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활을 쏘아라!”
지휘관의 지시에 성벽에 있던 궁수들이 활을 팽팽하게 당겼다. 이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쉭! 쉭!’ 들리며 사체들의 가슴팍에 화살이 박혔다.
성현과 꼬마가 며칠에 걸쳐 꿰맨 사체의 팔다리가 찢어지고 부서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사체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통증과 공포를 모르는 군대. 비록 숫자가 3천밖에 되지 않지만 적에게는 1만, 2만처럼 느껴진다.
그 사체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성벽을 두들겼다.
-카아아악!
쾅! 쾅! 쾅!
사체의 주먹질과 쏘아진 마력에 성문이 흔들렸고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짓된 평화에 잠식되어 보수를 게을리한 죄였다. 그리고 게으름의 대가는 컸다. 조금만 있으면 이 단단한 성문이 열리고 유르라헬의 성이 공개될 거다.
쾅! 쾅!
성벽 위.
한 병사가 다급히 지휘관의 앞으로 달려왔다. 무릎을 꿇은 병사가 긴박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적들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병사가 지휘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적의 숫자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병사가 그 앞에 섰다.
“성문이 버티기 어렵습니다! 곧 열릴 것 같습니다!”
지휘관은 입술을 씹으며 어두컴컴한 사막을 바라봤다.
‘기습이라…….’
달과 별이 있었다면 놈들의 기습은 반드시 실패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떤 것도 뜨지 않은 밤, 적들의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백병전.
“기동대를 보내라.”
“……!”
지휘관의 말에 기동대가 준비했다. 그들은 열다섯, 최상급 존재 중 하나. 그들이 두 눈에서 핏빛 광채를 뿜으며 가파른 성벽을 내달리듯 내려갔다.
촤아아아악!
기동대는 성벽 아래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들의 칼이 지나간 곳에 풍압이 일어났고 풍압에 맞은 사체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런데, 반으로 쪼개진 사체가 죽지 않고 덤벼든다.
“뭐, 뭐야?”
당황한 기동대 중 하나가 손을 뻗었다.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이며 덤벼들던 사체가 빨려 들어가듯 그 손에 달라붙었다.
상대의 생체 에너지를 뽑아내는 권능. 하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 생체 에너지가 있을 리 없다. 기동대는 곧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기동대는 생각했다. 칼끝이 닿은 느낌, 살아 있는 생명을 벤 게 아니다. 조금 더 푸석푸석하고 더러운 기분.
‘이건…….’
기동대는 한 번에 알아 차렸다.
‘강령술?’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
“강령술이다!”
그 말에 함께 내려온 다른 기동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죽지 않는 적을 상대로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중이다.
“……플로르가 아니란 것인가? 그럼, 누구지?”
떠오르는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침략한 상대가 누구인지가 아니다.
“침략한 자가 플로르가 아니란 것, 성벽 아래에 있는 놈들이 강령술에 지배당한 사체라는 것, 그걸 알리는 게 중요하다! 알려라!”
기동 대장의 지시에 한 기동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려왔던 성벽을 다시 오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사체와 싸운다! 일단 성문에서 떨어뜨린다!”
나머지 기동대는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턱을 베었고 눈을 쑤셨다. 하지만 강령술에 지배된 사체는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 * *
성벽을 타고 오르던 기동대는 살짝 고개를 틀어 성벽 아래를 바라봤다.
비명조차 없는 전장, 요란하게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와 썩둑썩둑 뭔가 잘리는 소리만 소름 끼치게 들려오고 있었다.
‘강령술을 쓰다니…… 누가!’
기동대의 머릿속에 유성현이란 이름이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마력으로 이렇게 많은 사체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게다가 인간의 담력으로 감히 유르라헬의 성에 침입할 수도 없다.
기동대는 계속해서 침략한 적을 고민하며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헤이.”
기동대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끔찍한 목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가 벽에 달라붙어 있다.
“뭐, 뭐지?”
기동대의 눈이 떨려 올 때였다.
“유성현.”
낮게 들린 이름 석 자.
기동대의 눈이 부릅떠졌고 동시에 성현의 창이 놈의 얼굴을 노리고 찔러졌다. 놈은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푹!
벽에 매달려 있던 오른손에 힘이 빠지며 놈도 휘청거렸다. 왼손으로 다급히 틈새를 잡고 겨우 자세를 잡았지만 위기는 끝난 게 아니다.
놈은 불안정한 자세로 성벽에 매달려 다가오는 성현을 바라봐야 했다.
“미, 미쳤어!”
놈이 외쳤다. 성현의 눈빛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그가 두려움에 질릴 정도로. 그리고 놈은 성현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죽어라.”
성현의 창이 놈의 머리를 그어 버렸다. 성벽에 매달려 있던 놈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땅으로 떨어진 놈의 위로 사체들이 올라타서 물어뜯었다. 사체들은 놈의 살점을 잔인하게 씹어 먹으며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기동대가 곧 벌떡 일어섰다. 그 역시 성현의 군대가 되었다.
‘이건 됐고.’
성현의 시선은 아래로 틀어졌다.
‘이제 열넷.’
기동대가 올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동대가 몇인지도 잘 알고 있다.
