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수천의 사체가 뒤덮고 있는 모래밭.
누군가에게는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역겨운 곳이지만 성현에게는 보물 밭이나 다름없다. 플로르가 이곳을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떠난 게 정말 고마울 정도로.
성현이 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데없이 내밀어진 손에 꼬마가 눈을 깜빡인다.
“왜요? 뭐?”
“알약 좀 줘라. 회복제하고 진통제 있으면 남은 것 전부.”
“저기, 고객님?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지르힐 님을 뵙고 오는 길이라고. 제가 항상 물건을 갖고 다니는 존재도 아니고…….”
“2배로 쳐줄게.”
“하…….”
꼬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품을 뒤적였다. 그리고 한 움큼의 알약을 꺼내 성현에게 건넸다.
“혹시 몰라 숨겨 뒀던 거 다 드리는 거예요. 2배라고 말했죠? 잊지 마세요.”
“응.”
꼬마가 수첩을 꺼내 성현의 이름을 슥슥 적고 있을 때, 성현은 회복제를 입에 넣고 씹었다.
지르힐에게 치유를 받았다 해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에느가인을 얻기 위한 플로르의 탐욕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다.
알약이 배 속에 들어가며 성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피네의 성까지 얼마나 걸리지?”
“한 3일 정도요? 그런데, 진짜 가려고요?”
“간다고 말했잖아. 내가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도 아니고, 왜 그래?”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꼬마의 얼굴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처 맞은 것처럼 변했다.
꼬마가 고개를 숙인 후 중얼거렸다.
“이거…… 따라가야 해? 말아야 해?”
꼬마는 왕가의 재건을 준비하고 있다.
낫을 든 마녀 아리를 섭외했고 주변에 낭인처럼 생활하는 존재를 끌어모으는 중이다. 아직은 별 볼 일 없는 집단이지만 언젠가는 이 세상에 왕가의 깃발을 꽂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 상황에 성현을 쫓아가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리피네는 강하고 성현은 그에 비할 수 없다. 그리피네의 말 한마디에 목숨 걸고 덤빌 존재의 숫자만 해도 수십만, 수백만이다.
하지만 성현은 세력이 없다. 언제나 혼자 움직이고 해결하려 한다. 집단 대 개인, 박살 나는 것은 언제나 개인이다. 성현을 쫓아가면 미래는 뻔하다.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죽는 게 예정되어 있다.
“고객님?”
꼬마가 고개를 들었다. 거절의 말을 전하기 위해 성현을 바라봤다. 그런데, 성현은 꼬마가 부른 것도 모른 채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 사체의 상태를 살피며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3일이라…… 그럼 준비하는 기간을 일주일 잡고 이동하는 것은 10일 정도는 계산해야겠네.”
그 말에 꼬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 그리피네의 성까지 가는 시간은 3일, 산보를 하듯 느릿느릿 걸어도 4일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성현은 10일이라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게다가 준비 기간이 일주일이라는 말.
‘준비? 설마?’
꼬마의 눈이 반짝였다. 성현이 뭔가를 또 꾸미고 있다는 것을 느낀 거다.
‘그러고 보니…….’
상대가 그리피네다 보니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꼬마가 본 성현은 언제나 불가능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득바득 절벽을 기어오르며 고생 끝에 성공을 이뤄 냈다. 이번에도 뭔가 기적이 있을 것 같다. 꼬마는 거부하려던 말을 목으로 삼키며 잠시 성현을 지켜보기로 했다.
성현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동시에 쓰러져 있던 사체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열기에 달라붙은 살이 떨어지고 부서진 뼈가 억지로 움직이는 소리.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 있던 마녀와 짐승이 되살아나고 있다.
-카아아아악!
살이 떨려 올 만큼 공포적인 모습을 지켜보며 꼬마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다급히 성현을 바라봤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뭐겠어? 그리피네와 전쟁이지.”
플로르가 성현을 죽이기 위해 끌고 온 1만 5천의 대군. 그중에 사망한 것이 3천, 그들은 이제 성현의 병력이 되었다. 성현의 명령에 따라 충성스럽게 돌격하며 그리피네의 대군과 맞서 싸울 거다. 그리고 꼬마는 성현의 계획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플로르와 그리피네를 싸우게 만들 생각인가?’
마녀와 괴물은 플로르의 병력이다. 그것들이 그리피네의 성으로 이동하면 그리피네는 오해할 거다. 플로르가 그리피네의 성을 침략하려 한다고.
‘그럼…….’
성현의 계획대로만 이뤄진다면, 오랜 시간 존재의 세상을 이어 왔던 거짓 평화가 박살 날 거다. 플로르와 그리피네의 대군이 이계를 피로 물들일 게 분명하다.
성현이 꼬마의 등을 툭 쳤다.
“너한테는 기회잖아.”
거짓으로 이뤄진 평화의 세상은 변하는 게 없다. 하지만 혼란이 시작되면 다르다. 어제의 거지가 오늘의 왕이 되고 오늘의 왕이 내일은 거지가 된다. 꼬마가 원하는 세상이 시작되는 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인간 세상에 유명한 말이야. 이해했으면 기다리고 있어. 난 준비해야 할 게 많으니까.”
