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성현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노인의 권능을 본 것이 아니다. 자기소개를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현은 노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차, 창조주?”
이야기에서 보았던 신선 같은 이미지,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어루만지는 노인, 그는 창조주였다.
“난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게지? 양피지를 찢은 것.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노인을 살필 뿐이다.
그런데 노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극단적일 정도로 무심한 눈빛, 세상 전체를 손가락 하나로 짓누를 것 같은 위압감을 느낀 게 전부다.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것은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선과 악이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초월했으며, 욕망이라는 게 없다.
성현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긴장을 이겨 내며 물었다.
“양피지를 왜 만든 거죠?”
“그건 나의 배려였다. 잘못을 저지른 내 피조물에 대한 배려. 기회를 다시 주려 한 거다.”
“……배려?”
“넌 이미 기회를 한 번 얻었고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손에 쥘 특혜가 주어졌다. 그런데 왜 버린 거냐?”
노인이 성현의 앞에 섰다. 그 순간 노인의 몸이 먼지처럼 사라지더니 검은 구체로 변했다. 그 구체가 점점 커진다. 달보다, 지구보다 그리고 태양보다 더 큰 모습이 되었다.
그 앞에 선 성현은 먼지보다 못한 존재였다. 거대한 마력의 앞에서 성현은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난 세상을 만들었고 너희에게 생각의 자유를 줬다. 플로르가 룰을 따르지 않은 것, 마법사가 사랑을 한 것, 그 모든 것 역시 생각의 자유라 여기며 너희들을 내버려 뒀다.”
“……!”
“그리고 잘못을 반성할 수 있는 양피지와 세상을 움직일 에느가인을 너희의 옆에 건넸다. 그것 역시 너희에게 생각의 자유를 준 것이다.”
“…….”
“그래서 그 누구보다 양피지의 힘을 잘 알고 있는 네가 왜 양피지를 찢었는지 묻고 있는 거다.”
성현이 입술을 씹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끌끌끌 웃었다.
“생각의 자유?”
“그래.”
“플로르라는 강자의 앞에서 약자의 생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플로르 같은 강자의 탐욕 앞에 약자는 먹잇감이 되는 것인데, 생각의 자유?”
“그것도 너희의 선택이었다.”
성현이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이제 긴장된 모습은 없었다. 상대가 창조주라 해도 싸울 것 같은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양피지를 찢은 것도 내 자유다.”
“……!”
“시간을 되돌렸고 지금까지 죽을 것처럼 뛰었지만, 아직도 플로르의 발끝에 미치지 못했다. 과거로 되돌린다 해서 더 바뀌는 게 있을까? 지금 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
“막을 테면, 막아 봐라.”
성현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그런데 검은 구체로 변한 창조주는 분노하지 않았다. 성현이 반말을 지껄였지만, 처음과 똑같이 성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 목표는 오로지 플로르인 게냐?”
“지금은.”
창조주가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구체가 거대한 눈동자로 변하더니 성현을 바라봤다.
“그래, 네 자유도 존중해 주마.”
“……!”
그 말을 끝으로 거대한 눈동자가 성현을 덮쳤다. 다시 검은 구체가 되어 꿈틀거렸다.
태양보다 더 큰 구체에 휩쓸린 성현은 끝없는 공간에 빨려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아니, 깊은 바다에 빠진 것 같았다.
그곳은 그저 마력만 존재했다. 사방이 마력이다. 위도 아래도 양옆도.
그 마력이 바닷물이 삼켜지듯 성현의 입으로 쑤셔 들어갔다.
“컥!”
마력이 기도를 막으며 성현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삼켜라.
창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셔라. 내 일부를 너에게 담아라.
성현은 알았다. 지금 본 창조주는 창조주가 아니었다. 창조주가 양피지에 남긴 힘. 양피지가 찢어지고 성현이 그 마력을 흡수하며 보게 된 환영.
하지만 그 환영에도 창조주의 의지는 담겨 있었다.
-환영의 말대로 난 생명체에게 살아갈 자유를 주었다. 그 모든 선택을 존중했다.
“……!”
그 순간, 성현의 눈앞에 태초의 전쟁이 보였다.
수만 명의 존재들이 지르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지르힐 홀로 수만 명의 존재를 상대로 싸우는 그 처절함.
바다 위로 번개가 쏟아졌고 바다는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 실망시켰다. 자유의 의지를 욕망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없애려 했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죄를 지었던 존재는 그들의 성에 갇혔다. 아름답던 세상은 척박한 사막으로 변했다.
-반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존재는 반성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 탐욕을 이기지 못한 채 창조주와 같은 힘을 얻고자 갈망하고 있다.
-너에게 약간의 힘을 주마. 네가 나의 대리자가 되어 플로르와 그 존재들에게 심판을 내려라.
성현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왜…… 직접 하지 않고!’
그 생각을 창조주의 환영이 읽었다. 창조주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 아직은 너희의 힘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의 생각과 행동은 자유다.
그 말은 성현이 심판자라는 이름으로 패배할 수도 있다는 뜻.