성현의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열넷의 기동대는 오늘 목숨을 잃을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 성현의 군대가 될 예정이다.
* * *
“그래서…… 도망쳤다고?”
밤사이 그리피네의 성을 침략했던 자들, 동이 틀 무렵 일제히 철수했다.
주변을 탐색 마법으로 훑어도 어떤 생명도 느껴지지 않는다, 먼 곳으로 차원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성문 앞에 끔찍한 전투 현장이 남아 있지 않다면, 새벽녘의 전투가 거짓으로 여겨질 정도다.
“죄, 죄송합니다.”
카펫과 커튼 그리고 벽에 붙은 그림까지도 온통 붉은 그곳. 끝없이 높은 계단 위,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은 성녀 그리피네가 일어나 있었다. 그리피네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
어두운 밤을 타 습격했던 놈들이 동이 틀 무렵 일제히 사라졌다는 보고. 열다섯의 기동대 역시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
비록 성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그리피에의 분노가 벼락처럼 울렸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모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적막한 가운데, 그리피네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붉은 카펫으로 이어진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왔다.
“플로르일 게다. 평화라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
“우리는 창조주의 저주를 받아 여왕개미처럼 출산만 해야 하지. 이제 내 새끼가 누구인지도 몰라. 수천, 수만, 수억…….”
“……!”
“플로르도 나와 같았을 게야. 우리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어. 플로르에게 삶은 지옥이야.”
계단의 중간 지점에서 그리피네의 발이 멈춰 섰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아, 최초의 성녀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은 나의 아이들아, 거짓된 평화는 끝났다.”
신하들의 눈이 번뜩였다.
사실 이번 습격의 상대가 누구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하나의 도화선일 뿐이다.
그리피네도 플로르와 마찬가지의 목표가 있다.
“최초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가 존재의 점에 올라야 한다.”
그것은 지금껏 누구도 하지 못한 것.
“플로르를 막아서라. 거짓을 지우고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라!”
이것은 유희거리다.
수천, 수억의 생명이 죽어 나가도 상관없다. 그리피네 자신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의 최전선에 서는 것은 하류 인생.
위에서 정한 정책으로 죽는 것은 오직 밑바닥 존재.
칼에 썰려 떨어진 그들의 살점은 최상위 존재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고, 그들이 흘린 피와 비명은 신나는 노랫가락으로 들려온다.
정점에 서 있는 그리피네에게 그런 고통은 없다. 그저 지시하고 지켜보는 게 전부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며 앞으로도 그럴 거다.
“플로르를 없애고 우리가 이 세상의 평화를 유지한다.”
그리피네의 비장한 목소리에 신하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 * *
“그래서…… 전쟁을 하겠다고?”
“네.”
그 시각, 성현은 짐승의 땅에 있는 초소에 와 있었다.
낮에는 강령술에 지배된 사체를 움직일 수 없다. 사체의 약점은 화염, 사체를 한눈에 알아본 그들이 불덩이를 집어 던질 게 분명해서다.
그래서 성현은 잠시 인간 세상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성현의 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가 앉아 있다.
전쟁이라는 말에 박상문 하사가 이창민 중사의 눈치를 봤다. 담배를 물고 생각에 빠져 있던 이창민 중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전역하고 상문이랑 둘이 짐승의 땅에 있는 낭인을 꽤 모으기는 했어. 그런데, 그 숫자가 아직 1만도 안 돼. 전쟁을 치르기엔 모자란 병력이잖아. 내 계급으로 장군을 만나 설득하기도 어렵고.”
“설득할 필요는 없어요. 장군들은 안 움직일 거니까요.”
회귀 전에도 그랬다. 그들은 많은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사람, 생각이 많고 엉덩이가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처럼, 지연우를 앞세운 플로르의 대군이 움직였을 때 허망할 정도로 무너졌었다. 짐승과 인간의 생체 병기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못한 채.
성현은 회귀 전 봤던 것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물론 회귀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이서아를 통해 미래를 본 것처럼, 하나둘.
“존재의 전쟁이 끝나면 놈들은 인간 세상으로 시선을 돌릴 거예요.”
“……!”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세력 싸움이 끝나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외세와 싸운다. 하나의 적을 만들고 통합하기 위해서다.
플로르에게는 그게 인간이었다, 짓밟기 좋고 적당한 힘도 있고, 덤으로 에느가인도 얻을 수 있고.
성현의 설명을 들은 이창민 중사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지배를 받는다?”
“네.”
* * *
잠시 후, 성현은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초소를 떠났다.
이창민 중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담배만 피워 댔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박상문 하사의 질문에 이창민 중사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었다.
“내 권능으로 훔치면…… 몇 대나 보낼 수 있을까?”
“네?”
이창민 중사의 권능은 물건을 옮기는 것.
군대에 있는 물건을 이계로 보낼 수도 있다.
물론 그 크기에 따라 엄청난 마력이 소모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창민 중사는 결심했다. 엄청난 마력을 사용하면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을 느끼겠지만 지배받는 것보다 그게 나은 일이다.
이창민 중사가 씁쓸히 웃으며 박상문 하사를 바라봤다.
“너도 숨겨 둔 권능을 펼쳐야 될 때가 온 것 같네?”
박상문 하사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