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하지만 순간이다. 박상문 하사는 굳은 표정을 풀고 낄낄 웃으며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런데 아시죠, 제가 권능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반면에 이창민 중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한다.
“알지.”
“막아 주실 수 있죠?”
“네 힘을 내가 어떻게 막아? 막기는 힘들고 안드로메다로 보내 줄게. 거기서 혼자 난리치다가 돌아와.”
“안드로메다요? 우주로 가면 숨 못 쉬어서 죽을 텐데…….”
이창민 중사는 지정된 물건을 소환할 수 있다. 반대로 지정된 물건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럼, 어디로 보내 줄까? 몰디브? 휴양이나 하다 올래?”
박상문 하사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그럴 일이 있으면 어디든 보내 주세요. 사람 없는 곳으로…… 그리고 꼭 찾아 주세요,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오케이. 걱정하지 마. 탈영 신고를 해서라도 잡아 올 테니까.”
“……탈영요?”
“어.”
이창민 중사가 끌끌 웃으며 박상문 하사에게 담배를 건넸다. 박상문 하사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두 사람이 다시 한번 크게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가 씁쓸하다.
존재와의 전쟁, 마음 한구석에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벌어질 것이란 확신은 못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 같다.
담배 연기를 내뱉던 이창민 중사의 시선이 초소 밖으로 틀어졌다.
“출발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청소나 해 둘까? 돌아왔을 때, 지저분하면 기분이 안 좋잖아?”
“돌아올 수는 있겠죠?”
“새끼야,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와 주겠다고.”
* * *
“들었어요.”
잠시 후, 페이트 길드 서은서의 사무실.
성현은 서은서와 마주 앉아 있었다.
서은서의 계약 존재는 카디르버, 그 존재는 성현이 도착하기 전 서은서에게 존재의 전쟁을 일러 줬다.
그럼, 이야기는 빠르다.
“그래서 선택은요?”
성현이 묻는 것은 하나다.
서은서가 인간의 편에 붙을 것인지, 존재의 편에 설 것이지.
서은서가 커피 잔을 내려 두며 진지한 얼굴로 성현을 마주 봤다.
“저부터 물어봐도 될까요?”
“네.”
“우리에게 승산이 있나요?”
“아뇨.”
성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인간에게 승산은 없다. 몇십억 인구가 한 번에 몰살당할 수도 있는 일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다.
서은서의 입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까, 승산은 제로?”
“제로는 아니죠. 지렁이가 밟히고 꿈틀대고. 인간이 깜작 놀라 뒤로 물러서면 지렁이는 살잖아요. 하지만 꿈틀대지 않고 있으면 인간은 그대로 짓밟아 죽이죠.”
“억지 논리 같은데요.”
성현이 다리를 외로 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정도의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래서 어머니급 존재가 그릇을 찾아 이 세상에 헌신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가능성도 사라져요. 짓밟히기 전에 타 죽을 테니까요. 불길이 치솟으면 꿈틀대도 살아남을 수 없죠.”
서은서는 다시 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 어떤 말도 없이 조용히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빠졌다. 서은서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다.
“제가…… 존재의 편에 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은서는 성현의 눈빛을 보며 다시 물었다.
“설마, 지금 죽일 건가요? 내가 존재의 편에 서면, 페이트 길드의 전체가 존재에게 붙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럼, 앞으로 성현 씨의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되니까? 대답해 봐요.”
“서은서 씨를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나를 죽이지는 않는다?”
“카디르버의 목을 베겠죠.”
“……!”
인간이 군주급 존재를 죽이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발언이다. 하지만 상대는 성현. 서은서는 그 말을 우습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진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성현에게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현과 떨어져 지낸 며칠, 하루만 보지 않아도 달라지는 게 성현이다. 성현은 더 강해졌을 거다. 서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결론은 이미 내리고 있었어요. 카디르버 님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성현은 서은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회귀 전 서은서는 자신의 이익만 탐하던 페이트 길드의 마스터였다. 당시의 그녀였다면 가차 없이 존재의 편에 섰을 거다. 그리고 성현과 맞서 싸웠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변했다. 성현과 함께하며 그 냉혹한 모습은 많이 지워진 상태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성현은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카디르버 님도 플로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시네요. 플로르만 죽이고 끝내 달라고. 그 외의 존재는 인간 세상에 별반 관심이 없다고.”
성현이 빙긋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디르버에게 전해 주세요. 지금 대답으로 목숨은 살려 주겠다고요.”
존재의 숫자는 별처럼 많다고 한다. 그 모두를 박멸할 수는 없다. 성현이 노리는 것은 플로르와 그리피네처럼 인간 세상을 노리는 존재들. 그 탐욕의 덩어리뿐. 카디르버가 조용히 있다고 하면, 건들 생각이 없다.
그런데 성현의 말에 서은서가 빵 터졌다. 배를 잡고 웃는다.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요? 카디르버 님이 ‘고오오맙다.’라고 하는데요!”
존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현이라 가능한 거다.
* * *
다음으로 성현이 찾은 곳은 서울의 한 빌딩 앞이었다.
