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예전에 지르힐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까?
‘해 봐.’
언제 끝날지 모를 넓은 사막을 횡단하는 일.
창고에 생수를 가득 넣어 뒀기에 수분에 대한 걱정은 없지만 건조한 바람은 언제든 의지를 꺾기에 충분했다.
쉬지 않고 떠드는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지쳐 버렸을 거다.
-지금 이 사막이 예전에는 큰 도시였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어.
‘지르힐이 멸망시켰나?’
-맞아.
성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법사는 저기가 마을이었고 저곳은 성벽이 있었다고 떠들었지만 오랜 시간은 모든 것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퍽퍽한 모래가 밟힐 뿐이다.
‘씁쓸하네.’
성현은 생각했다.
플로르를 막지 못하면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도 이런 식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를 듯 세워진 건물은 존재에 의해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것.
플로르와 그 집단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다.
‘그런데 지르힐은 여기를 왜 멸망시켰지?’
-창조자의 뜻이었으니까.
마법사는 단번에 대답했다.
-지르힐은 이곳에 비를 내렸지. 천둥과 번개를 대동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태워 죽였고 수장시켰어.
‘그 생명체들이 뭘 잘못했는데?’
-이봐, 우리는 관리자야. 창조자의 뜻이라면 묻지 않고 따라야 했어.
수십만의 생명체가 살던 곳을 한 번에 쓸어버린 이유는 단지 신의 뜻이 있었기 때문.
-뭐, 뭔가 잘못을 했었겠지. 그런데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줄까? 당시 나는 지르힐을 말렸어. 생명체를 아꼈었거든.
당시의 마법사는 생명체를 아꼈다.
로안과 게히얼이라는 신들이 있었지만 그들보다 더 생명체를 사랑했다.
길가에 핀 작은 꽃도 밟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생명체였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생명체와 사랑에 빠지며 신의 룰을 어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마법사와 지르힐은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누구보다 생명체를 사랑했던 마법사는 세상을 멸하려 한다.
그 대상이 존재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숨 쉬는 모든 것을 없애려 하고 있다.
-너도 잘 생각해. 생명체란 이기적인 거야. 살기 위해 다른 것을 없애야 하는 존재지.
사자는 약한 동물을 잡아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고 토끼는 풀이라는 생명체를 찢어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것.
강자는 약자를 잡고 약자는 먹히고, 생태계의 사슬과 인간사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네가 결단을 내린다면, 난 네 의식을 더 이상 탐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마음 편히 세상을 멸할 수 있도록.
“…….”
-고민해 봐. 어차피 넌 평화로운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손에 피를 묻힌 자가 평화를 입에 올리는 것부터 역겨운 일이란 것, 잘 알잖아?
“…….”
-모든 것을 뒤엎은 뒤 이 세상은 다시 태어날 거야.
성현이 픽 웃으며 마법사의 말을 받아쳤다.
‘만약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하면, 지르힐이 우리를 막을걸.’
-그럼 지르힐도 멸해야지.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길 수 있어. 예전에 졌던 것은 내 분노가 이성을 앞질렀기 때문이야. 마법을 팍팍 쓰면, 지르힐도 울걸.
마법사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성현은 느꼈다.
마법사의 분노는 아직도 이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대화는 끊겼다.
‘온다.’
-느꼈어.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마력.
사막이 쿵, 쿵, 쿵 울리는 것만 같다.
성현은 자세를 낮추며 이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플로르가 대군을 끌고 올 거예요. 수천 명의 마녀들, 셀 수 없이 많은 짐승들을. 대장의 힘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없어요. 무조건 도망가야 해요. 약속해요, 도망가겠다고.”
하지만 성현은 이서아의 말을 외면했다.
지금 플로르가 보낸 대군은 전쟁에서 만날 군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놈들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어디까지 통하는지,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놈들은 존재.’
인간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훈련을 받지만 놈들에게 그런 것은 없다.
