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 * *
그 시각, 플로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차갑다. 그런데,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리피네…….’
플로르는 그리피네와의 싸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태초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피네는 플로르를 한 수 아래로 생각했다. 업신여겼고 무시했다. 이제 그 삶을 정리할 때가 됐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그리피네의 성을 공격한 게 자신이 아니란 변명을.
‘넌 너무 건방졌어.’
플로르는 도도했던 그리피네가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벼 댈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에느가인이다. 인간들을 지배해야 갓난아기의 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지배해야 할 지연우는 죽었고 이미지까지 망쳐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을 몰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구라는 별 따위야 얼마든지 먼지로 만들어 버릴 힘이 플로르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플로르가 노리는 것은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신이 되어 그들을 다스리는 것. 플로르의 고민이 깊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한 신하가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플로르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신하를 향해 틀어졌다. 말하라는 눈빛에 신하가 허리를 굽힌 후 한 발 걸어 나왔다.
“인간은 겁이 많은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몇 마리의 지도자의 지시에 끌려다니는 생명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숫자는 수십억이나 된다. 하지만 그들을 끌고 가는 것은 고작 몇백 명. 수십억의 인구가 몇백 명의 지시를 따르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몇백 명만 잡으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방법이 있는가?”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인간은 생명체 중에서도 이기적인 것으로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도층을 찾아가 그 가족과 미래를 인질로 삼아 우리를 따르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겁이 많고 이기적이라고요. 공포를 심어 주고 손해 볼 것을 말해 주고 득이 될 것을 보여 주면, 수십억 인구는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안위만 챙길 게 분명합니다.”
신하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오랜 시간 인간의 지도자를 관찰해 왔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말로 거짓을 내뱉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머릿속에 세세히 박혀 있었다.
“그럼, 인간은 우리의 지시를 따를 겁니다. 놈들은 남의 아픔을 보며 공감하는 척하지만, 남의 불행을 보고 행복을 느끼는 족속들이죠. 나만 괜찮으면 다른 놈들은 불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쩌면 어머니를 위해 갓난아기를 생산하는 공장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플로르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적막이 공간을 짓누를 때 그녀의 음성이 모두의 귀에 꽂혔다.
“그래, 책임을 지고 시도해 보라. 성공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내려 주겠노라.”
신하는 환희의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됐어.’
그는 지금껏 평화의 시대를 살아왔다. 능력이 있어도 낮은 서열이었고 가장 구석에 서서 눈에 띌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평화의 시대가 걷히고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다. 신하는 자신의 위치가 주역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르겠습니다.”
신하가 무릎을 꿇으며 플로르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플로르가 몸을 일으켰다. 인간에 대한 문제는 신하에게 잠시 일임하면 된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은 전쟁. 그리피네의 성을 완전히 망쳐 버리는 것. 사막에서 그 존재를 지워 버리는 것.
플로르가 왕좌에서 걸어 나오며 아래에 위치한 신하들을 둘러봤다. 그 검은 눈동자가 스쳐 갈 때마다 신하들은 허리를 굽힌다. 플로르가 입을 열었다.
“전쟁을 준비하자. 하지만 그리피네는 강하다. 너희들 중 몇 명이나 살아남을지 약속할 수 없겠구나.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살아남아 내 품으로 돌아온 아들, 딸에게는 영광이 있으리라.”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플로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세상을 그리피네의 피로 채워라. 사막을 그리피네의 주검으로 뒤덮어라. 모든 짐승을 깨워 놈들의 팔다리를 씹어 먹어라.”
그 명령과 동시에 플로르의 성 앞, 풀 한 포기 없는 그 척박한 땅에 짐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퀴벌레와 시커먼 귀뚜라미, 비행기만 한 잠자리와 이빨을 드러낸 늑대. 그 숫자를 가늠할 수 없다. 지평선 끝까지 채워진 것만 같다.
그리고 짐승의 몸 위로 존재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마녀와 마인, 각 귀족. 그들의 숫자 역시 셀 수 없다.
인간의 역사가 300만 년, 그 시간 동안 채워진 인구가 수십억. 하지만 존재의 역사는 태초의 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 그 숫자는 두려울 정도였다.
플로르가 계속 말했다.
“존재의 단체 ‘교’에게도 알려라. 나를 따르는 존재들에게도 전하라. 전쟁이라고. 그리피네를 꺾고 우리의 세상을 만들겠다고. 만약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리피네의 성에 가기 전 그곳부터 들르겠다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성을 울렸다.
* * *
“……그렇게 플로르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걸리지?”
“그리피네의 성까지 도달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릴 거예요. 그런데, 직접적인 싸움은 사막 한복판에서 시작되겠죠.”
성현과 꼬마가 사막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꼬마가 나뭇가지를 들고 모래 바닥에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한 부분을 쿡 찍으며 계속 말했다.
“그리피네의 병력도 출발했으니까, 이쯤에서 두 병력이 만나겠네요.”
“누가 이길 것 같아?”
“글쎄요. 플로르도 만만치 않지만 그리피네가 워낙 강해서…….”
