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나에게는 자유를, 내 계약자인 유성현은 인간 세상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
-그래, 난 그 모든 것을 약속할 수 있지. 고민할 게 있을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
플로르의 제안은 달콤했다. 문밖에 선 꼬마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의 가슴을 퍽, 퍽 치기 시작했다.
‘왜! 왜 메시지를 안 보는 거야!’
꼬마는 계속해서 성현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플로르의 제안과 지르힐의 고민.
만약 지르힐이 플로르의 손을 잡는다면…….
‘안 돼.’
꼬마는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꼬마에게는 더럽혀진 왕가의 명예를 다시 세우겠다는 오래된 꿈이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르힐의 힘이 필요하다. 플로르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꼬마는 지금 당장이라도 탑의 내부에 들어가 지르힐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꼬마는 그 자격이 없다.
지르힐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현뿐이다.
‘그런데 왜!’
성현은 답을 보내지 않고 있다.
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제발…….’
꼬마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플로르의 마력을 담은 인형이 지르힐에게 손을 뻗는 중이었다. 그리고 인형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르힐, 함께하자. 과거는 잊고 평화가 담긴 미래를 함께 걷자. 다시 말하지만 난 너에게 자유를 줄 것이며 네 삶을 보장할 거다.
“평화, 자유…….”
지르힐이 중얼거림에 적대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인형이 입술을 주욱 찢어 웃었다.
지르힐이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한 거다.
플로르는 쐐기를 박기 위해 설득을 이어 갔다.
-우리가 싸운다면, 또다시 전쟁이 찾아온다. 그 많은 생명의 피가 사막의 모래에 스며들 거다. 그런 거지 같은 생활을 신이 원하고 있을까? 지르힐 너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 관리자. 관리자가 평화를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
-지르힐, 내 너에게 다시 한번 권한다. 내 손을 잡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 평화를 내렸으면 좋겠다.
플로르는 말을 멈추고 다시 지르힐을 바라봤다.
이제 대답을 들을 차례다.
함께하자고.
평화를 위해 애를 쓰자고!
그런데 지르힐의 대답은 플로르의 예상과 달랐다.
“자유와 평화, 좋은 말이야.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믿지?”
-……!
지르힐은 태초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플로르는 비굴한 웃음 뒤에 날카로운 칼을 숨겼던 자.
내뱉던 모든 말은 거짓.
그런 플로르가 달콤한 말을 지껄인다고 믿을 지르힐이 아니다.
플로르가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너에게 채워진 쇠사슬은 갓난아기의 피로 녹일 수 있는 것! 내 그 피를 얻어 너를 자유롭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고.”
지르힐의 목소리는 어느새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지르힐…….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져와라. 번복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와라. 그럼 네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원하는 게 무엇이냐?
플로르는 화를 꾹 참으며 물었다.
지르힐과 손잡으면, 모든 존재를 발아래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은 그 거만한 그리피네도 무릎 꿇고 파리처럼 손을 빌 게 분명하다.
그게 지르힐의 힘.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이깟 화쯤이야 쉽게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지르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네가 찾아봐야지.”
-……뭐?
“어쨌든 그 더러운 인형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조만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 들고 오너라.”
-지르힐?
하지만 플로르가 내뱉은 말은 그게 끝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인형의 머리가 터져 버리며 끔찍한 모습으로 탑을 거닐던 인형은 실이 끊긴 것처럼 툭,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시에 지르힐은 꼬마를 불렀다.
“꼬마!”
꼬마가 기다렸다는 듯 탑의 내부로 들어왔다.
“네! 부르셨…….”
꼬마는 머리가 사라진 인형을 보고 멈칫거렸다.
‘어?’
인형의 머리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이며 연기처럼 퍼지고 있었다.
지르힐과 플로르의 결렬이 증명되는 순간.
꼬마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인형을 갖고 돌아가라.”
지르힐의 명령에 꼬마는 기분 좋게 인형을 들어 안았다.
“또 필요하신 게 있나요?”
“유성현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플로르와 대화하는 동안 지르힐도 끊임없이 성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르힐에게도 성현의 메시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 그건 저도…….”
“알겠다. 일단, 인형을 갖고 떠나라.”
지르힐의 눈에 걱정의 빛이 맺혔다.
성현은 자는 중에도 말을 건네면 받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조용하니, 불안해진다.
게다가 성현은 지금 이계에 들어와 있다.
지르힐을 구하겠다며 탑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이계는 위험한 곳. 성현의 생명이 멀쩡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위기에 처했을지 모른다.
“이곳의 마력이 불안정할 수도 있으니, 밖에 나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꼬마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지르힐이 갇힌 공간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꼬마는 다시 지르힐의 앞에 섰다. 엄청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마, 막혔습니다. 나갈 수가 없습니다!”
“……!”
* * *
“지르힐!”
플로르의 성.
플로르가 분노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
인형의 머리가 날아가며 플로르의 시선은 다시 성의 내부를 보고 있었다.
“말이 안 통하는 년.”
플로르가 입술을 씹는 것과 동시에 모든 신하가 고개를 숙였다.
플로르의 몸에서 피어나는 살기.
눈을 마주치면 죽는다.
어떻게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한참동안 인상을 찌푸리던 플로르가 입을 열었다.
“유성현은 어디에 있지?”
“폭풍의 사막을 지나고 있습니다.”
“폭풍의 사막이라…….”
플로르가 입술을 쓸었다.
