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 * *
하늘이 검게 변했다. 먹구름이 채워진 게 아니다. 하늘을 수놓은 것은 수백만 발의 화살이다.
파파파팍!
화살이 땅으로 쏟아지며 짐승의 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렸다. 땅에 박힌 화살은 촉수로 변해 짐승과 마인의 다리를 휘감았다. 머리까지 타고 올라간 촉수가 포탄처럼 터진다.
쾅! 쾅! 쾅!
핏물과 으깨진 뼛가루가 사방으로 튀며 그리피네의 병력은 비명을 질렀다.
사막을 채우고 있던 그리피네의 병력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지휘관이 입술을 씹었다.
완패다. 병력의 5분의 1이 괴멸되었고 살아남은 놈들도 사기가 땅에 곤두박질 쳤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성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근 채 싸우는 게 최선이다.
“퇴각한다!”
지휘관의 목소리에 나팔수들이 나팔을 입에 대고 바람을 불어 넣었다.
뿌우우우!
퇴각 명령!
“모두 좌측으로 달려라! 살아남아라! 우리는 성으로 돌아간다!”
그 말에 그리피네의 병력들이 일제히 몸을 틀었다.
그런데 사막의 지평선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먼지가 일고 있다.
그 먼지가 곧 모래 폭풍처럼 보인다.
이어서 두두두두, 뭔가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이 사막의 좌우, 끝과 끝을 가득 채운 채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점차 가까워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짐승의 대군.
가장 앞에 있는 코끼리, 그 머리 위에 플로르의 딸 다섯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
지휘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플로르의 딸은 그 하나하나가 귀족급을 압도한다. 저들이 대군을 몰고 이 싸움에 가세한 이상 미래는 뻔하다.
“포, 포위됐습니다!”
지휘관이 세차게 입을 닫았다. 그 입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이 개 같은 것들!”
이제 방법은 없다. 그저 싸워야 한다. 싸워 이긴 후 저들을 뚫고 지나는 수밖에 없다.
“살아라! 살아야 한다!”
성현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양피지를 흡수하며 봤던 창조주의 힘을 떠올렸다.
창조주의 힘은 말했었다.
-난 생명체에게 살아갈 자유를 주었다. 그 모든 선택을 존중했다.
성현이 어이없다는 듯 끌끌 웃었다.
‘저것도 자유의 의지인가?’
끌려온 마인들, 죽어 가는 마녀들, 지시를 받아 죽음의 늪으로 달려가는 짐승들.
이유도 모르고 싸워야 하는 자들.
저들에게 자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싸우는 거다.
플로르가 시켰고 그리피네가 전장의 최전선으로 보냈으니까.
성현이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언젠가 마법사의 호칭을 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생명체는 싸웠고 서로를 죽였으며 바닥에 피를 흘렸었다.
그때 하늘에 남신 게히얼과 여신 로안이 마주 앉아 그 싸움을 지켜봤었다.
그저 재미.
낄낄대며 웃던 모습.
‘강자는…….’
강자는 세상을 지배한다. 그들을 앞에 세운 채 죽어 간 자의 몸뚱이를 고기로 삼고 그 피를 술에 받아 마신다.
‘약자는…….’
그들에게 지배받는다.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음에도 그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와 목이 베여 죽는다.
‘하지만…….’
강자는 죽지 않는다. 모든 이의 시체가 산이 되어 썩은 내가 진동해도 그들은 낄낄대며 웃고 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존재란 놈들도 다르지 않다.
‘마음에 안 들어.’
성현이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틀었다.
‘이제 너희가 비명을 지를 차례다.’
* * *
플로르는 웃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야.’
그리피네는 평화에 찌들어 살았다.
군대를 훈련시키지 않았고 그저 제 잘난 맛에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싸움이 될 리가 없어.’
그 결과가 이거다.
놈들은 가벼운 화살에도 우왕좌왕 죽어 갔다. 개개인의 싸움은 강할지 몰라도 대군과 대군의 싸움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약했다.
플로르가 다리를 외로 꼬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영상을 지켜보며 술잔을 손에 쥐었다.
“그리피네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플로르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 고고한 척하는 그리피네가 발발 떨며 절하는 모습. 어떤 존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한 적 없던 그리피네가 공물을 싸 들고 살려 달라 애원하는 모습.
플로르가 붉은 입술로 아름답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신경 쓸 것은 이제 없다.”
그리피네와 플로르는 존재의 세상을 양분하고 있었다.
물론 존재의 세상은 넓다.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많은 존재가 별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세력이 없다. 대다수는 영원한 시간을 홀로 지내는 중이다. 즉, 그리피네가 무너지면 플로르가 신경 쓸 것은 확실히 줄어든다. 존재의 세상, 그 최상위 먹이사슬에 플로르가 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에느가인에 집중한다.”
“네!”
“그리고 올리비아?”
플로르가 그녀의 딸 올리비아를 불렀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플로르의 앞에 섰다.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인간들을 지배할 준비를 하라.”
“……!”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신하들의 눈에도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플로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아기 공장을 만들어라. 낳고 또 낳고…… 매달 보름에 아기가 태어나도록 준비하라.”
이제 인간은 아기를 생산해야 한다. 그것도 보름에 맞춰야 한다. 누군가는 고통을 참으며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강제로 아이를 끄집어내야 할 거다.