‘물산’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지만 사실은 짐승과 인간의 DNA를 조작해 생체 병기를 만드는 곳.
빌딩 앞에 앉아 있던 성현은 금발의 외국인이 나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나 알지?”
길을 가려던 금발의 외국인은 성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이던 눈이 커졌다.
“유성현?”
“기억하네?”
여자는 성현이 전역하던 날 생체 병기 6마리를 데려와 싸움을 붙였던 자. 그리고 회귀 전, 생체 병기의 어머니라 불렸던 자.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파이라 불렀다.
“여, 여기는 어떻게?”
“생체 병기 아직 제조하고 있지? 최적의 테스트 장소가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
여자는 잠시 성현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당시 성현은 말했었다.
-인간을 베이스로 만든 이유가 뭐야?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있어. 발톱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어. 그 장점을 버리면서까지 인간의 형태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차라리 모습이 기형적이라 해도 짐승과 짐승을 합쳐 봐. 날개가 없는 놈에게 날개를 만들어 주고 다리가 없는 놈에게 다리를 줘 봐. 두 배, 세 배는 강해질 거야. 그게 계약자를 이기는 법이야.
그렇게 생체 병기의 약점과 장점을 설명해 줬었고 그 말은 지금껏 그녀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성현은 또 말했었다.
-나중에 내가 널 찾아가는 날이 있을 거야. 그때를 대비해서 딱 100마리만 센 놈으로 만들어 봐. 200마리면 더 좋고.
-예언 하나 할게. 조만간 존재와의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 전쟁에서 그쪽이 만든 생체 병기가 활약할 거야.
기억을 더듬은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날이 온 건가요?”
전쟁의 날, 그녀는 겁이 덜컥 났다. 존재와의 전쟁이 인류의 종말을 뜻하는 단어로 여겨진 거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는데,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가능은 한 것일까?’ 등등의 복잡한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현은 그녀의 복잡한 생각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저런 위안을 줄 수는 없다. 어설픈 희망은 저주보다 못한 거다. 성현이 슬쩍 웃으며 그녀의 옆을 스쳤다.
“차 한잔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잠시 후, 성현은 파이라 불리는 여성과 근처의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다.
“몇 기나 만들었지?”
“아직 불안정해요.”
“영원히 불안정할 거야. 그러니까 전투에 쓸 수 있는 게 몇이나 되는 거야?”
“500쯤…….”
500이라는 말에 성현은 조금 놀랐다. 기껏해야 100에서 200 정도가 한계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이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걸 전부 전쟁에 끌고 갈 수는 없어요. 테스트용이라 말해도 30기 정도가 전부예요.”
생체 병기는 정치권에서 계약자의 권력을 두려워한 끝에 만들어진 비인륜적인 결과물.
정치권의 힘이 들어가 있기에 파이가 생체 병기를 만들었다 해서 그걸 제멋대로 이계로 보낼 수는 없다. 테스트용이라 속이며 보낼 수 있는 것도 30기 정도가 한계다.
하지만 성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다 보내.”
“이봐요! 그게 말처럼 쉬운…….”
“안 보내면 어차피 다 죽어. 권력자도 죽고 저 건물도 박살 나고. 어차피 죽을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뭐가 있을까?”
“……!”
어떻게 보면 성현의 말은 극단적이다. 하지만 성현은 다음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존재의 전쟁이 끝나면, 그 시선은 지구로 틀어진다. 그리고 생체 병기라는 이름으로 존재를 위협하던 모든 것은 싹 사라지고 만다.
성현이 그녀를 향해 상체를 굽히며 말했다.
“계약자를 모두 없애고 싶어서 생체 병기를 만들고 있지? 계약자를 없앨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존재를 없애는 거야.”
* * *
그 후 며칠 동안 성현의 행동은 똑같았다.
밤에는 이계로 넘어가 그리피네의 성을 게릴라 형식으로 공격했고, 낮에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피네의 성을 공격할 때마다 성현의 병력은 많아졌다. 놈들의 죽은 사체가 성현의 권능에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현은 꼬마를 통해 이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듣고 있었다.
“그리피네가 플로르에게 전쟁을 선포했어요.”
그런데 플로르는 성을 공격한 게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
“플로르 역시 알고 있거든요.”
그리피네는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누가 자신의 성을 공격했는지에 대한 것은 상관없던 거다. 그리피네는 사막에 울려 퍼지는 비명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분위기는?”
“다들 술렁거리고 있어요. 플로르와 그리피네가 싸우는 것은 존재의 최강자를 가리는 일이니까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만 남은 거죠.”
존재들이 갈리고 있다. 플로르와 그리피네의 편에 서기 위해 줄을 대는 중이다.
“반면에 처음부터 어머니급 존재와 등을 돌리고 있던 군주급 존재들은 관망하는 상태죠.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움직일 생각인 것 같아요.”
말을 마친 꼬마가 시선을 틀어 성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고객님의 준비는요?”
“비밀.”
“네?”
“비밀이라고.”
“전 다 말해 줬는데요!”
성현이 꼬마에게 금화를 툭 던졌다.
“자, 정보값.”
꼬마가 황당한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