놈들의 전략은 원시적인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물론 원시적인 수준이라 해도 인간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놈들은 인간의 잔머리 정도는 쉽게 뒤집을 압도적인 힘이 있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통했어.’
성현은 이미 존재와의 전쟁을 경험했다.
바로 회귀 전.
성현은 존재를 상대로 했던 게릴라전을 떠올렸다.
‘놈들의 가장 큰 약점은.’
거만할 정도의 자신감.
놈들은 자신이 사냥꾼이라 생각한다. 인간에게 사냥당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놈들의 전력에 상당한 손실을 줄 수 있다.
게다가 성현의 권능은 그때와 다르다.
지르힐뿐만 아니라 마법사의 힘도 손에 쥐고 있다.
‘어쩌면, 이길 수도 있어.’
땅이 울릴 정도의 마력이 느껴지고 있지만 성현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 모두를 씹어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현이 마법사에게 말을 건넸다.
‘위험하다 싶으면 의식을 건네줄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의식을 건네준다니 그것은 마음에 든다.
‘그때는 괜히 싸우지 말고 도망가.’
-좋아, 도망가지. 하지만 천 마리는 죽이고 가야 지르힐에게 창피하지 않겠지.
그 말이 끝이었다.
성현의 몸에 갑주가 씌워지고 있었다.
* * *
모래 먼지가 사정없이 번지고 있는 곳.
마녀와 짐승, 1만 5천의 병력이 사막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선 곳, 치켜세운 머리의 높이가 5m쯤 되는 뱀이 보였다.
그 머리 위에 플로르의 지시를 받고 온 아로드나가 서 있었다. 붉은 갑주가 마치 피를 머금은 것만 같다.
아로드나가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아직 안 보이나?”
“글쎄, 거의 온 것 같은데…….”
아로드나의 옆에는 둥실 떠다니는 양탄자에 앉은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플로르의 셋째 딸, 클로이.
아로드나를 성현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클로이가 팔짱을 끼며 입술을 삐죽였다.
“먼저 알아채고 숨었나? 숨었으면 골치 아픈데…….”
클로이의 시선이 아로드나에게 향했다.
아로드나는 투구와 창을 손에 쥔 채 웃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어?”
“몸이 떨려 온다.”
“어?”
“너와 난 태초의 전쟁 이후 태어난 존재, 지르힐과 마법사의 강함은 전래동화로 듣기만 했지. 게다가 유성현이란 놈, 창을 쓰는 게 제법이야.”
아로드나가 자신의 손에 들린 창으로 고개를 틀었다.
“긴장되고 있어, 강자와 싸운다는 기쁨. 내 손으로 전래동화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다는 영광. 잠시 후, 마법사의 망령은 내 손에서 죽는다.”
클로이가 빙긋 미소를 그렸다.
말 그대로 아로드나는 태초의 전쟁 이후 태어난 존재.
하지만 다른 존재와 달리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했다.
창술은 존재 중 제1위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게다가 서열 7위에 걸맞게 그 권능은 상상 이상이다.
“지금껏 유성현이 싸운 존재의 권능은 불이나 얼음 같은 현실적인 것이 전부였지? 네 권능을 마주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걸 직접 볼 수 없어 아쉽네.”
클로이의 역할은 안내가 전부, 전투의 몫은 아로드나에게 있다.
그게 아쉬워 입맛을 다시던 클로이가 눈을 깜빡이더니 아로드나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직접 싸울 생각이야? 이 대군을 끌고 왔는데?”
“어머니의 명령 중에 직접 싸우지 말란 것이 있었나?”
“그건 아닌데…….”
“싸워 봐야지.”
아로드나의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 * *
성현은 플로르의 대군이 오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모래언덕에 숨어 있었다.
게릴라전을 실험해 보고자 했지만 그것도 상대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가능한 것.
마법사의 갑주를 통해 마력을 완전히 숨긴 상태에서 놈들의 전력을 살피는 중이다.
성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상 밖이야.’
성현은 플로르가 딸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아로드나와 클로이.
