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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13화 (213/252)

213화

쩌어어어엉!

성현의 머리 위로 폭발음이 들려왔다.

사방이 불꽃으로 번쩍였고 어두웠던 세상이 간헐적으로 밝아졌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갑주가 쩍쩍 찢어졌다. 동시에 성현을 붙잡고 있던 마녀가 타 죽었다.

마녀의 몸이 녹아 서로 엉겨 붙었고 녹아내린 입술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어서 ‘파지지지직!’ 성현의 몸이 전기가 휩싸였다. 번개로 만들어진 스파크, 그것들이 쉴 새 없이 불꽃을 일으킨다.

“너희를 용서할 수 없구나.”

지르힐이 저벅저벅 아로드나를 향해 다가갔다.

“감히, 내 계약자를 건드려?”

그 목소리가 무섭게 울린다. 플로르의 마력을 얻어 자신감이 넘쳐 나던 아로드나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야 했다.

억겁의 시간을 살며 처음으로 느낀 두려움, 아로드나의 입에서 떨림이 새어 나왔다.

“아…….”

전래동화로 여겨 왔던 지르힐과 마주했다. 우습게 생각했는데, 아니다. 말 그대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는 싸울 의지를 포기했다.

주변에 있던 마녀들도 마찬가지다.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지르힐이라는 이름의 근원적인 공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르힐이 창을 휘둘렀다. 아로드나의 턱이 서걱 잘려 나갔다. 흉측한 모습, 잘린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이어서 ‘콰직!’ 창이 아로드나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단 한순간, 아로드나는 죽어 버렸다. 정말 간단히,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꺄아아아악!”

마녀의 비명이 세상을 울렸다. 기겁한 아이처럼 도망간다. 하지만 이것이 지옥의 시작이다.

하지만 지르힐은 성현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마녀를 곱게 놔두지 않았다. 머리를 뽑았고 내장을 찢어 버렸다. 비명이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 * *

쏴아아아아.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성현이 떠난 그곳에 남은 것은 약 1만 2천의 마녀와 짐승이 전부다. 아로드나는 죽었고 마녀와 짐승 역시 3천가량 사망했다.

남은 마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줄 존재가 없다. 그들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 채 그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저 빗물에 씻겨 흐르는 피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클로이였다. 그녀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버린 아로드나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이어서 아로드나의 머리를 발로 팍 밟아 터뜨리며 중얼거린다.

“그 언니 멋있네.”

지르힐을 떠올리며 내뱉은 말이다. 그 분노에 찬 눈동자, 그것은 분명 존재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자들을 죽이려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지르힐의 눈빛을 기억하던 클로이가 히죽 웃었다.

“……라이벌?”

클로이는 성현을 손에 얻어 어머니가 될 생각을 하고 있다. 그 계획에 지르힐은 큰 방해가 될 것처럼 여겨진다.

“너무 센데…….”

클로이의 시선이 지르힐이 떠난 곳으로 틀어졌다. 그녀가 중얼거린다.

“곧 만나게 될 거야. 곧…….”

* * *

-미쳤구나!

성현은 창고에 앉아 지르힐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1만 5천, 거기에 아로드나와 클로이!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다를 게 무엇이냐!

“그만해. 살았으면 됐지.”

-그게 말이라고!

성현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갑주 역시 찢기고 으깨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네가 내 머리 위로 번개를 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다치지 않았어.”

-벌이다. 한 번만 더 이런 위험한 짓을 하면…….

“하면?”

-하, 됐다.

지르힐의 한숨을 들으며 성현이 슬쩍 웃었다. 그리고 야간에 먹을 음식을 챙겼다.

창고에는 여러 인스턴트 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회귀 전, 성현은 야전 생활을 이어 왔고 밖에서 숙영을 하는 게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 경험은 음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고 이계로 올 때면 언제나 가득 먹을 것을 채워 뒀다. 그중에 최고는 고추장과 햇반이다.

성현이 주섬주섬 음식을 챙기고 있을 때, 지르힐은 물끄러미 성현의 뒷모습을 살폈다. 기초적인 치유는 했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성현의 속은 이미 만신창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다.

앞으로 몇 번의 싸움이 더 이어질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이런 식, ‘죽어도 상관없어.’라는 마음으로 움직인다면, 성현은 반드시 죽고 말 거다. 적의 손에 죽는 게 아니라 한계를 맞은 신체가 견디지 못할 게 분명하다.

지르힐에게 예언의 권능은 없다. 하지만 성현의 상태를 보면 절망적인 그 미래가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 * *

그리고 그 시각.

성현의 의식 속에 있던 마법사는 주변을 살피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서 성현은 엄청난 마력을 사용했어.’

성현은 무의식의 공간에 있던 마력까지 쏟아부으며 극한의 한계에 몰렸다. 그리고 마력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마력이 채워졌다. 새로운 마력은 갑주에서 스며든 것. 그 마력은 마법사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

마법사가 껄껄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을 멸할 수 있겠구나. 복수를 할 수 있겠구나!’

마법사의 눈동자에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스쳤다. 자신의 아내라는 이유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불에 태워져 죽은 그 넋이 지금도 한 맺힌 눈동자로 마법사에게 새겨져 있다.

마법사는 그 복수를 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상대가 신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 분노는 신에게 향해 있다. 신이 이기적인 생명체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신이 만든 세상을 멸하려 하는 거다.

한참을 웃던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지르힐, 너에게는 미안하다.”

* * *

잠시 후, 성현은 다시 이계로 나왔다.

