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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25화 (225/252)

225화

석상들이 멈칫거렸다.

지르힐의 말은 말 그대로 창조주를 부정하는 것.

그런데 눈빛을 보면 진심이다.

창조주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박살 낼 것 같은 기세다.

-미, 미친…….

석상들이 당황했다.

지르힐은 창조주가 처음 만들어 낸 관리자.

창조주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생명체 중 하나.

-도대체 뭘 하려는 거냐! 지금 그 말이 진심인 게냐!

지르힐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마력을 끌어모을 뿐이다.

‘그대의 신체는 이미 만신창이야. 이 몸으로 내 마력을 견디기는 어려워.’

성현은 인간이다. 컨디션이 좋은 신체라 해도 견뎌 낼 수 있는 권능의 한계가 있다. 지르힐이 한계치의 마력을 사용한다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성현의 신체를 빼앗지 않았다. 빼앗을 때도 갓난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권능을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 성현의 몸은 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팔이 짓이겨졌고 몸에는 숭숭 구멍 난 게 보인다. 뼈가 튀어나왔으며 근육이 찢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워 보였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지금 성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마력은 평소의 10분의 1도 안 될 거다. 지르힐은 성현의 몸을 우선하며 모으던 마력을 흩뜨렸다. 그리고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석상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상대가 지르힐인 만큼 모든 마력을 끌어 올려 일순간에 끝낼 생각인 거다. 그들의 눈빛이 동굴의 어둠 속에서 짙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마력을 모은 석상들이 지르힐을 노려보며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신체는 한계에 다다랐다.

-아무리 지르힐이라 해도 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오늘 창조주의 첫 번째 조각을 박살 낸다.

-죽인다. 죽이고 또 죽인다.

석상의 몸에서 압도적인 마력이 흘렀고 그 기세가 지르힐을 압박했다.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우리가 할 일은 이 문을 지키는 것. 그 일을 할 뿐이다.

지르힐이 입술을 비틀었다.

“신체가 이렇다 해서 내가 약할 거라 생각해?”

-허세는 그만.

-오늘 오만한 관리자의 생명이 다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엔진이 있어도 타이어가 터지면 자동차는 달릴 수 없다. 지르힐의 권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망가진 성현의 신체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석상들의 주먹이 꽉 쥐였고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검은 연기가 흩뿌려졌다.

지르힐이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놈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창조주가 만들었다고 했지?”

-그렇다.

“창조주가 신경을 안 썼나 보네. 인간의 손에 셋이나 박살 났잖아?”

석상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들은 창조주가 빚어낸 문지기.

그런데 지르힐의 말대로 성현의 손에 셋이나 부서졌다.

“일대일로 하면, 지는 거 아냐? 8개가 일제히 달려들었으니, 나의 그대도 어쩔 수 없던 거고.”

석상들이 끌끌끌 웃었다.

-그래서, 너와 일대일로 싸우자고? 미안하지만, 우리는 네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저, 창조주의 뜻에 따라 이 문을 지킬 뿐.

지르힐이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턱, 등이 동굴 벽에 닿았다. 더 물러설 곳은 없다. 지르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일대일로 싸우면 질 수도 있다는 거지?”

석상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그저 지르힐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르힐의 몸이 사라졌다.

5개의 석상, 그 모든 주먹은 동굴 벽을 가격한 게 전부였다.

-어, 없어졌다.

-사라졌어.

-우리의 눈으로 좇지 못했어.

석상들의 눈이 커졌다. 성현의 신체는 분명 망가진 상태. 그 몸으로 지금 같은 속도를 낼 수 없다.

-어, 어떻게……?

순간, 뒤에서 지르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착각하는 것 같은데?”

석상들의 시선이 뒤로 틀어졌다.

지르힐이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서 있었다. 지르힐이 산책을 나온 것처럼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너희가 상대하는 것은 나의 그대가 아니야.”

-……!

“나와 싸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을 해 봐.”

지르힐, 태초의 시대에는 공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태초의 전쟁에서는 혼자의 힘으로 수만 명의 존재와 싸워 버텨 냈다. 그게 지르힐이다.

한쪽 팔만 사용할 수 있다 해서 그 권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릇으로 사용한 인간의 몸이 만신창이라 해서 압도적인 힘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존재들이 나를 왜 두려워하는지 떠올려 봐.”

-……!

“나 지르힐이야.”

지르힐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엄청나다. 석상들은 일제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보인다!

-느려!

그렇게 생각했다. 지르힐이 눈앞에서 또 사라지기 직전 까지는…….

꽈지지지직!

한 석상의 머리가 뽑혔다. 다른 석상들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일그러졌다. 이들은 지금 모든 마력을 살벌할 정도로 끌어 올린 상태였다. 하지만 지르힐의 움직임조차 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남은 4개의 석상이 분노를 내뱉었다. 지르힐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창조주에게 빚어진 것. 하지만 그 수준의 차이는 엄청났다.

“너희는 대충 만든 거야.”

지르힐의 목소리에 짜증과 질투를 느꼈다. 지르힐은 창조주를 부정했지만 석상들은 그 신앙심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르힐의 권능에 비하면 그들은 정말 벌레와 같다.

-믿고 따른 우리를 대충 만들었다고!

-그게 말이 되나!

동시에 지르힐은 또 다른 석상의 머리를 뽑았다.

꽈지지지직!

지르힐이 손에 쥔 석상 머리를 장난스럽게 흔들더니 툭 땅에 버렸다.

“말이 되냐니? 말이 되잖아? 고작 그 정도 힘을 갖고 까불었던 너희가 우스운 거야.”

