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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31화 (231/252)

231화

* * *

“와…….”

이서아는 푸른색 마력이 일렁이는 반지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이서아는 반지에 앉아 있는 정령을 통해 일대 전역에 빗줄기를 쏟아붓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서아가 사용한 마력은 정말 미미할 정도다. 모든 것은 정령의 힘.

이서아가 멍한 눈으로 정령을 바라보자 정령이 입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그 표정 마음에 들어. 그래서 내가 널 선택한 거야. 유성현과 계약했으면, 내가 힘을 사용해도 기뻐하지 않았을걸. 저기 봐 봐, 지금도 무뚝뚝한 얼굴로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잖아. 정말 재미없는 남자야.

정령은 말이 참 많다.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동안 성현과 함께하며 어떻게 침묵을 이어 왔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정령은 이서아의 그 생각을 읽었다.

-너희는 계속해서 사막을 돌아다녔고 보다시피 난 물의 정령이지. 사막과 어울리지 않아. 그래서, 계속 잤어. 자고 또 자고, 그러다 보니까, 너희가 그 동굴에 도착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력이 좀 채워지더라?

정령은 그동안 마력의 부족으로 계속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그 동굴은 창조주가 만든 것, 곳곳에 마력이 가득했고 정령은 빠르게 모자란 마력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 마력이 유지될지는 모르겠어. 여기는 여전히 건조해.

빗줄기가 쏟아지는 중이었고 사방은 습했다. 모래가 물기를 머금었으며 웅덩이가 생기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정령에게는 이곳이 습했다. 빗줄기가 사라지면 다시 드러날 그 건조한 사막의 모습이 답답하기만 했다.

-어서 끝내고 살기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

정령이 반지를 딛고 일어섰다. 그녀의 등에 투명한 날개가 보였다. 정령이 날개를 펄럭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더 힘을 내야겠지?

이서아는 정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로 손을 뻗었다.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

* * *

“이런 젠장!”

성벽을 지키는 지휘관이 턱에 힘을 꽉 줬다. 이마에는 핏줄이 솟아났다.

성벽 아래에는 강령술에 지배된 사체가 있다. 놈들의 약점은 불. 기름을 퍼붓고 화염 공격을 쏘아 대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객체.

하지만 뜬금없이 빗줄기가 쏟아졌다. 맹렬히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불은 쉽게 꺼지고 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휘관이 머리를 쥐어뜯을 때, 부관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조명탄처럼 사용한 불꽃 역시 빗줄기에 사라졌다. 세상은 극단적인 어둠으로 채워졌고 지휘관이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끝이 아니다.

“포탄이 계속 날아오고 있습니다!”

부관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포탄이 떨어지며 귀를 찢는 굉음이 꽝, 꽝 쉬지 않고 울리는 중이다.

“미치겠네…….”

높은 등급의 존재라면 인간이 만든 포탄은 전혀 위협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남은 존재는 극히 적다. 그중에 포탄을 견딜 만한 놈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

지휘관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성벽에 숨어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는 마인이 보인다. 놈은 포탄이 떨어지는 굉음을 두려워하며 귀를 꽉 막고 있다. 그러다가 ‘꽈아아아앙!’ 하고 포탄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마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찢겨 죽었다. 사방에 놈의 팔과 다리가 후드득 떨어졌다.

“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다른 마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포탄은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쏘아지고 있었다. 마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채 죽어 가는 거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관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 순간 ‘꽈아아앙!’ 하고 포탄이 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포탄 파편이 ‘피이이잉!’ 소리와 함께 튀더니 부관의 목을 스쳤다.

“방법을…….”

촤아아악!

부관의 목이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 그 핏줄기가 지휘관의 얼굴에 ‘팍!’ 하고 튀었다.

지휘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부…… 부관…….”

수억 년의 시간 동안 함께한 부관이 그대로 즉사했다. 목과 머리가 심줄 몇 가닥에 의지한 채 덜렁거리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지휘관이 입술을 씹었다. 이제 고민할 시간은 없다.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다.

“전장에 나간 부대에 연락하라! 지금 본진이 위협받고 있다고 알려라! 서둘러 복귀해서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라!”

지휘관의 목소리가 성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전령을 맡은 존재들이 빠르게 통신 마법을 펼쳤다.

“본진입니다! 지금…….”

하지만 놈들의 목소리는 이어질 수 없었다. 눈은 곧 당황으로 물들었고 주변을 지휘관을 향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 방해 마법이 설치된 것 같습니다!”

“……뭐?”

지휘관의 시선이 다른 쪽에 있는 존재에게 향했다. 상대는 인간이다. 마력의 한계가 존재한다. 통신 방해 마법을 사용했다 해도 이 지역 전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쪽은? 연락이 되는가?”

하지만 마찬가지다.

“아, 안 됩니다! 어떤 쪽으로 해도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광범위한 마법이 이곳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통신을 방해할 수 있다고? 그것도 광범위하게?”

그때 사막의 끝에서부터 굉음이 울려 왔다. 빗소리와 함께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수백 대의 전차다. 그 궤도가 사막을 밟으며 움직이는 소리다.

일정 거리에서 궤도를 멈춘 전차들이 동시에 포신을 움직였다. 노리는 것은 정확히 성문. 그 앞에 있던 사체들이 비켜섰다.