그렇다 해도 창조주는 방관하겠다는 것.
성현에게는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존재보다 더 이기적인 존재.
지금 성현은 창조주가 더 그렇다고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하나. 네가 내가 준 힘을 온전히 사용하려면, 인간임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것 역시 너의 선택, 너의 자유이니라.
성현은 검은 구체의 중심으로 더욱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 *
이서아는 성현의 앞에 무릎 꿇은 채 어디에 있을지 모를 창조주를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성현의 옷이 이미 다 녹았다. 살도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뼈가 보일 정도다.
각 관절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고 귓구멍과 콧구멍, 땀구멍에서 쉬지 않고 검은 물이 줄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은 물은 그동안 성현의 몸에 쌓여 있었던, 좋지 않은 것들이다. 동굴 내부에 악취가 가득했다.
이서아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제발…….”
그때 성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였다. 순간 이서아는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기도하던 이서아가 시선을 들었다.
‘뭐지?’
갑자기 추워진 것은 무엇인가의 권능이 피어올랐다는 거다.
‘……습격?’
이서아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미로 베루스가 옆에 우뚝 서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없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온도가 내려간 것은 분명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의 권능을 가진 것들도 있다.
게다가 이곳은 양피지를 보관하는 동굴이다. 창조주가 빚었다는 8개의 석상들이 있었다. 무엇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이서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품을 뒤졌다. 날카로운 단도를 손에 쥔 뒤 오미로 베루스에게 지시했다.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하지 말고 대장을 지켜. 알았지?”
-크르르르.
오미로 베루스가 끄덕이는 것을 보며 이서아는 자세를 낮췄다.
이서아에게 전투적인 능력은 없다. 소멸의 바다에 있었을 때의 권능은 이곳으로 이동하며 모두 사라진 상태다.
하지만 이서아는 필사적으로 성현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어마? 그걸로 날 죽일 거야?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이서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야. 여기!
천연덕스러운 말투.
이서아는 그 소리를 좇아 시선을 움직였다.
성현의 손가락이었다.
그곳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크기는 약 3cm 정도.
이서아는 그 소녀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정령?”
-날 이 손가락에서 빼 줘. 그리고 네 손가락에 끼워 줘.
“……어?”
-이 사람한테는 강한 권능이 있어. 그래서 난 계속 피로해지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어. 조금만 일어나려 해도 파직 파직 하거든.
이서아는 정령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되는 것은 있었다.
성현의 계약 존재는 지르힐, 그 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엄청난 마력이 몸을 뒤덮는다.
정령은 그게 싫었던 거다.
몸을 일으켜 반지에 선 정령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약하네. 그래서 마음에 들어.
이서아는 정령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그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은 멍청한 거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줄게.
정령이 이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너와 계약할게.
정령의 손에서 푸른 마력이 일렁였다.
-난 물의 정령. 처음부터 세상에 스며 있던 기운. 존재의 권능과 비교하지 마. 네가 나와 계약하면, 유성현은 더 큰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전기와 물. 괜찮은 상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정령이 방긋 웃었다.
하지만 이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대장이 일어나면, 물어보고 할…….”
그 순간, 이서아는 눈앞을 스치는 미래를 봤다.
이서아가 손을 하늘로 뻗치자 세상에 비가 내렸고 성현이 그 앞으로 돌격하며 번개를 뿌려 대는 미래.
존재들의 비에 젖은 몸이 번개에 휘감겨 타 죽어 가는 것.
이서아가 정령과 계약하면 성현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성현은 먹구름을 끌고 오는 것으로 마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서아의 시선이 정령에게 향했다.
-어서.
정령의 변덕은 심각하다고 들었다. 지금 계약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게다가 이서아는 미래를 봤다. 성현의 도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서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반지가 스르륵 뽑혀 나와 이서아의 검지로 이동했다. 그곳에 선 정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선택 했어. 난 이제 너와 계약하였고 네가 죽는 날까지, 네 옆에 있겠노라.
“하나만 물을게, 왜…… 계약을 하려는 거지? 정령은 이쪽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 들었는데.”
-사막으로 변한 세상에 다시 꽃을 피우려면, 존재를 죽여야 하지. 그뿐이야.
이계는 메마른 사막으로 뒤덮여 있다. 창조주의 저주를 받아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렵다. 정령들이 살 곳은 극히 일부가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제 존재를 몰아내고 사막에 꽃을 피우려 한다.
그때였다.
“쿨럭!”
성현이 검은 피를 쏟아 냈다. 이서아가 다급히 시선을 틀어 성현을 바라봤다.
성현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뒤틀어졌던 관절이 바르게 이어졌고 새로 돋아난 피부는 마치 갓난아기처럼 깨끗했다.
“대장!”
이서아가 반갑게 외쳤다.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뻗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내 가방에서 옷 좀 줄래?”
“아, 네.”
이서아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성현의 옷은 마력의 열기에 녹아 버렸다. 완벽한 알몸으로 앉아 있다.
“여, 여기요.”
“땡큐.”
성현이 옷을 입고 나서야 이서아가 다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성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흡수는 성공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