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석상의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를 내뿜어졌다. 놈들이 성현을 향해 내달렸다.
콰지지직!
석상의 어깨가 성현의 몸을 부딪쳤다.
성현은 가까스로 창을 들어 막았지만 뼈가 으스러지는 충격까지는 어쩔 수는 없었다.
비틀!
균형을 잃은 성현의 위로 8개의 석상이 올라탔다. 밟아서 짓이기려는 거다.
쾅! 쾅! 쾅!
성현은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놈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놈들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그때 성현의 머릿속에 마법사의 음성이 스쳤다.
-지금부터 내 뜻에 따라 움직여라.
‘뜻?’
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의 마법사와 다르다. 이런 위기 상황이면 몸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을 놈이 지시를 내리고 있다.
‘……왜?’
성현은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들을 시간은 없었다.
훙! 훙! 후우우웅!
석상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계속해서 이어졌다. 놈들의 주먹이 스친 동굴 벽이 쿵, 쿵 울리며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내 권능은 그렇게 사용하는 게 아니다.
성현의 존재는 지르힐이다.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은 수준급.
하지만 마법사의 권능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마법을 사용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게 내 싸움이다.
그때 석상이 빛의 속도로 성현을 향해 뛰어왔다.
쉬이익!
성현은 뒤로 물러서면서 자세를 잡고 마법사의 지시대로 손을 뻗었다.
촤아아악!
성현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동시에 단단한 바닥이 순식간에 녹아들더니 늪처럼 흐물흐물 변했다.
달려오던 석상이 그곳에 발을 디뎠다. 갑작스레 물컹거리는 땅.
-컥!
석상의 균형이 무너졌다. 비틀거리며 그 거대한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혼란을 줬다면, 지금 그 목숨을 빼앗아라!
성현이 석상의 머리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콰직!
석상의 머리가 깨졌고 그 파편이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다음 놈들을 공격하라.
성현은 달려온 석상의 어깨를 밟으며 그 뒤에 선 놈들을 향해 돌격했다.
-말했다, 혼란을 주라고.
성현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손을 뻗었다. ‘쿠르르르릉!’ 소리가 나며 검은 먼지가 확 일어났다. 이것 역시 마법사의 권능이다.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는 것. 그 범위는 넓지 않지만 좁은 동굴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하다.
-놈들의 숫자는 여덟.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성현을 공격하다가 서로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마법사의 말대로 석상의 행동이 멈칫거렸고 놈들은 분노했다.
-이놈!
하지만 성현이 그 분노에 위축될 성격은 아니었다. 성현이 놈들을 향해 달려들며 창을 휘두르자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번개가 나타났다. 그 번개가 석상의 얼굴을 그대로 때렸다.
콰아아아앙!
석상의 피부에 금이 쩍 갔다. 금이 간 곳에서 검은 마력이 새어 나왔다.
-단단한 것은 내부의 폭파에 약하다.
성현이 금이 간 곳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동시에 성현의 손이 3~4배로 커졌다. 이것 역시 마법사의 권능.
-끄아아아악!
석상이 비명을 질렀고 그 피부가 박살 났다.
지켜보던 마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더한 권능도 사용할 수 있었을 거다.
성현의 마력은 귀족급 존재에 견줄 만하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에는 한계가 있다.
물리적인 한계, 인간의 신체가 가진 연약함.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하지만 넌 존재를 이길 수 없다.
순간, 석상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에 성현이 맞았다. 성현은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튕겨 나가 동굴 벽에 꽂혀야 했다.
꽈아아아앙!
벽에 꽂혔다 튕겨 나온 성현이 바닥에 엎어졌다. 두 팔로 몸을 일으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석상이 성현을 향해 일제히 달려오고 있었다.
먼지에 가려 성현의 신형이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었던 거다.
-저기다!
-죽여!
-인간 따위가!
콰아아아앙!
그들의 몸이 또 성현에게 부딪쳤다.
놈들의 몸은 단단한 돌덩어리.
그것에 닿는 순간 성현은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한쪽 팔이 짓이겨져 피가 뚝뚝 흘렀다.
-숨어 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나?
-알량한 재주로 우리를 이기겠다고?
-건방진 인간아, 넌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창조주가 직접 빚은 로카팔라다.
놈들이 끝을 모르고 성현을 공격했다. 이미 코너에 몰린 성현은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콰직! 콰직! 콰직!
공격이 이어질 때마다 성현의 몸이 흔들렸다. 짓이겨진 팔이 마른 오징어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석상의 손에서 화염이 솟아올랐다.
-죽어라!
그 불꽃이 성현의 몸에 닿았고 갑주가 녹아내렸다.
하지만 마법사의 음성은 평온하게 이어졌다.
-군주 나모르를 이겼다고 다른 군주를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기억하라. 그 나모르조차도 내 힘을 빌렸던 거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한 석상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길게 늘어나더니 칼처럼 변했다. 그것이 성현의 어깨를 찔렀다.
콰지지직!
성현이 몸을 뒤틀지 않았다면 어깨에서부터 배까지 찢어졌을 거다.
하지만 마법사의 음성은 그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존재와의 전쟁? 이성적으로 판단하라. 인간은 이길 수 없다. 네 생각에 휩쓸린 불쌍한 인간은 이계의 사막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갈 거다.