“쏴!”

지시와 함께 전차들이 ‘꽈아아앙!’ 하고 불을 뿜었다. 쏘아진 포탄이 그대로 성문에 직격했다.

쿠쿠쿠쿠쿵!

성문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수백 대의 전차들은 그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쾅! 쾅! 꽈아아앙!

전차는 계속해서 불꽃을 내뱉었고 포신에서 흐르는 연기가 악마처럼 널름거렸다.

* * *

“곧 문이 열릴 거예요.”

성현이 입을 열자 이창민 중사가 비를 맞으며 젖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리는 정면으로 돌파하라는 거지?”

“네.”

“너는?”

“전 측면을 통해서 바로 그리피네에게 향할 계획이에요.”

성현은 이들이 다른 존재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동안 그리피네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창민 중사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봤다.

“……혼자?”

이창민 중사는 성현의 강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혼자 그리피네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녀는 어머니급의 존재, 존재의 세상에서 최강자로 일컬어지는 이들 중 하나다.

이창민 중사의 걱정 가득한 눈빛에 성현이 슬쩍 웃었다.

“괜찮아요. 약점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혼자 가는 게 편한 거고요.”

물론 약점을 알고 있다 해도 그리피네와의 싸움을 확신할 수는 없다.

“죽지 마라.”

이창민 중사가 건조하게 말했다. 함께 가 봤자 방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틀어 박상문 하사를 향했다.

박상문 하사의 표정이 굳어 있다. 곧 시작될 전쟁에 대한 긴장 때문이다. 자신이 죽는 것은 괜찮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빼앗아 가는 곳. 어쩌면, 이곳에 있는 누군가를 영원히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성현이 그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처럼 질문을 던졌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묻지 마.”

박상문 하사는 성현의 질문이 뭔지 듣지도 않고 잘라 버렸다. 하지만 성현은 상관 않고 물었다.

“대체 권능이 뭐예요?”

성현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박상문 하사의 권능을 본 적이 없다. 간간이 이창민 중사가 “조심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박상문 하사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알면 다쳐.”

“그러니까…… 뭔데요?”

성현이 재차 물어보자 박상문 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진짜 몰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네? 그럼 몰라서 묻지, 알면 묻겠어요?”

“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지금 표정 보니까 진짜 모르는 것 같네?”

박상문 하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이창민 중사가 웃었다.

“같이 군 생활을 했는데, 성현이는 진짜 모르나 보다. 이거 또 웃기네.”

지금은 전쟁 중이다. 하지만 성현의 가벼운 질문이 통했는지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낄낄 웃기 시작했다.

“고참한테 관심이 없는 거 봐라.”

“야, 상문아. 그러게, 군대에 있을 때 좀 갈구지 그랬어. 지금 네가 갈구면 성현이가 너 때릴걸.”

“아오!”

박상문 하사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르치며 말했다.

“내 권능은 이거야.”

박상문 하사의 가슴에 박힌 ‘군종’이라는 마크.

“군종이었어요? 기도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진정한 신자는 남들 모르게 기도하는 법.”

“그러니까, 권능이 뭔데요?”

성현이 박상문 하사에게 권능을 물었던 것은 긴장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궁금해졌다. 그리고 박상문 하사가 당당히 말했다.

“성직이지.”

* * *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성문이 뚫렸습니다!”

“성에 있는 전 병력을 성문으로 집결시키겠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성문이 뚫리며 신하들이 우왕좌왕했다.

“우리 존재들이 환영을 보고 있습니다! 카디르버의 계약자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신하들의 보고를 들으며 그리피네는 무심한 눈으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뭘 그리 당황하느냐?”

“……!”

신하들이 멈칫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리피네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그리피네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나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러고 보니, 이곳엔 그리피네가 있었다. 성문이 뚫리고 성벽이 무너져도 그리피네에게는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힘이 있다.

그리피네가 자신의 하얀 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열린 성문이다. 들여보내라. 정원까지 오게 하라.”

그리피네 역시 플로르와 마찬가지로 이동의 한계가 존재한다.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이 건물의 바로 앞인 정원까지다. 즉, 인간들이 정원까지 들어온다면 그리피네의 힘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리피네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망가진 성벽과 문을 보수할 걱정을 하라. 짓밟힌 내 정원에 심을 꽃을 고민하라.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

신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우매한 자들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신하들이 다급히 뛰었다. 그들은 성벽으로 달려 나가 방어를 그만둘 생각이다. 인간들을 정원으로 끌어들이는 게 이제 그들의 임무다.

그렇게 성에는 그리피네만 남게 되었다. 적막한 그 공간에서 그리피네가 스산하게 웃었다.

“플로르에 이어 인간들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구나.”

그리피네는 다짐했다. 플로르와의 전쟁이 끝나면 인간들을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다. 인간은 그리피네가 만들 새로운 세상에 필요 없다. 그리피네가 인간의 갓난아기에게 에느가인이 있다는 예언서를 봤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읏차!”

창문이 열리고 그곳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들어온 자.

그를 지켜보던 그리피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성현?”

“어라? 날 알고 있어? 그럼, 소개는 필요 없겠네. 바로 간다.”

성현이 그리피네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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