지금 지르힐은 성현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없고 꼬마도 탑을 빠져나갈 수 없다.
얼마 전 성현과 지연우가 싸우던 때, 마법사의 권능으로 그 주변 모든 곳의 메시지가 막혀 있던 것.
플로르는 그 권능을 흉내 냈다.
물론 흉내 내기가 전부였기에 넓은 공간이 아닌 탑에 국한된 것이지만.
‘지금 지르힐의 권능으로 그 마력을 걷어 내는 것은 어려워. 하루는 걸릴 거야.’
플로르는 그 사이 성현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지르힐의 시선이 닿지 않았을 때, 지르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야말로 성현을 죽일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다.
‘지르힐은 아깝지만…….’
지르힐의 손을 잡는 것은 포기한다.
‘예전부터 그랬어.’
존재들은 지르힐을 가리켜 신의 분노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르힐은 신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중립. 신의 룰을 따랐을 뿐이다.
‘그럼…….’
플로르의 생각은 다음으로 이어졌다.
지르힐을 얻을 수 없다면, 그 차선책.
‘바로 마법사.’
마법사는 지르힐과 다르다.
같은 관리자였지만 그는 감정적이었고 신의 룰을 따르지 않았다. 관리자가 해서는 안 될 사랑의 감정을 느꼈으며 아내와 아이까지 가졌던 자. 그리고 자식이 죽었다는 분노를 참지 못해 세상을 파멸로 이끈 원흉.
‘물론, 선동은 내가 했지만…….’
플로르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시선은 구석에 있는 캡슐로 이동했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그곳에 담긴 것은 화상을 입은 아기다.
그 아기는 마법사의 자식. 화상을 입고 죽어야 했지만 아직 숨만 붙어 연명하는 불쌍한 삶.
‘저것을 이용하면…….’
플로르는 마법사를 손에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동시에 그녀의 손가락이 까닥거렸다.
의자의 한쪽에 던져 뒀던 예언서가 둥실 떠올랐다.
플로르의 눈동자가 예언서를 살핀다.
달이 찼을 때 신이 될 돌덩이가 인간의 새 생명에 파고든다.
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탐욕을 위해 한 번에 백 명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지어다.
태고의 강에 피가 채워지면 에느가인은 나타…….
하지만 곧 예언서에 적힌 글자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이어서 새로운 글씨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달이 찼을 때 갓난아기의 피를 태고의 강에 채우면, 죽은 자가 깨어난다.
그리웠던 연인, 자식, 부모를 만나고 싶은 탐욕자여, 한 번에 백 명의 피를 흘리지 말지어다.
이 예언서를 마법사에게 보인다면.
‘놈은 반드시 갓난아기를 잡아 죽일 게 분명해. 제 자식을 살리겠다고 인간들의 자식을 갈아 먹을 게야.’
플로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마법사가 예언서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가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낼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전에 태워 버리면 되니까.
‘이제…….’
마법사가 성현의 몸을 어떻게 차지할지가 문제다.
마법사는 망령, 성현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뇌를 지배하는 것은 어려운 일.
하지만 그것 역시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성현이 사용하는 갑주.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마법사가 아닌 다른 자가 사용하면 그 피와 마력을 빨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성현에게 극한의 싸움터를 던져 주면 자연스레 갑주를 사용할 테고 갑주는 성현의 의식을 잠식할 거다.
“……우리 마녀가 몇이나 있지?”
“4만 정도 있습니다.”
“유성현에게 5천을 보내라.”
“……!”
얼글이 쏟아진 것처럼 공간이 적막해졌다.
5천이라니.
“짐승은 몇 마리나 있는가?”
“10, 10만 정도…….”
“1만을 보내 거라.”
“어머니! 그건…….”
“그리고 그 지휘자로 아로드나, 네가 간다!”
아로드나는 붉은 갑주를 입은 신하.
이곳의 서열은 7위.
그가 5천의 마녀와 1만의 짐승을 끌고 성현에게 가면, 성현은 반드시 죽는다. 아니, 살아남는 게 이상한 일이다.
“말했다. 전쟁에 준하는 병력으로 유성현을 맞이하겠다고!”
플로르의 입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이들이 해야 할 것은 명령을 받드는 것.
“알겠습니다.”
모든 신하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플로르가 스산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연우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연우의 시체는 이곳에 와 있었다. 그릇으로 사용될까 싶어 그 신체를 개조하는 중이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시원찮았다.
“내장은 물론이고 심장 또한 심하게 찢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근섬유가 모두 파열되어 있기에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플로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화를 내지는 않는다. 마법사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어서다.
* * *
그 시각.
성현은 모래를 밟으며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팍팍한 바람에 입안이 저절로 건조해지는 극한의 사막.
이서아도 대동하지 않았다.
이서아는 플로르가 엄청난 대군을 준비했을 미래를 봤고, 그런 위험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멀었어?’
-거의 다 왔다.
마법사의 말에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거의 다 왔다고 하지 않았어?’
-정말 거의 다 왔다.
‘그런데 지르힐과 연락이 안 되네? 무슨 일 있나?’
-네 마력이 정상인 것을 보면, 지르힐에게 이상은 없다. 그런데 연락이 안 된다면…… 혹시 지르힐이 화낼 만한 일을 한 게 아닌가?
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낼 만한 일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있다.
‘뭐지?’
-네가 요즘 이서아라는 학생과 놀아 주며 지르힐을 멀리해서…….
지르힐이 들었다면 분노했을 말을 마법사는 마음껏 지껄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