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성현은 물끄러미 이서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성현은 그녀의 얼굴에서 난처함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성현이 이서아를 향해 한 발 다가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진짜, 정말 아니에요. 제가 강아지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늑대는 개랑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늑대가 죽는 게 좀 그랬어요.”
성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서아의 표정을 살폈다. 명백한 거짓말. 성현은 오랜 시간 가식의 상징인 지연우를 상대해 온 사람이다. 이서아의 거짓말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이서아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출발하자.”
성현이 다시 이서아를 둘러업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기다리던 늑대의 사체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성현이 그 뒤를 쫓아 달렸다.
그리고 성현에게 매달린 이서아가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그녀의 입술이 움찔거린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에요, 지르힐이 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며 대장과 싸우겠다고 한다면, 대장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이서아는 조금 전 지르힐과 만났던 것을 떠올렸다.
회귀라는 진실을 알게 된 지르힐의 일그러진 눈빛, 뭔가 슬퍼 보이던 그 태도. 이서아는 지르힐이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지르힐에 대한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서아는 지르힐이 성현과 싸울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지르힐은 세상을 관리해야 하는 관리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지키려는 성현과 그 목적이 다르다.
‘대장은 지르힐과 싸울 수 있어요?’
이서아는 성현의 모습을 씁쓸히 바라봤다. 이서아는 오랜 시간 성현을 알고 지냈다. 성현이 지르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회귀 전, 고아가 되어 집 안에 틀어 박혀 있던 성현에게 지르힐은 어머니처럼 대해 줬고 외로워하던 성현을 연인처럼 위해 줬다. 지르힐은 성현의 아픔을 보듬었고 성현이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성현에게 지르힐은 특별한 존재다.
‘지르힐에게 마력을 쏠 수 있어요?’
하지만 이서아가 마주한 지르힐은 달랐다. 그 눈빛에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을 건조하게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지르힐이 아무리 성현을 아낀다고 해도 그녀는 존재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고 앞으로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갈 게 분명하다. 그런데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을 위해 신의 뜻을 어기지 않을 거다.
‘하…….’
이서아는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플로르를 상대하는 게 우선이다. 뒷일은 나중에 판단해야 한다.
이서아가 다급히 말했다.
“위!”
성현의 시선이 위로 옮겨졌다. 동굴의 천장이 드드드득 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리더니 짐승이 떨어진다.
동굴의 입구에서 봤던 진갈색의 피부에 귀가 긴 짐승, 키가 약 2m 50cm에 이르는 인간형 짐승이 우르르 쏟아지는 중이다.
땅에 처박힌 놈들이 손톱으로 바닥을 기며 달려온다. 벽을 타기도 하고 뛰어오기도 한다.
-카아아아악!
놈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보였다.
성현도 망설이지 않았다. 놈들의 아가리에 창끝을 찔러 넣었다.
퍽! 퍽!
피가 튀고 뼈가 쪼개졌다.
창을 휘두를 때마다 동굴 벽에 짐승의 살점이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눈을 찌푸린 것은 성현이었다.
‘도대체 이놈들은…….’
보통의 짐승은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면 도망가기 마련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겁을 집어 먹는 게 당연하다. 그게 생존을 위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달랐다.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양피지를 지켜 내지 못하면 정말 죽을 것처럼.
성현은 창을 휘두르며 입술을 씹었다.
이 동굴의 모든 게 회귀 전과 달라져 있었다.
* * *
“전차……. 그리고 이건 뭐죠? 이것도 전차?”
“아뇨. 그건 자주포.”
이계의 사막이었다. 그러니까 나모르와 싸울 때 인간의 군대가 진영을 짜고 대기하던 곳.
그곳에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 그리고 서은서가 서 있었다.
이창민 중사가 전차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오래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훔쳤다는 것이 곧 알려질 테고 난리가 나겠죠.”
“…….”
“윗선이 도와주면 좋을 텐데, 유성현 말대로 윗분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쉽게 안 움직이거든요.”
서은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관총은 물론이고 전차와 자주포 심지어 헬기까지 보인다. 그 숫자가 약 20여 기.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한 사람이 이걸 모두 훔쳐 왔다고 생각하면 놀라울 일이었다.
“……대단해요.”
서은서의 칭찬에 이창민 중사는 괜히 머쓱해졌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괜히 박상문 하사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걸리면 영창 가는 것으로 안 끝나겠지? 혹시, 사형선고? 이왕 죽는 거, 미사일을 훔쳐 보는 것은 어떨까?”
“미사일은 약하고……. 핵이나 항공모함은 어떠십니까?”
“핵? 좋네.”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서은서는 성현을 떠올렸다.
서은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성현의 지시였다. 함께 전쟁을 준비할 동료가 있으니 만나 보라던 것.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단한 실력을 가진 계약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서은서가 이창민 중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겠어요.”
“알겠다니요?”