남은 석상은 3개. 지르힐이 빙긋이 웃으며 그들을 향해 자박자박 걸었다.

석상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지르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힘의 차이를 알았다.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저항해 봤자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다 같이 죽자!

석상들이 서로 눈짓했다. 그러자 가장 중심에 있던 석상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솟구쳤다. 땅에 있던 돌이 떠올랐고 공기가 떨려 왔다.

-잠시면 된다. 지르힐을 막아라.

그 석상의 이름은 인드라, 놈은 자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은 좁은 동굴, 아무리 지르힐이라 해도 폭발의 피해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육신으로 싸우고 있는 이상 타격을 안 받는 게 이상한 거다.

-지르힐이라 해도 죽고 말 거다.

석상은 웃었다.

-지르힐, 대충 만들어진 것들과 함께 죽어라.

석상들은 동굴이 무너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었다. 이곳을 지키라는 게 창조주의 뜻이었으며 이곳은 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놈들은 자신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다. 창조주가 직접 만든 객체였지만 지르힐과 비교하면 그들의 신격은 파리보다 못하다.

조금이라도 비등했다면 자폭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지르힐은 다 망가진 인간의 신체를 그릇으로 사용하면서도 그들의 머리를 뽑았다. 그것도 눈으로 좇지 못할 속도였다. 권능은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석상에게는 분노로 다가왔다.

-용서할 수 없다!

자신을 인드라라고 소개한 석상의 몸에 불꽃이 휘감겼다. 단단한 돌로 이뤄진 피부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옆에 있던 두 개의 석상이 지르힐을 향해 달렸다.

-우리가 할 일은 인드라가 폭발할 때까지 지르힐을 막는 것.

-함께 죽자, 지르힐!

두두두두!

지르힐을 향해 내달린 석상이 공기를 찢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또 다른 석상이 지르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석상의 손에서 마력이 쏘아졌다.

꽈아아아앙!

지르힐의 앞에 선 석상 둘은 생각했다. 지르힐과 싸워 이길 수는 없어도 시간을 끌 수는 있다고. 물론 오랜 시간을 버틸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인드라라는 이름의 석상이 폭발하기까지 1초. 그때까지의 시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후우우웅!

놈들의 주먹과 마력이 무서울 정도로 지르힐을 향해 휘둘렸다. 주먹의 궤적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지르힐을 노렸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움직이며 지르힐의 머리를 부숴 버릴 것처럼 쏘아졌다.

쩌어어어엉!

쩌어어억!

꽈앙!

하지만 지르힐을 공격하던 석상들의 눈은 곧 사정없이 떨려왔다.

-어…… 없어.

지르힐이 앞에 없었다. 언제 사라졌는지 느낄 시간도 틈도 없었다.

-어, 어디……?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천진난만한 말투, 하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지옥의 악마보다 더 소름 끼칠 목소리.

“여기야.”

석상의 시선이 천천히 뒤로 틀어졌다.

지르힐이 인드라의 머리를 들고 서 있었다. 그것도 방긋 방긋 웃으면서.

-……!

자폭을 원했던 인드라의 계획은 실패했다. 인드라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면, 인드라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것 같다. 계획이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머리가 뽑힌 거다.

남은 두 석상의 몸이 파들파들 떨려 왔다. 어이없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컸다. 의지를 꺾기에 충분한 힘의 크기였다. 놈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다.

지르힐이 인드라의 머리를 툭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계속할까?”

* * *

성현이 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서아가 보였다.

“대, 대장…… 지르힐 님이…….”

“아, 봤어.”

성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상체를 세워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파괴된 석상의 모습이 보인다. 지르힐과 싸운 것들의 머리가 잔인하게 뽑혀 있다.

성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비틀 석상을 향해 다가갔다.

“곧장 창고로 오라고 했어요!”

이서아가 외쳤다. 성현의 몸은 치료가 우선이다. 창고로 이동해서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하지만 성현은 석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성현과 치열하게 싸운 것들, 지르힐의 앞에서 두부가 으깨지는 것처럼 연약하게 박살 난 것들.

“하…….”

성현이 한숨을 내뱉자 그 옆으로 이서아가 섰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르힐 님은 존재잖아요. 그것도 최초의 존재. 그러니까, 이것들이 상대가 될 수 없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에요. 대장이 이것들을 이기지 못했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이서아는 성현이 석상을 이기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고 생각했다. 성현의 목표는 플로르를 무릎 꿇리는 것, 석상조차 마음대로 이길 수 없었다는 게 충격 또는 자존심의 하락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은 이서아의 착각이었다.

“……강령술로 사용할 수 있겠지?”

“네?”

“이 정도면…… 전쟁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이 정도 신체면 마녀급 존재의 공격은 버틸 것 같은데. 몸빵용, 어때?”

“몸빵용이요?”

성현은 신이 나 있었다. 또 다른 전력이 손에 들어온 거다. 자존심? 그런 것은 없다. 놈들을 이기기 위해 성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성현은 곧장 오미로 베루스를 불렀다. 그리고 쓰러진 석상을 던전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야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 안.

기다리고 있던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를 보며 성현이 입을 열었다.

“묻지 마.”

-뭘?

“양피지나 회귀에 대한 것.”

-이미 다 들었다.

“그럼 더 묻지 마.”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안쓰럽게 성현을 바라봤다.

-알았다.

그렇게 치료가 끝난 후 성현은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쓰러져 있던 석상은 오미로 베루스에 의해 던전으로 이동한 뒤다.

그곳엔 이서아만 남아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야죠?”

“어.”

성현은 거침없이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성현의 무의식, 그 속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마법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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