성현이 그 말을 남긴 채 마녀들의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자 수천 마리의 마녀가 성현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성현은 마녀를 지나쳤다. 걸음을 멈춘 곳은 아로드나의 앞. 놈의 머리는 터져 있고 몸은 끔찍할 정도로 짓이겨져 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성현이 아로드나의 어깨를 잡은 채 스르륵 창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르힐을 불렀다.
-무슨 일이지?
창고에 나타난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아로드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커스터마이징 좀 해 줘. 원래의 모습대로. 깔끔하게.”
-뭐라?
“부탁할게.”
성현은 지르힐의 대답을 듣지 않고 다시 창고 밖으로 떠났다. 그리고 성현은 이번에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남은 플로르의 마력을 모을 수 있을까?”
-뭐?
이곳저곳에 남은 플로르의 흔적, 그녀가 보낸 마력이 아직 공기 중에 떠돌고 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완벽하게 흩어져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그 마력을 모을 수 있을 거다.
마력은 인간의 지문처럼 상대를 특정 지을 수 있는 그 고유의 냄새가 있다. 그 마력을 마녀들의 몸에 넣고 계획대로 기습에 성공한다면.
‘그리피네는 다급한 마음에 진실을 보지 못할 거야.’
그리피네는 상대가 플로르라고 여길 거다. 플로르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며 분노할 게 분명하다. 그럼, 이계는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성현은 존재들끼리 싸우게 만들어 전력을 악화시킬 생각이다. 그리고 그 혼란의 틈을 타 그리피네를 죽일 거다.
“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있다.
마법사는 성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언젠가 성현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그 육신과 의식을 빼앗을 생각이다. 그래서 성현의 부탁이면 흔쾌히 들어주려 한다.
“좋아.”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들려왔으면 움직이는 게 당연한 것.
성현은 바삐 움직였다. 마법사에게 의식을 넘긴 후 플로르의 마력을 모았다. 그 마력을 선봉에 설 마녀들의 몸에 주입했다.
그 과정이 끝난 이후에는 꼬마와 함께 마녀들의 찢긴 살을 꿰매고 붙였으며 부서진 무기를 수리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이거 대단한데요.”
가까이에서 보면 흉측한 사체다. 이미 썩어 가는 것도 많다. 그 역겨운 냄새가 참기 힘들었지만 꼬마는 낄낄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앞에 선 아로드나는 지르힐의 커스터마이징을 받아 그런지,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꼬마가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 내며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준비 기간을 일주일로 잡았는데, 이틀 만에 끝났네요.”
건조한 바람과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이겨 내며 바삐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시간이다. 그런데, 성현이 남은 회복제를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격적인 준비는 지금부터야.”
“……또 뭐가 있나요?”
꼬마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의 과정도 쉽지 않았다. 썩어 가는 사체를 만지는 것은 꼬마에게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게 남아 있다니.
“뭐죠?”
성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녀가 움직인다. 3천의 마녀와 짐승이 일제히 이동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소리가 척척! 일사불란하게 들려왔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3천의 마녀가 꿈틀대는 순간 마력이 바닥나 쓰러지고 말 거다. 하지만 성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인형이야.’
존재는 훈련 받은 군대와 다르다. 똑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팔과 다리가 서로 다르게 활동해야 한다.
100마리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숫자가 다르다. 빠져나가는 마력의 차이도 크다. 하지만 그리피네를 속이기 위해선 반드시 성공 해야만 한다.
성현은 3천의 군대가 각각 움직일 수 있도록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정지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느리게, 하지만 손끝은 섬세하면서도 정확히 사선을 긋고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마가 성현의 손끝에서 연기가 퍼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꼬마는 물끄러미 성현을 지켜봤다. 성현의 눈빛은 섬뜩할 만큼 진지하다.
하루, 이틀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성현은 마력이 떨어질 때마다 회복제를 씹어 먹으며 사체를 움직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마다 회귀 전 봤던 지옥을 떠올렸고 죽어 간 동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 모든 것은 한계에 치닫는 의식을 부여잡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사이 꼬마는 이계 시장에 다녀왔고 필요 이상의 약을 준비했다. 그리피네와의 일전에 성현이 어떤 부상을 입고 어떤 약을 필요로 할지 예상하기조차 어려워서다.
돌아온 꼬마가 약을 종류별로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전 전투형이 아니에요. 뒤에서 보조를 할 테니까…….”
“너한테 전투는 기대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성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하지만 꼬마는 그 말에서 ‘위험하면 도망가도 괜찮아.’라는 따듯한 감정을 느꼈다. 인간 주제에 존재를 걱정하는 게 우스웠지만 꼬마는 성현의 그런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꼬마는 모래 바닥에 털썩 앉아 성현의 수련을 지켜봤다.
일반적으로 강령술에 지배당한 사체는 어기적거리며 움직이고 바보처럼 정직한 공격을 한다. 그 공격에 날카로움은 없으며 조금만 신경을 써도 충분히 피하고 파괴할 수 있다. 강령술이 무서운 점은 고통과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성현의 강령술은 다르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사체가 전투 대형을 짜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려 한다. 기우뚱거리지 않고 똑바로 걷고 있다. 공격 역시 살아 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매섭다, 그것도 3천이라는 숫자가.
꼬마는 존재도 아닌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또 강해지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