콰직! 콰지지직! 꽈직!
성현의 온몸이 너덜거렸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차분히 이어졌다.
-인정하라. 넌 인간이다.
하지만 성현은 굳건히 섰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석상의 턱에 창을 꽂았다.
쩌엉!
동시에 창끝에서 금빛의 불꽃이 번쩍였다. 창에서부터 시작된 강력한 전기가 석상의 몸을 휘감았다.
-끄아아아악!
석상이 고통을 느끼며 그 거대한 몸이 흔들렸다. 성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석상의 머리를 쥐고 땅으로 처박았다.
꽈아아아앙!
석상의 머리가 완전히 으깨졌다. 바닥에 돌덩이가 나뒹군다.
성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앞을 바라봤다.
‘아직도 일곱.’
성현의 생각과 동시에 다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이따위 놈들에게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게 너다. 고작 이런 벌레 같은 놈들을 이기지 못하는 게 너다!
성현이 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힘 빠지는 소리 그만하고 하고 싶은 말이나 해.’
* * *
성현의 무의식.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마법사가 눈을 떴다.
‘곧 유성현의 의식이 사라질 게야.’
마법사는 성현의 힘으로 석상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성현의 몸을 차지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
바로 양피지 때문이다.
‘그게 있다면…….’
세상을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럼…….’
마법사는 저질렀던 모든 과오를 바로 세울 수 있으며 과오가 시작됐던 것조차 지워 버릴 수 있다.
‘과오의 시작은 세상의 탄생.’
세상이 없다면 죄도 없다. 아내와 아들이 타 죽었던 비극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과 선이 없는 세상, 마법사에게 무(無)는 곧 행복. 마법사는 이 세상을 멸하려 한다.
‘그래서…….’
마법사는 직접 나서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전투를 지시하며 마력을 아끼는 중이다.
‘어느 순간 지르힐이 나타나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
마법사는 지르힐과의 싸움을 대비하며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유성현…… 너에게는 미안하다.’
마법사는 오랜 시간 성현과 함께했다. 그리고 악착같이 삶을 이어 가는 그 처절한 모습을 지켜봤다. 극악의 고통 속에서도 견디고 견뎠던 그 모습을 알고 있다.
‘내가 네 꿈을 대신 이어 주마.’
성현의 목표는 플로르를 죽이는 것.
‘플로르는 내가 죽여 주지.’
하지만 거기까지다.
성현의 목적을 이뤄 준 다음 마법사는 이 모든 세상을 멸할 거다.
과거로 되돌린 후 그때부터 존재하던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다.
‘창조주가 막는다고 해도…… 난 이뤄 낼 거다.’
마법사의 눈이 불꽃이 번쩍였다.
그때.
“마법사, 네가 나의 그대를 전부 안다고 생각해?”
지르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봤다. 지르힐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넌 몰라.”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전부.”
지르힐이 마법사를 향해 자박자박 걸어왔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마법사의 앞에 섰다.
마법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지르힐의 저런 미소는 태초의 시간 이후 처음 보는 거다.
당시의 지르힐은 장난기도 많고 생각대로 움직였던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지르힐은 모든 것을 억누르고 삶을 견디는 존재.
그런데 지금 당시의 그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에 마법사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 미소가 반가웠기 때문이다.
지르힐이 마법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법사, 난 네가 회귀라는 단어에 빠져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예상이 맞았네?”
“장난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우리 그대가 회귀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넌 몰라.”
지르힐은 이서아를 통해 회귀 전 성현의 상황을 들었다.
고아가 되었던 일부터 외롭던 인생에 마주한 지르힐과의 계약, 새 삶을 살며 구악이라는 친구들을 만났던 일, 그리고 배신과 친구들의 죽음, 마지막으로 회귀.
지금은 성현이 이를 악물고 싸우는 이유, 인간 세상을 지키려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다. 당시 함께했던 자들이 이번 삶에서는 행복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어서다. 단지 그 소박한 이유로 저렇게 처절할 정도로 버텨 내고 있다.
잠시 이서아가 했던 말을 떠올린 지르힐이 다시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마법사의 모든 것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너를 아껴. 내 오랜 친구니까.”
“그런데?”
“내 그대를 막으려 한다면, 난 내 친구를 죽일지도 몰라.”
마법사가 “킥!”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점차 커진다. 무릎을 치며 껄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지르힐…… 난 널 죽일 거다.”
“뭐, 그건 해 보면 알겠지.”
“봉인된 네 마력이 날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마법사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거친 파도처럼 솟아올랐다.
하지만 지르힐은 느긋하다.
“망령이 된 네 마력이 내 한쪽 팔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지르힐과 마법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서로의 눈빛이 복잡하다. 친구였지만 싸워야 했던 그리고 다시 싸울지 모르는 관계.
잠시 마법사의 눈을 쏘아보던 지르힐이 다시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어쨌든, 궁금한 게 생겼어. 양피지는 창조주가 만든 게 분명해. 그런데 왜 만들었을까? 실체도 불분명한 에느가인부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양피지까지…….”
“……!”
“내 신앙이 흔들리고 있어. 난 계속해서 창조주를 믿을 수 있을까?”
“……!”
“그리고 생각했어. 내 그대를 건들면, 창조주라 해도…… 죽여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