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성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모습은 회귀 전과 다르지 않다.
동굴 내부는 벽에 붙은 횃불이 밝히고 있고 천장에는 고드름 같은 종유석이 빽빽하게 보였다.
그 모습이 장관처럼 느껴졌지만 성현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 성현이 바라보는 곳은 오직 하나. 정면에 있는 재단, 그곳에 있는 양피지였다.
성현은 뚜벅뚜벅 재단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 그 위에 섰다. 둘둘 말린 누런색의 양피지, 성현은 거침없이 양피지를 펼쳤다. 안에는 양피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창조주가 양피지를 왜 만들었는지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세상을 탓하는 자, 인생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자, 저질렀던 잘못을 바꾸려는 자, 너는 그날로 다시 돌아가리라. 네가 이곳에 왔음은 모두 나의 뜻이요 넌 나의 전언자이니, 난 너를 통해 내가 원했던 진정한 세상을 펼치는 것이요 길고 어두운 아픔을 이겨 내리라.
창조주는 양피지를 만들었다. 이 양피지를 통해 시간이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성현과 이서아는 양피지를 이용해 시간을 돌렸다.
‘그런데…….’
지금의 양피지에도 회귀 전과 똑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성현이 양피지를 들어 올리며 슬쩍 웃었다.
‘쏘리.’
성현은 양피지를 통해 시간을 되돌릴 생각이 없다. 오직 양피지에 담긴 마력만 흡수할 계획이다.
‘창조주의 뜻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창조주는 양피지를 통해 시간을 되돌리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성현의 손에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그 힘이 곧 성현의 몸을 휘감으며 솟구쳐 올랐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성현의 몸을 빙빙 두르고 있는 마력이 꼭 뱀과 같다.
성현의 손이 천천히 양피지를 향해 이동했다. 마력이 꿀렁거리며 양피지를 향해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마치 양피지를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 * *
그 시각, 마법사가 몸을 일으켰다. 손을 하늘로 뻗치자 그 몸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후우우웅!
성현의 무의식, 그곳에 있는 모든 마력이 용암처럼 뽀글뽀글 기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다.’
마법사의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
‘시간을 되돌리고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든다.’
마법사의 눈빛은 절실했다. 마법사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로안과 게히얼을 죽였어야 했다.’
여신과 남신, 그들은 생명체의 욕구를 내버려 뒀다. 그 탐욕을 모른 체하며 생명체의 싸움을 방관했다.
‘모든 존재를 살려 둬서는 안 됐다.’
보글보글 끓던 마력이 마법사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것이 옷이 된 것처럼 마법사의 몸에 달라붙었다.
‘미안하다, 유성현. 미안하다, 지르힐.’
마법사는 성현의 의식을 차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 돼!”
지르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지르힐은 성현의 무의식으로 들어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이미 그에 대한 방비를 해 둔 상태였다. 지르힐은 들어올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서 달라질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넌 모든 존재를 죽일 수 없어! 그놈들에게 비참하게 죽고 말 거다. 같은 일이 벌어질 테고 그놈들은 또 에느가인을 노릴 거야!”
“아니, 달라질 거야.”
“마법사, 너 혼자 모든 존재를 이길 수 없어! 로안과 게히얼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거기에 나까지 너를 막아서면…….”
마법사가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유리 벽 같은 것에 막혀 있는 지르힐을 미안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르힐, 넌…… 자식이 없어 봐서 몰라. 불꽃에 타 죽던 그 모습이 쉬지 않고 떠올라. 내 자식의 살이 녹아내렸던 아픔이 이 심장에 전해져. 모든 것을 죽이고 싶다. 억겁의 시간이 지났어도 이 분노를 삭일 수 없다!”
“플로르잖아! 플로르에게 복수하면…….”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계획은 플로르가 세웠지. 그런데, 내 아내와 자식이 타 죽을 때 방관하던 놈들. 그 옆에 서서 구경하던 놈들, 자신들이 관리자에게 심판을 내렸다고 기뻐하던 놈들……. 껄껄 웃으며 이죽거리던 로안과 게히얼!”
“…….”
“그래, 나와 내 아내는 잘못이 있다고 치자. 창조주의 룰을 어기고 관리자와 생명체가 사랑을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어린것은 무슨 잘못이 있지?”
“…….”
“지르힐…… 망령이 된 나로서는 플로르를 이기기 어렵고 한쪽 팔만 있는 너로서도 플로르를 이기기 어렵다. 내가 시간을 과거로 돌려 모든 것을 되돌려 놓겠다.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미안하다.”
마법사가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성현의 의식을 차지하는 것, 성현과 계약하지 않은 마법사는 성현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는 자신의 모든 마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자신의 마력으로 성현의 의식을 부수고 그 신체를 차지하려 한다.
그리고 양피지를 사용해 시간을 과거로 돌릴 거다. 태초의 시간,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던 그 옛날, 그 시간으로…….
그때였다.
“살아 있다.”
“…….”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지르힐의 외침에 마법사의 걸음이 멎었다. 그리고 지르힐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으며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카심의 아들. 그 꼬마가 정보 상인을 하고 있어.”