담배를 입에 물던 이창민 중사가 그녀를 향했다.
“성현 씨가 이 부대로 온 이유요.”
“이 부대?”
“네.”
“성현 씨가 마음만 먹었다면 군대는 뺄 수 있었을 거예요.”
계약자는 실적을 세우면 군대에 안 갈 수 있는 제도가 존재했다. 그리고 성현의 능력이면 그 정도 실적은 하룻밤에 세웠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 성현은 군대에 갔다. 그리고 서은서에게 부탁해서 가장 척박한 짐승의 땅으로 향했다.
당시 서은서는 성현이 마녀나 짐승을 잡으며 권능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아니다.
“두 분을 만나려고 한 거였어요.”
서은서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는 듯, 정말 놀랍다는 얼굴로 말을 전했다.
그런데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박상문 하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유성현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죠.”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는 약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성현과 함께 지냈다.
“음흉한 놈이잖아요?”
그들은 성현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현은 가벼운 행동을 하지 않는 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창민 중사가 서은서를 향해 몸을 틀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유성현의 과거는 궁금하지 않고요. 서은서 씨가 우리를 찾은 이유. 성현이 서은서 씨를 우리에게 보낸 이유, 만나서 훔친 무기를 관람하라는 이유는 아닐 텐데요.”
이창민 중사의 말에 서은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성현 씨가 보낸 이유?’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이 나타나면 우리 페이트 길드와 연계되어 작전하는 기계화부대가 몇 곳 있어요. 저는 그 부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죠.”
그 부대에 들어가 무기를 훔치라는 것.
그것도 기계화부대라면, 전차가 가득할 거다.
이창민 중사가 손뼉을 짝 쳤다.
“좋아요. 그럼 바로 그쪽을 털죠. 준비해 주실 게 있어요. 내 알량한 마력으로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것은 고작 1개에서 2개예요. 마력을 채울 수 있는 약을 준비해 주시고…….”
“잠시만요. 어떻게 훔치죠? 방법을 좀 듣고 싶은데요. 만약에 들키면…….”
“안 들켜요. 그리고 서은서 씨에게 문제 될 일은 없어요. 보고 오기만 하면 되니까요.”
“네? 보고 오기만 하면 된다?”
이창민 중사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맥주가 한 캔 쥐였다. 이창민 중사가 서은서에게 맥주를 건네며 말했다.
“좌표만 알고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훔칠 수 있어요.”
이창민 중사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손 위에 다이아몬드가 보인다. 이창민 중사가 다이아몬드를 땅에 툭 버리며 말했다.
“이건 시험 삼아 가져온 거고, 평소에 이런 돌덩이는 안 훔쳐요. 소주나 맥주, 담배나 훔치죠.”
서은서가 눈을 깜빡였다. 세상 많은 권능을 지켜봤지만, 이렇게 실용적인 것은 처음이다.
“도대체 계약 존재가 누구기에…….”
“아, 도둑 놈이에요. 존재의 세상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그저 괴팍한 노인네에요.”
멍하니 있던 서은서의 시선이 박상문 하사에게 틀어졌다.
“죄송하지만…… 그쪽 권능을 알 수 있을까요?”
서은서는 생각했다. 이창민 중사가 이런 대단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면, 박상문 하사 역시 만만치 않을 거라고. 그리고 박상문 하사의 권능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어째 박상문의 표정이 험악하다.
서은서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덧붙였다.
“……궁금해서요.”
박상문 하사가 서은서에게 살짝 몸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
“알면 다쳐요.”
“네?”
“그런 게 있어요. 전 피와 살육을 즐기는 파괴의…….”
이창민 중사가 박상문 하사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
* * *
성현의 갑주에는 핏물이 가득했다. 동굴을 이동하며 계속 싸운 결과다.
“미친놈들…….”
살벌하게 달려들던 진갈색의 짐승을 생각하면 이제 혀가 내둘릴 정도다.
놈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목숨을 내던졌다. 죽을 것을 알면서 덤벼들었다. 그 눈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했지만 머뭇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그놈들은 모두 죽었고 성현은 마지막 입구에 도착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동굴이었지만 이서아의 미래를 보는 눈 덕에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성현의 팔에서 내린 이서아가 입구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단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제단에…….”
성현은 이서아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회귀 전과 똑같은 입구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회귀 전과 동굴의 상황이 달라졌다.
‘달라진 이유가…….’
10여 년이나 앞서 이곳에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성현이 지금껏 저지른 사건 때문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이서아의 말이 그 불안함 예상을 더했다.
“조심하세요. 문고리를 돌리면 동상이 움직일 거예요.”
성현이 고개를 틀어 동상을 바라봤다.
입구의 문을 지키는 것처럼 우뚝 선 8개의 동상.
그 하나하나가 마치 절의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처럼 보인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끼이이이이익!
음산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 것은 동상이다. 놈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우리는 창조주의 뜻을 지키는…… 로카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