사막의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을 피해 바위 뒤에 앉았다. 해가 떨어진 밤, 어서 식사를 마친 후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극한의 전투를 치른 직후이기에 몸이 힘들기는 하지만 낮이 되면 상상할 수 없는 뜨거움이 다가온다.

야간에 이동하고 낮에는 휴식을 취하는 게 사막을 이동하는 방법 중 하나다.

성현은 바람막이 옷을 입은 후 고추장과 햇반을 꺼냈다. 밥과 고추장을 비닐봉지에 넣은 후 밖에서 주물거리면 간단한 비빔밥의 완성이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꼬마다. 초췌한 모습으로 사막을 걸어온 꼬마가 성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이고, 죽을 뻔했네.”

꼬마가 헥헥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꼬마를 성현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성현의 이어진 질문에 꼬마가 씩 웃었다.

“아, 조금 전까지 지르힐 님이 갇힌 탑에 있었거든요.”

꼬마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전했다. 플로르가 인형에 의식을 담아 보낸 것, 통신을 방해한 것.

“그런데, 고객님도 난리가 났었다면서요?”

“뭐, 조금. 그런 일이 있었지.”

성현이 대답하며 꼬마에게 비빔밥이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 꼬마가 황당한 눈으로 비닐봉지를 바라봤다.

“이 개밥은 뭐예요?”

“먹어 봐. 맛있으니까.”

꼬마가 숟가락을 들고 미심적은 표정을 지으며 비빔밥을 한 입 떠 먹었다. 놈의 눈이 커진다.

“대박.”

“맛있지? 야전에서 먹는 밥이 그런 거야.”

성현이 끌끌 웃으며 또 다른 비빔밥을 제조할 때, 꼬마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빔밥을 흡입했다.

성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구악으로 있던 시절, 함께 밥을 먹던 동료, 이제 그들은 없다. 이서아 하나만 곁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다행인 거다. 지르힐이 했던 말처럼 성현은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마찬가지. 그들이 곁에 있다면 또 비참하게 죽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전쟁에도 참여 안 했으면 좋겠는데…….’

곧 다가올 전쟁, 성현은 구악의 옛 동료가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평범히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비빔밥을 모두 흡입한 꼬마가 입을 열었다.

“지르힐 님을 구하러 가는 거죠?”

“어, 실제로 얼굴 한번 마주 봐야지. 목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잖아?”

“그런데, 고객님이 가도 지르힐 님을 구할 수는 없어요.”

“…….”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꼬마의 말에 성현의 시선이 틀어졌다.

꼬마가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지르힐 님의 목을 옥죄고 있는 사슬, 설마 인간이 만든 쇳덩이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당연히 아니다. 인간이 만든 쇠사슬이었다면 지르힐의 권능으로 언제든 녹여 버릴 수 있었을 거다.

“……그거 힘으로도 끊을 수 없어요. 거인족이 와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럼?”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꼬마는 설명했다. 지르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하나는 신의 힘.

“창조주가 원한다면 언제든 자유가 될 수 있죠, 지금 당장이라 해도.”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에게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방관하고 있어요.”

“그럼?”

“에느가인을 찾는 거예요.”

에느가인은 신과 같은 힘을 얻게 해 준다. 그것이 있다면 지르힐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유르라헬의 혈통을 이어 받은 그리피네의 피. 그것은 사슬을 녹일 수 있다.

“문제는 소량으로 찔끔찔끔 부어서는 지르힐 님에게 자유를 줄 수는 없어요.”

지르힐의 온몸은 구속되어 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목과 팔 그리고 다리와 허벅지 심지어 허리와 가슴까지.

“그리피네를 쥐어짜서 그 피를 양동이에 담아 붓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말을 마친 꼬마가 허탈한 표정으로 낄낄 웃었다. 에느가인을 찾는 것이나 그리피네를 쥐어짜는 것이나, 둘 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유르라헬의 혈통 그리피네는 플로르와 견줄 만큼의 권능을 갖고 있다. 성현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리피네의 앞에서 성현은 거대한 고래 앞에 선 플랑크톤이나 마찬가지.

“그러니까,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불가능?”

“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내가 그리피네를 죽이는 것,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음, 십만 분의 일?”

“그럼, 차고 넘치네.”

“네?”

성현이 슬쩍 웃었다. 회귀 전, 성현이 지연우와 플로르를 죽이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이었다. 이서아의 말에 따르면 무량대수 분의 하나. 거기에 비하면 십만 분의 일은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그럼, 지르힐을 만나기 전에 그리피네의 얼굴부터 봐야 하나?”

“고객님? 지금 농담이죠?”

“난 농담 같은 거 못 하는 사람인데? 그럼, 이동하자. 앞장서, 그리피네의 성으로.”

꼬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하는 눈빛이다.

“고객님, 지금 그리피네가 누군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데요.”

“알아.”

“네?”

“안다고.”

성현은 회귀 전을 떠올렸다. 그리피네, 처음에는 플로르의 반대 세력에 서 있었지만 곧 손을 잡고 에느가인을 찾기 위해 인간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든 여자.

그리고 성현은 그리피네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 그녀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성현은 다시 1만 5천의 마녀와 짐승이 있던 곳으로 이동했다.

건조한 사막을 지나 삼십 분 정도 이동한 곳.

그곳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마녀와 짐승은 사라졌고 참혹한 현장만 남아 있었다.

성현이 사체를 옮겨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강령술로 움직일 수 있는 사체, 그리피네와 싸울 수 있는 사체를 찾는 거다.

그 사체를 살피던 성현이 슬쩍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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