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썩 좋은 표정은 아니다.
이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성현이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가벼운 동작에도 검은 마력이 연기처럼 피어났다 사라졌다.
“흡수는 했는데, 계속 빠져나가고 있어.”
“…….네? 빠져나간다고요?”
성현은 인간이다. 양피지에 있던 거대한 마력을 담을 그릇이 아니다. 마력은 넘쳤고 거센 빗줄기에 댐을 연 것처럼 엄청난 양의 마력이 실시간으로 빠져나가는 중이다.
이서아의 걱정으로 가득한 표정을 보던 성현의 눈동자가 그녀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검지에 있는 반지.
“정령이 그쪽으로 갔나?”
“네. 허락 없이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본 미래에서…….”
“괜찮아. 매번 자는 것 같더니 네 손에서는 평온해 보이네.”
성현이 다시 가부좌를 틀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3분만, 더 지켜 줄래?”
성현은 이서아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이서아라면 어떤 경우에도 성현을 지켜 줄 거란 믿음이 있어서다.
* * *
성현은 무의식의 세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마법사와 마주했다. 마법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성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제법…… 강해졌어.”
“나모르 좀 불러 줘.”
소멸의 바다에 있을 때, 매일같이 했던 수련이 있다. 나모르와 싸우고 또 싸우고.
당시 성현은 나모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대 때리는 게 전부였다. 성에서 인간의 힘으로 군주를 가격한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성현은 만족할 수 없었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나모르를 상대하면 알 것 같아서.”
“불러 주지.”
마법사도 궁금했다. 곧바로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그러자 성현의 앞에 나모르가 나타났다.
성현이 천천히 나모르를 살피며 숨을 내뱉었다.
나모르의 성에서 놈을 죽일 때, 당시 성현은 마법사의 도움을 받았었다. 마법사는 나모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말 그대로 박살을 냈다.
하지만 소멸의 바다에서 싸웠던 성현은 나모르에게 일방적으로 짓밟혔다. 나모르는 군주 중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존재였지만 그게 인간과 군주의 차이였다.
“지금 불러낸 나모르는 소멸의 바다에서 싸웠던 놈보다 몇 배는 강해. 이 몸의 마력을 사용해서 최대한 본체에 가깝게 만들어 냈거든.”
마법사가 뒷짐을 진 채 한 걸음 물러서며 설명을 이어 갔다.
“앞의 상대는 이계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그 나모르다. 아무리 약하다 해도 군주다. 저놈조차 이기지 못하면 플로르의 앞에 서는 순간 1초도 버티지 못한 채 타 죽고 말 거야.”
“…….”
“가장 약한 군주를 쓰러트려라. 그럼 지르힐이 기대하는 네놈의 가능성을 나도 조금은 인정하겠다.”
동시에 나모르가 성현을 향해 먼저 공격하라고 손짓했다. 그 손짓에 휙, 휙 거센 바람이 불어올 정도였다.
성현이 슬쩍 웃었다.
“예전에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해볼 만하겠네.”
성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모르가 확 부풀어 올랐다. 수십 미터의 거인처럼 커지며 몸에 붙은 근육이 단단하게 보였다.
하지만 성현은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그대로 나모르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나모르가 포효했다.
-죽인다!
나모르는 성현이 흡수한 마력과 마법사의 마력을 더해 만들어진 환영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가진 권능은 다르지 않았다.
나모르가 팔을 양쪽으로 펼쳤다. 그 옆으로 검은 우주가 보였다.
“……!”
성현이 당황한 사이 그 우주가 성현을 빨아들였다. 보이는 것은 곧 사방이 우주다. 수많은 별들이 빠르게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었다.
‘뭐지?’
성현이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별, 행성과 위성 우주를 떠도는 운석. 그 하나, 하나가 강력하다. 지구에 부딪친다면,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또 한 번 멸종의 시대를 맞이할 거다. 그것들이 성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모르가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동시에 그 강력한 것들이 성현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우주에 굉음이 들려왔다.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성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마력이 일렁였다. 그 마력이 빠르게 회전하더니 별만큼 커졌다.
‘와라!’
그 마력이 쏘아졌다.
다가오는 별과 부딪쳤고 별은 폭발했다.
쾅! 쾅! 쾅!
거대한 돌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들이 운석이 되어 다시 성현을 공격했다. 성현은 계속해서 팔을 움직이며 방어했다.
콰콰콰쾅!
별이 폭발하는 충격파가 우주를 울렸다. 공간이 으깨지듯이 파열하며 블랙홀이 만들어지더니 그 안에서 검은 손이 수천수만 개가 튀어나왔다.
‘……!’
성현은 허공을 밟고 튀어 오르며 손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그 손이 성현의 발목을 잡았다. 동시에 성현이 마력을 쏘았다.
손이 ‘퍽!’ 소리와 함께 터졌다. 손이 터져 남은 것은 손목, 그곳에서 뱀 같은 촉수가 수천 개 뻗어 나와 대가리를 흔들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성현의 몸을 휘감았다.
* * *
나모르와 성현의 싸움을 지켜보던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인간일 뿐이야.’