이계의 세상에서 그리피네의 이름은 무겁다. 최초의 성려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그 하나만으로 그녀의 이름이 주는 두려움은 지르힐에 견줄 정도다.
하지만 꼬마의 예상은 틀렸다. 회귀 전, 이들의 전쟁이 똑같이 있었고 당시 승리자는 플로르였다.
그리피네는 오랜 시간 평화에 길들여졌지만 플로르는 언제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피네의 병력은 어이없을 정도로 갈려 버렸고 플로르의 발아래 무릎 꿇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것도 그 그림이고.’
성현은 그리피네와 플로르의 대군이 맞붙어 처참하게 싸우고 비참하게 죽어 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세력으로 존재와 전쟁을 해서 이길 수는 없어.’
마녀 하나만 해도 인간의 대대급 병력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 마녀의 숫자가 수십억이다.
‘그래서…….’
성현이 생각하는 것은 강령술이었다. 플로르와 그리피네가 싸운 곳. 그곳에서 죽은 사체를 얻는다. 그 사체를 끌고 플로르와 싸워 힘이 약해진 그리피네를 죽인다. 그리피네의 피를 손에 얻어 지르힐을 구한다.
‘지르힐이 풀려나면…….’
성현은 지르힐의 강함을 안다. 나모르의 코어에서 봤던 지르힐을 기억하고 있다. 지르힐은 군주급의 존재 수십만이 달려들어도 죽일 수 없던 자. 지르힐이 풀려나면, 그리고 성현의 권능과 인간의 병력이 지르힐을 도우면 플로르의 세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때까지…… 마력을 높여야 해.’
성현은 3천의 사체를 움직이는 것도 버거웠다. 플로르와 그리피네의 전쟁에서 죽어 갈 수십억의 사체를 움직이려면 마력을 더 끌어 올려야 한다. 그리고 방법은 알고 있다.
성현이 꼬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병력은 얼마나 돼?”
“비밀이에요.”
“응?”
“그건 비밀이에요. 돈 줘도 말 안 해요.”
“금화 스무 개.”
“안 해요. 오십 개를 줘도 안 해요. 이건 내 꿈이에요.”
“뭐, 나중에 보면 알겠지.”
* * *
“찾으러 가자고요?”
성현은 이서아를 만나고 있었다.
독서실에서 나온 이서아가 빨간 책가방을 맨 채 놀란 눈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그걸 다시 찾자고요?”
“어.”
이서아가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편의점 파라솔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위험한 거 알잖아요?”
“그래도 해야 해.”
“왜요? 또 회귀하고 싶으세요?”
성현과 이서아는 잠시 회귀 직전의 시기를 떠올렸다.
* * *
높은 언덕에서 구악의 동료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던 성현에게 이서아가 말했었다.
“가세요.”
“안 가.”
그때, 이서아가 엷은 미소를 그리며 꺼냈던 둘둘 말린 양피지.
그것을 펼치자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었다.
“과거로는 1명만 갈 수 있어요.”
* * *
성현이 찾으려 하는 것은 그 양피지다.
이서아가 눈을 반짝이며 계속 물었다.
“뭐예요? 그때는 그렇게 회귀하기 싫어하더니……. 뭐, 어쨌든, 이번엔 언제로요? 갓난아기? 아니면, 중학생? 그것도 아니면…… 또 고등학생?”
“회귀는 안 해.”
“네?”
이서아가 눈을 깜빡였다.
“회귀도 안 할 거면서 양피지는 왜 찾으려고 하세요?”
“글쎄…… 아직 나도 확신이 없어서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어쨌든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양피지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아이템이다. 누군가는 에느가인에 맞먹는 아이템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로 찾을 수 없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아이템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성현에게는 이서아가 필요했다.
이서아는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양피지를 찾으러 가는 것은 지뢰밭을 건너는 것이나 마찬가지. 회귀 전에는 운 좋게 양피지를 얻었지만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정말 함께하고 싶던 부모님과 또 헤어질 수 있다는 거다.
이서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스트로에 입을 댔다.
“이 와중에 바나나 우유는 맛있네요.”
“그건 진리잖아.”
“그건 그래요.”
이서아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성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둘이 가는 거예요?”
“어.”
“대장이 전보다 세졌다 해도 양피지를 찾으러 갈 때, 우리 두 사람으로는 무리예요.”
“그래도 해야지.”
* * *
그 시각, 지르힐이 갇힌 탑.
지르힐은 성현과 이서아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지르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귀?’
그리고 그 말은 무의식에 자리 잡은 마법사도 들었다.
무의식의 한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법사 역시 지르힐과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귀?’
마법사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내 과오를 막을 수도 있어.”
아내가 죽었던 것, 자식이 죽었던 것, 그들이 타 죽어 가던 불길.
세상이 망가지고 룰이 깨지고 지르힐이 탑에 갇혔으며 신의 저주를 받게 된 그 모든 것, 마법사는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된 생각은 따로 있었다.
시간을 돌려 육신을 가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을 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