“그런데?”
“플로르가 네 아들을 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리관에 가둬 둔 채, 어떤 의식도 없이 생명만 연장하고 있다고.”
마법사가 입술을 씹었다.
“그런 거짓말로 시간을 끌려 하지 마.”
지금 성현은 양피지를 손에 든 상태였다. 마력을 흡수할 준비를 마쳤고 조금 있으면 양피지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을 잃어버릴 게 분명하다. 마법사는 지르힐이 시간을 끈다고 생각했다.
지르힐이 양팔을 벌리며 간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마법사, 내 눈을 봐.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나?”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지르힐을 살폈다.
“사, 사실이라고?”
“……그래.”
마법사의 눈빛이 미쳤다. 지르힐을 죽일 것처럼 노려본다. 그리고 마력으로 만든 유리 벽 앞으로 다가가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왜 지금 하는 거지! 살아 있다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숨기고 있던 거야!”
마법사가 분노했다. 마법사의 주먹이 유리 벽을 쾅, 쾅 쳤다. 그때마다 마력으로 만든 유리 벽에 쩍쩍 금이 갔다.
“놀리고 있었나?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었어?”
마법사의 목소리에는 설움이 가득했고 지르힐은 마법사를 위로하려 했다.
“마법사, 난 네가 흥분할 거라 생각했다. 앞뒤 보지 않고 복수를 계획할 거라 여겼다. 그래서…… 언젠가는 플로르의 성을 무너뜨리고 아들을 찾아 주려 했다.”
“거짓말하지 마!”
쩌어어엉!
유리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법사가 지르힐의 목을 콱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지르힐은 허상이다. 마법사의 손이 지르힐을 통과했다. 마법사는 아무것도 쥘 수 없는 자신의 손을 보며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르힐의 앞에 허리를 굽히며 짐승같은 설움을 터뜨렸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플로르를 찾아갔어야지! 그리고 구해 줬어야지! 그 어린것이 그곳에 갇혀 어떻게 지낼지…….”
“마법사…… 창조주의 관리자로서, 너의 오랜 벗으로서 약속한다. 네가 아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 네 아들의 상처를 내 모든 권능을 사용해서라도 보듬어 주겠다.”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르힐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 시간을 되돌리는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 시간을 되돌린다 해서 변하는 것은 없을 거다. 어쩌면 더 끔찍한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과거가 아닌 지금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것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 * *
성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무의식의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을 예상했다.
마법사가 뭔 짓을 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성현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르힐을 믿기 때문이다. 지르힐은 어떤 순간에도 마법사를 막을 거다.
“제가 옆에 있을게요.”
이서아의 목소리에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피지에 담긴 마력은 엄청나다. 그 마력을 흡수하는 동안 성현은 무방비 상태가 될 거다. 그사이 이곳에 적이 나타나면 성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당할 게 분명하다. 옆에 서서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다.
“땡큐.”
성현은 이서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이서아로는 부족하다. 이서아의 전투 능력은 보통의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약할 수도 있다.
“오미로 베루스.”
성현의 목소리에 오미로 베루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안광에서 금빛을 내뿜으며 성현의 앞을 지켜 섰다.
“이서아의 지시를 받아 나를 지켜라.”
오미로 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성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양피지를 움켜쥐었다.
‘담긴 모든 마력을 흡수한다.’
창조주가 직접 만든 아이템. 그것도 억겁의 시간이라도 되돌릴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권능. 그 마력이 성현의 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성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핏줄이 툭툭 솟아오름과 동시에 피부가 검게 변했다. 사지가 뒤틀리고 머리카락이 숭숭 빠졌다. 꽉 다문 치아가 빠드드득 소리와 함께 박살 났다. 그 사이로 고통을 참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끄아아아아악!”
그 시각, 성현의 무의식, 그 공간에 서 있던 지르힐과 마법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소리와 함께 검은 마력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지르힐의 환영이 그 마력을 버티지 못한 채 스르르륵 사라졌다. 마법사의 망령이 촛농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대!”
성현의 무의식에서 빠져나온 지르힐이 성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성현의 고통만이 신음이 되어 들려올 뿐이다.
-끄아아아압!
지르힐이 눈을 감았다.
“버텨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 없구나…….”
하지만 성현의 신음 소리가 뚝 끊겼다. 의식을 잃은 거다. 고통에 익숙한 성현이지만 양피지의 마력을 견디는 것은 고작 몇 초도 되지 않았다.
“그대!”
지르힐이 다시 성현을 불렀다.
의식을 잃으면 위험하다.
통제를 잃은 마력은 성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다.
* * *
그런데 성현은 의식을 잃은 게 아니었다.
어떤 존재의 강력한 힘에 의해 의식이 이동된 거다.
이곳은 숲, 푸른 잎사귀가 바람에 흩날리는 곳. 치열했던 전투를 잊을 정도로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곳에 뒷짐을 진 채 언덕 아래의 냇가를 지켜보는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성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한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