성현은 우주에서 싸우는 중이다. 블랙홀에서 튀어나온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보는 것은 다르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성현과 그 앞으로 다가서는 나모르였다.
‘환각에 당했어.’
마법사가 시선을 틀어 주변을 살폈다. 짙은 농도의 마력, 성현이 양피지에서 흡수한 그것이 무의식을 가득 채우다 못해 철철 넘치는 중이었다.
‘이 정도의 마력이 있어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정신력과 신체로 플로르를 상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였어.’
성현은 완벽히 나모르의 환각 능력에 지배당했다. 멍한 눈동자를 보면 그곳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른 채 그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정신이 지배를 당한 이상…… 유성현은 나모르를 이길 수 없어.’
거대한 황소가 인간의 손에 이끌려 풀을 뜯으러 간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가 인간의 지시에 재주를 부린다.
그 모든 게 정신을 지배당해서다.
마법사가 성현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지르힐 듣고 있지? 이게 인간의 한계다. 난 이놈을 통해 플로르의 성에 가고 싶지만, 그곳에서 내 아들을 구해 내고 싶지만…… 이 정도로는 어려워.”
마법사가 걸음을 멈춘 뒤 다시 짙은 농도의 마력을 바라봤다.
“양피지의 마력을 흡수했을 때는 조금 기대했다. 어쩌면…… 플로르를 이길 수는 없어도 그 성에 도착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지.”
마법사의 시선이 다시 성현과 나모르에게 틀어졌다.
“그런데 고작 나모르 따위에게도 정신을 지배당했어. 이러면 나모르의 신자와 다를 게 없어.”
나모르의 성, 그곳에서 나모르의 신자들은 모두 “영생!”을 외치며 돌아다녔다. 그 모든 게 나모르에게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강한 파리와, 약한 파리……. 하지만 우리가 볼 때는 똑같은 파리야. 똑같은 인간이고.”
마법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르힐, 난 확신했다. 유성현은 플로르를 이길 수 없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성현을 향해 다가서던 나모르의 입에서 검은 피가 토해졌다.
-쿨럭!
그러더니 나모르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마법사의 부릅뜬 눈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 설마…….”
분명 성현은 나모르의 정신력에 지배당했다.
지구에 있는 인간이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지배당한 정신은 그곳이 사실이라 생각하며 벗어날 수 없다. 그곳의 주인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으로 나모르가 괴로워하는 중이다.
심지어 나모르가 무릎까지 꿇었다. 듣기 거북할 정도의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끄어어어어!
그리고 그 신체가 흔들거리더니 ‘퍽!’ 소리와 함께 나모르의 머리가 폭발했다. 핏줄기와 함께 뇌수가 비산했다. 그것들이 마법사의 얼굴에 튀었다. 나모르의 환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게…….”
마법사는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얼굴에 튄 핏덩이와 뇌수가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닦아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황당한 눈으로 성현을 지켜볼 뿐이다.
“……가능하다고?”
마법사 역시 오랜 시간 성현을 지켜봤다. 인간치고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죽음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 그 모습은 충분히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인간에게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여겼다.
“이 새끼는 미쳤어.”
나모르가 약하다 해도 군주다. 환영이라 해도 그 권능을 비슷하게 설정했다. 그 군주의 정신 지배를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살이 찢어지고, 손톱과 발톱이 으깨지며 그 상처 위에 소금이 뿌려지는 고통을 감내했어야 한다.
그런데 성현은 해냈다.
“가능할 수도 있어…….”
마법사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걸렸다.
“지르힐…… 나도 이놈을 믿어 보겠다.”
그리고 성현의 눈동자에 천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 있는 나모르를 바라봤다. 나모르는 어느새 성현만큼 작아졌고 머리가 사라진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간이 군주를 이긴 거다. 마법사나 지르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성현의 얼굴에 승리에 대한 기쁨은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했다. 천천히 마법사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약하네.”
“……!”
* * *
쾅! 쾅! 쾅!
이계의 사막에 마력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방으로 모래가 튀고 비명 소리가 이어진다.
이곳은 플로르의 군대와 그리피네의 군대가 싸우는 곳.
마인과 마녀의 팔이 허공에 치솟았고 바닥에는 얼굴이 굴러다녔다. 밤이 되면 흘러내린 내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흘렀다.
역겨운 피 냄새, 듣고 싶지 않은 비명 소리, 하지만 누구 하나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병장기를 휘두르고 상대를 죽이려 했다.
밀리는 것은 그리피네 측이었다. 플로르의 군대가 처음에는 조금 밀렸지만 곧 그리피네를 압도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유르라헬의 성까지 진격한다!”
둥둥둥!
뿌우우우우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북과 나팔 소리가 사막을 울렸다. 플로르의 군대가 더 빠르게 앞을 향해 진격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성현과 이서아가 서 있었다.
이서아가 반지에 물을 뿌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봐도…… 엄청난데요? 저거 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어.”
성현이 대답하며 슬쩍 웃었다. 성현은 놈들이 더 치열하게 싸우기를 바라며 더 많은 사체가 사막을 채우기를 훤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성현의 종이 될 거다. 저들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