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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15화 (215/252)

215화

* * *

지옥 같은 사막의 한복판, 풀 한 포기 존재하지 않고 쉴 만한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곳, 그저 끝없는 사막.

그런데, 그곳에 피 냄새가 진동했고 썩은 사체 냄새가 가득했다. ‘슥슥.’ 소리와 함께 뱀과 같은 짐승이 이동한 흔적이 그려졌고,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모래에 발자국이 새겨진다. 수천 구의 사체, 마녀와 짐승으로 이뤄진 3천의 군대가 그곳을 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뒤에 성현이 서 있었다.

* * *

“감시자 오나 잘 확인해라.”

유르라헬의 성벽.

선임 하급 존재가 성의 감시탑 벽에 등을 기대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군기가 바짝 든 후임 하급 존재가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확실한 말투에 선임 하급 존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이들은 성벽을 지키는 하급 존재, 하는 일은 하나 사막을 지켜보는 것.

선임 하급 존재는 수억 년 동안 사막을 바라봤고 앞으로도 사막을 지켜봐야 한다.

이유는 하나. 언제 나타날지 모를 적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고역이었다.

‘젠장.’

존재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죽지 않고 영원을 살아간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부러운 일이지만 문제는 있다.

직급과 직책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노력을 해도 이미 위를 차지한 권력자들이 그대로 살아 있으니, 올라갈 수 없다. 계속해서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1억 년 전에도 지금도 선임 하급 존재는 성벽의 감시탑에 서서 사막을 지켜봤다.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도 사막, 내일도 사막, 십 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수십억 년이 지나도 똑같이 사막이나 보고 앉아 있겠네.’

선임 하급 존재는 인간의 감옥과 이곳이 뭐가 다른지 잠시 고민해 봤지만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잡시 입술을 씹던 선임이 철모를 던져두며 후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후임은 눈을 반짝이며 사막을 보고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존재라 그런지 아직 사막을 보는 게 즐거운 모양이다.

“새끼야, 사막을 보지 말고 감시자를 확인하라고 말했잖아?”

“네? 저쪽을 봐야…….”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안 나타나. 내가 수십만 년을 지켜봤지만 똑같아.”

“네?”

“기억해라. 우리의 주적은 감시자야. 뭐, 감시자가 순찰을 도는 것도 몇백 년에 한 번이지만…….”

“아, 네.”

선임의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 후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틀었다. 그리고 감시자가 다니는 길을 확인했다.

그런 후임을 바라보던 선임이 픽 웃으며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태어난 지 얼마나 됐나?”

“한 90년 됐습니다.”

“등급은 마인?”

“네.”

후임은 탑의 감시를 선 이후 선임에게 이런 식의 질문을 받는 게 처음이었다.

다른 선임들은 대부분 자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력하면 귀족이 될 수 있겠죠?”

“아니. 절대 안 돼.”

“네?”

“새꺄, 나도 어렸을 때는 노력 같은 거 하면 귀족 되는 줄 알았거든.”

“저도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고 있는데, 소문 들어 보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분위기가 흉흉해서요.”

존재의 세상에 전쟁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고 있었다. 플로르와 그 단체 교가 모였던 것, 그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지르힐과 마법사가 나타나 존재의 세상을 뒤엎을 것이란 것, 발 없는 소문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선임은 비웃었다.

“그게 되겠나?”

“네?”

“절대 안 돼.”

후임의 말대로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권력자들이 죽고 공백이 생기며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다.

하지만 선임 하급 존재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존재들은 거짓된 평화에 익숙해졌어.’

그리고 존재들은 같은 존재와 싸우는 것보다 인간 같은 하등 생명체를 가지고 노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인간과 계약해 그들을 꾸미고 싸우게 만드는 것을 더 즐거워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전쟁? 절대 그럴 리 없어.’

선임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평화에 익숙해져 나타난 결과.

“전쟁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라.”

* * *

밤이 되었다. 별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 속, 성벽 아래에 성현이 서 있었다. 강령술로 지배한 대군을 멀리 숨겨 둔 채 사막을 걸어 몰래 숨어든 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누구도 성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마법사의 권능을 이용해 은밀하게 행동한 이유도 있지만 감시를 해야 할 자들이 모두 다른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현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성벽을 바라봤다.

삼백여 미터 높이의 성벽이 깎아 내린 것 같은 절벽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올라가야지.’

성현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짐승의 손톱을 뽑아 만든 장갑을 끼고 있다. 벽을 타고 오르기 위한 준비다.

물론 성벽을 밟고 위로 도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마력을 사용할 수는 없다. 이 탑에는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기에 오로지 물리적으로 올라야 한다.

성현이 노리는 것은 성벽 밖을 감시하는 초병을 몰살시키는 것. 강령술의 대군이 조금 더 효과적으로 습격에 성공할 수 있는 것. 그래야 그리피네가 당황할 테고 플로르의 군대라고 착각할 수 있을 거다.

콱! 콱! 콱!

성현이 탑을 짐승의 손톱으로 짚으며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기어오르는 것이지만 그 속도는 빨랐고 누구보다 은밀했다.

그리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을 뚫고 성벽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병의 위치는 알아.’

회귀 전, 플로르와 그리피네가 전쟁을 벌이던 때다. 성현은 지연우의 아래에 있었고 플로르의 군대에 속해 이곳에 왔던 적이 있다.

