“……!”

플로르의 말은 지르힐이 예상하지 못한 것.

플로르는 빙긋이 웃으며 지르힐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지르힐,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야. 넌 세상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나를 적대했지. 그건 한쪽으로 치우쳐진 편협한 생각이야.

“…….”

-난 우릴 만들어 낸 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 없어. 그저 평화를 원할 뿐이야. 존재의 세상에도, 그리고 인간의 세상에도 나아가 전 우주가 평화로웠으면 좋겠어.

“…….”

-하지만 평화에는 힘이 필요하지. 누구도 평화에 도전할 수 없도록 악을 억누를 힘. 절대적인 지배자. 난 인간 세상의 그 지배자로 지연우를 선택했어.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성현에게 죽었지.

인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지연우가 죽었다는 것이 아쉬운 거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인형이 다시 지르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연우 대신 유성현을 지배자로 두고 싶어. 네가 허락한다면, 나와 내 신하 그리고 교에 소속된 모든 존재의 계약자가 유성현을 지지할 거야.

“…….”

-유성현이 할 일은 하나, 인간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그들의 싸움을 억제하는 것. 그리고 우리 존재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 그럼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지. 피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야.

“…….”

-물론, 그렇게 되면 너에게도 자유를 줄 거야. 함께 평화를 원하는데, 굳이 싸울 필요는 없잖아? 생각해 봐. 중립이 뭐지? 악은 뭐고 선은 무엇이며 정의란 것에 실체가 있나? 정의는 승자의 변명이고 패자의 핑계야.

“…….”

-지르힐, 옛 감정은 잊고 함께하자. 유성현은 네 계약자잖아? 네가 이야기하면 말을 들을 거야. 유성현이 가진 힘의 원천은 네가 갖고 있으니까.

“…….”

-그나마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법사와 달리 말이 통하기 때문이야. 마법사는 앞뒤 없이 세상을 멸하려고만 하니까. 지르힐, 난 세상의 평화를 원해. 그뿐이야. 다른 것은 없어.

지르힐이 물끄러미 플로르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그 정도 조건으로 날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텐데?”

-말했잖아. 그나마 넌 말이 통한다고. 마법사를 믿을 수는 없다고. 난 마법사는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

“마법사는 망령이야. 그놈을 없앨 수는 없어.”

-방법이 있어.

인형의 고개가 다시 지르힐을 향해 옮겨졌다.

-얼마 전, 알아낸 것이야. 인간의 새끼, 그러니까 갓난아기의 피. 그 피가 마법사를 영원히 봉인할 수 있어.

플로르는 에느가인을 찾고 싶어 한다.

에느가인은 갓난아기의 몸에 숨어 있다고 예언서에 적혀 있다.

갓난아기를 죽여야 한다.

한 달에 백 명.

지연우가 사망한 지금, 플로르는 지르힐과 성현을 통해 그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법사만 봉인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지르힐, 너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어.

인형의 손가락이 지르힐을 구속한 쇠사슬을 가리켰다.

-유르라헬의 피를 언제까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쪽도 바보가 아니야. 곧 알게 될 테고 피를 주지 않을 테지. 그 사슬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갓난아기의 피야.

“……!”

-지르힐, 자유를 얻자. 함께 평화를 위해 힘을 쓰자. 그게 진정한 중립 아닌가? 신이 원한 것도 평화가 아니었나?

“…….”

-설마, 인간의 아기를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나? 그럴 필요 없잖아? 인간 역시 다를 것 없어. 놈들은 종이 다른 짐승을 잔인하게 찢어 죽여 먹지. 개, 돼지, 소, 닭 다 큰 성체가 아니라 그 새끼들도 맛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먹어. 다를 게 없어. 이번엔 놈들이 먹힐 뿐, 똑같은 거야.

밖에서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꼬마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거다.

꼬마는 다급히 성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큰일 났어요! 큰일! 제발! 빨리 대답해! 큰일 났다고!

그리고 다시 탑의 내부 공간.

인형이 지르힐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한참을 고민하던 지르힐이 입술을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