에느가인이 나타날 때까지 좁은 철망에 갇힌 채 출산만 반복하는 신세. 아기가 태어나면 젖도 물릴 수 없다. 그 아기는 곧바로 목이 잘린 채 그 피를 받쳐야 할 것이다.
“불쌍하다 생각은 말라. 놈들도 애완견을 키운다며 똑같은 짓을 했으니까.”
“……!”
“방해하는 군주나 존재가 있다면, 그들의 땅 역시 초토화될 것이라 일러라. 그래야 우리가 이 척박한 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게다.”
플로르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피네를 손에 얻기 직전이다. 그녀가 들어온다면, 그리고 그녀를 최전선에 세운다면 그 어떤 존재도 플로르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플로르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내 그릇은 어찌 되고 있느냐?”
플로르는 지연우의 시체를 가져왔다. 그 시체를 꿰매고 치료하며 그릇으로 사용할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 담당을 맡은 신하가 앞으로 나왔다.
“30% 정도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워낙 깊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신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플로르의 성격은 급하다. 지시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30%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낼게 분명했다.
그런데 플로르는 예상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눈엣가시 같은 그리피네가 벌레처럼 살아갈 날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계속하라.”
* * *
그 시각, 그리피네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손톱을 깨물며 초조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봤다.
거울 안으로 전장이 보인다.
자신의 아들, 딸이 플로르의 군대 앞에 죽어 가고 있다.
머리가 잘리고, 입이 찢기며 팔과 다리가 허공에 치솟는 중이다.
“왜…… 밀리느냐?”
그리피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식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 하찮게 여기던 플로르에게 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왜 밀리고 있느냐!”
그리피네의 목소리가 쩌렁하고 울렸다.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발발 떨며 허리를 굽힐 뿐이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조아려야 했다.
그러자 그리피네가 몸을 일으켰다.
“저놈은 왜 퇴각을 명령하느냐!”
그리피네는 지휘관의 퇴각 신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감한 전사는 싸워 죽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피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원 병력을 보내라. 사막에서 죽으라 하라.”
그리피네의 목소리가 하달되었다. 신하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추가 병력을 보내면 성이 빈다. 적어도 성을 지키는 병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그리피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떼지 못했다.
“어서! 내가 플로르 따위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되겠느냐!”
그리피네의 의지는 확고했고 그들은 그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부속품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피네의 성문 앞에 병력들이 모였다. 그들이 전장을 향해 이동했다.
* * *
그리고 그날은 어둠이 세상을 채운 밤이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별과 달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것조차도 볼 수 없었다.
플로르와 그리피네의 대군도 오늘 밤은 적막했다. 자칫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어서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동이 틀 무렵 시작될 싸움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곳에 성현과 이창민 중사가 섰다.
“다 보낼 수 있겠어요?”
성현이 사체를 둘러보며 입을 열자 이창민 중사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 마력으로 힘들 것 같은데…….”
사방에 깔린 게 사체다.
얼핏 봐도 1만은 넘어 보인다.
“회복제는 충분해요.”
성현이 보스턴백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 안에 회복제가 가득하다.
“하…….”
이창민 중사는 고개를 저었다.
물건을 이동시키는 것은 상당한 마력이 소모된다. 그런데 작은 물건도 아니고 거대한 짐승과 존재, 그 사체. 그것도 무수히 많다. 그런데 성현은 재촉하고 있다.
“그것도 2시간 안으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현의 무리한 부탁에 이창민 중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놈이 이제 고참한테 막노동을 시키려 하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플로르의 군대가 그리피네의 성으로 진격할 거예요.”
성현은 회귀 전 봤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은 당시와 똑같다. 그리피네의 지원군이 왔고 극단적인 어둠 속에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난 대대적인 전투에 그리피네의 군대는 말 그대로 전멸당한다. 플로르의 군대는 그대로 그리피네의 성을 향해 진격하고 그 성을 함락시킨다.
“오늘 해야 해요.”
플로르의 군대가 그리피네의 성으로 가기 전에 움직이고 텅 비어 있는 그 성을 털어야 한다. 만약 타이밍을 놓쳐 플로르의 군대가 온다면, 성현의 계획은 모두 어그러지고 만다.
“우리가 존재의 저 대군을 이길 수는 없어요. 빠르게 움직여야 해요.”
이창민 중사가 한숨을 내뱉었다.
“나중에…… 밥 사라.”
“소고기 사 드릴게요.”
“오케이.”
이창민 중사가 사체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자 성현도 손을 뻗었다. 성현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마법사의 권능, 이창민 중사의 마력을 존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중이다.
사체는 하나씩, 그리피네의 성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 *
그리피네의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곳에 전차와 자주포가 가득했다. 그것들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곧 일어날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존재의 사체가 하나둘씩 나타났다.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서은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가 서은서가 옆에 선 이서아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이제야 물어보네요. 성현 씨와 무슨 관계죠? 아, 친밀하다는 것은 아는데,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이서아가 눈을 깜빡이며 서은서를 향했다. 그리고 과자를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미래를 볼 줄 알거든요?”
“네?”
뜬금없는 말, 하지만 이서아의 표정은 극단적일 정도로 심각하다. 서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봤죠?”
서은서가 질문했고 이서아가 계속 말했다.
“우리 대장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위험해요.”
“……네?”
“질투가 심해요. 그러니까 진짜 죽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