‘교대 시간은 내일 오전. 탑의 위치는 저곳.’

성현의 시선이 재빨리 성벽에 꽂힌 것처럼 만들어진 감시탑으로 향했다.

* * *

선임과 후임은 여전히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마녀와 결혼까지 하고 싶다고?”

“네.”

“우리 같은 마인에게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았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어머니뿐이야.”

“그냥 같이 살고 싶어서요. 린네라는 이름의 마녀인데요. 나이는 저보다 이백 살 정도 많은데…….”

“마녀는 귀족이랑 살잖아. 우리 같은 마인들은 관심도 없을걸.”

“아니에요. 걔는 착해요.”

“착해서 좋아하는 거냐?”

“하하.”

후임이 부끄러운 듯 웃었고 선임은 장난스럽게 후임을 바라봤다.

“잘됐으면 좋겠다.”

선임은 진심이었다. 자신은 억겁의 삶을 살며 좋아하는 감정이란 것도 잊었지만, 맑게 웃는 후임은 그 꿈을 꼭 이루길 바라고 있었다.

“담배 하나 줄까?”

“담배요? 그게 뭐예요?”

“아, 넌 아직 인간 세상은 모르는구나. 인간들이 피는 것인데, 심심할 때 꽤 도움이 돼.”

선임이 품을 뒤적거리며 담배를 찾았다. 이계 시장에서 상인들에게 산 것. 인간들이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까지 끊지 못 한다는 것.

“새벽 동이 틀 때, 사막을 보면서 연기를 내뱉으면 기분이 좋거든.”

선임이 담배를 손에 들어 후임에게 넘기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선입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방금까지 멀쩡했던, 결혼을 꿈꾸던 후임의 목에서 픽! 픽! 피가 터지고 있다. 이내 몸이 흔들거리더니 ‘촤아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뭐, 뭐!”

선임이 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뭔지 모르지만 습격이 일어난 거다. 종을 울려 다른 감시탑에 적이 나타났음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무리였다. 그 짧은 순간 선임의 폐에 단도가 박혔다.

“컥!”

폐를 찔리면 소리를 지를 수 없다. 그저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흐를 뿐이다.

“어허허헉!”

“조용히 죽어라.”

‘후욱!’ 소리와 함께 단도가 선임의 목을 그었다. 선임의 몸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땅바닥에 처박혔다.

단도를 손에 쥔 주인공은 당연히 성현이었다. 성현은 죽은 자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다른 탑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은 탑은 이제 3개.’

지금껏 성현은 33개의 탑을 오가며 모든 초병을 죽였다. 이제 남은 탑은 3개.

성현이 꼬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슬슬 출발해.

그때, 이제야 후임이 쓰러졌다.

성현은 놈이 쓰러지며 튀어나올 ‘쿵!’ 소리를 숨기기 위해 재빨리 손을 뻗어 놈의 몸을 잡아챘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땅바닥에 눕히는데 놈의 목걸이에, 노란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마녀의 그림이 보인다.

‘사랑하는 존재가 있었나?’

죽은 자는 누구나 하나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그런 것을 신경 쓰면 안 되는 것. 살기 위해선 누구든 죽여야 한다.

성현은 죽은 후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다른 탑으로 이동했다.

* * *

“스, 습격입니다!”

그리피네의 침실, 자고 있던 그리피네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의 눈이 겁에 질려 있었다. 곧 죽을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고 있다.

하지만 그리피네는 다르다. 다급해 하지 않고 침착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습격이라고? 천천히 말해 보라.”

“해가 뜨지 않아 몇 명이 왔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벽 앞에 다가서서 문을 부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벽에 다가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겐가?”

“죄, 죄송합니다.”

시녀가 죄송할 것은 없다. 그것은 군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피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입고 있던 잠옷이 스르륵 붉은색의 드레스로 바뀌었다.

그리피네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새벽, 곳곳에 걸어 둔 횃불이 일렁인다. 멀리 성벽으로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오르는 게 보인다.

“하…….”

그리피네는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습격한 자들의 마력을 읽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인지,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피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플로르?’

이 마력의 냄새는 플로르다. 플로르의 마력이 저곳에서부터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기어이!’

플로르의 적대감은 그리피네도 잘 알고 있었다.

존재의 정점에 서고 싶은 플로르에게 그리피네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남신과 여신을 만들고 중립자를 지킬 관리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게 유르라헬이었다.

그리고 그리피네는 성녀라 불린 유르라헬의 직계.

플로르가 정점에 서려면 그리피네를 무릎 꿇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그리피네가 몸을 틀어 방을 빠져나가며 지시했다.

“모든 존재들에게 알려라, 드디어 플로르가 미쳤다고.”

* * *

성현은 이미 전장에서 벗어나 있었다. 마녀와 짐승이 유르라헬의 성을 공격하는 걸 지켜보는 중이다.

성벽에서 팔팔 끓는 기름이 쏟아지고 마력이 퍼부어졌지만 강령술에 지배된 사체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싸우고 있다.

성현이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 별처럼 눈동자가 박히고 있었다. 모두 존재들의 눈. 검은 하늘이 가득 찰 정도로 그들이 이곳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성현은 존재들이 이 상황을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빤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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