게다가 약 3천 정도의 병력을 예측했는데, 1만은 넘어 보인다.
딱 봐도 알겠다.
플로르는 진심으로 성현을 죽이려 한다.
‘아로드나…….’
성현은 잠시 아로드나를 떠올렸다.
놈은 상당히 성가신 권능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5초 뒤로 물릴 수 있는 것.
전투 중에 5초란 억겁의 시간과 같다.
치열한 공방 속에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두 보는 것과 마찬가지.
즉, 성현의 생각을 빤히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권능을 사용하면 1분간 다시 능력을 쓸 수 없으며 그 1분 동안은 마력도 3분의 1 정도 떨어진다.
‘게다가…….’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성격.
놈은 지금껏 강자와 싸워 본 적이 없다.
스스로 수련하며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한다.
아니, 자신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갖고 있다.
그 호승심을 이용하면…….
‘이길 수 있어.’
성현은 빙긋이 미소를 그리며 클로이를 떠올렸다.
‘플로르의 셋째 딸.’
클로이의 권능은 단순하다.
작은 체구와 가녀린 팔을 가지고 있기에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엄청난 염력을 갖고 있다.
주변의 병장기를 허공으로 떠올려 단번에 상대를 찢어 죽일 힘이 있다.
‘성격은…….’
클로이의 성격은 독특하다.
일전에 성현이 만났던 올리비아가 플로르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과 정반대.
클로이는 스스로 플로르를 누르고 스스로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한다.
회귀 전을 생각하면, 클로이의 마지막은 플로르에게 목이 베여 죽는 것이었다.
성현은 그들의 권능과 성격을 계속해서 되짚으며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막의 밤은 어둠 그 자체.
수많은 병력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이 가장 효과를 발할 수 있는 시간이다.
* * *
“밤에 오겠지?”
“그렇겠지.”
아로드나와 클로이는 성현이 숨어 있다고 확신하며 전투의 시작은 성현의 습격이라고 예상했다.
“그럼 더 이동할 필요가 없겠어.”
아로드나는 짐승과 마녀의 행군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지휘관급의 마녀를 호출해 대비책을 지시했다.
“유성현은 어둠을 틈타 우리에게 돌진할 거다. 하나 걱정하지 마라.”
아로드나는 성현의 생각이 뻔하다고 여겼다.
어둠을 틈타 공격하면, 이들은 적을 찾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하지만 성현은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며 죽이면 된다.
어둠이라는 상황 속에 유리한 것은 성현이다.
“불을 준비하라! 유성현이 습격하면 그 불을 하늘로 쏘아 올려라. 세상이 밝아지면, 제아무리 작은 쥐새끼라도 우리 눈에 보일 것이다.”
아로드나는 그 대비책까지 지시하며 성현을 잡아먹을 준비를 마쳤다.
“그럼 난 뒤로 빠져 있을게.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
클로이가 손을 흔들며 양탄자를 탄 채 둥실둥실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녀의 역할은 끝났다.
먼 곳에서 성현과 아로드나의 싸움을 지켜보면 끝.
누가 죽든 누가 이기든, 그녀에게 상관없는 일이다.
* * *
밤이 되었다.
짙은 어둠은 세상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내민 손도 볼 수 없을 만큼의 어둠.
곧 일어날 전투를 기다리는 마녀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들은 이미 성현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들은 상태다.
마녀를 죽였고 나모르까지 죽인 자.
지금껏 그녀들은 인간을 벌레 취급했지만 상대는 성현이다.
이 싸움에서 누구 하나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전쟁의 잔인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아아아악!”
“유성현이다! 유성현이 왔어!”
마녀들은 준비했던 불꽃을 허공으로 쏘았다.
‘펑! 펑!’ 소리를 내며 불꽃이 세상을 비췄다.
그런데 드러난 것은 성현이 아니다.
“이, 이건 뭐야?”
3m에 달하는 거대한 해골.
오미로 베루스였다.
오랜만에 등장한 오미로 베루스가 포효했다.
-크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