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그리피네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다. 그 피가 성현에게 튀었다.
치이이익!
성현의 살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성현은 상관 않고 건조한 눈으로 그리피네의 사체를 바라봤다. 그리피네는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다.
성현은 그리피네의 사체를 내버려 둔 후 뒤로 이동했다. 이어서 단도를 빙글 돌린 후 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리피네의 사체를 찌르기 시작했다.
푹! 푹! 푹!
이미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성현은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찌르고 또 찔렀다. 그때마다 그녀의 사체가 꿈틀거렸다. 몸에 구멍이 생기며 핏물이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사체를 찔러 대는 성현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잔혹했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악마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성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성현이 손에 쥐고 있던, 창으로 변해 있던 고대의 무기가 쇠사슬이 되었다. 성현은 그 쇠사슬로 그리피네의 발목을 묶었다. 그리고 쇠사슬을 하늘로 던져 천장에 있는 장식물에 매달았다. 반대편의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끽끽 소리와 함께 그리피네의 몸뚱이가 흔들거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잘린 목에서 핏물이 주르르륵 흘러내리며 그 소리가 뚝뚝 음산하게 들려왔고 핏물이 바닥에 고였다.
‘다음은…….’
성현은 품에서 회복제를 꺼내 씹어 먹었다. 그리고 체력이 조금이나마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주먹을 쥐었다 펴며 체력을 가늠한 성현은 쇠사슬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그리피네의 몸뚱이를 향해 다가갔다. 손을 대자 성현의 손에서 피어난 마력이 그리피네의 몸을 빨래 짜듯 뒤틀었다.
우드드드득!
뼈가 짓이겨지는 소리와 살이 찌부러지는 소리, 그와 함께 그리피네의 몸에 남은 핏물이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흐르던 피가 멎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이제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성현은 그리피네의 팔과 다리를 찢었고 손으로 그녀의 배 속을 쑤셨다. 그녀의 몸에 남은 한 방울의 피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리피네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로 마른 오징어처럼 변해 갔다. 바닥은 그리피네의 피로 흥건했고 그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그 어떤 잔인한 살인 장면을 생각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리피네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다. 그것도 어머니급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비참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그리피네와 오랜 시간 함께한 신하가 온다 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저 다져진 고깃덩이였다.
하지만 그리피네의 망가진 모습을 보는 성현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일을 하는 것처럼 바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사체를 손질하고 또 잘라 냈다.
그리피네의 피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성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찢었다. 그리고 정말 단 하나의 피도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성현이 손가락을 툭 움직였다.
‘떠올라라.’
성현의 의지에 따라 핏방울이 솟구쳐 오르며 하나로 모였다. 처음에는 작은 핏방울이었지만 모이고 또 모이며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성현은 혹시 놓친 핏방울이 있는지 주변을 살뜰히 살폈다. 피가 흥건했던 바닥이 깨끗해졌고 벽지에 묻어 있던 핏물도 사라졌다.
‘됐네.’
이제 그리피네의 피는 모두 모았다. 성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창고.”
성현은 핏물로 이뤄진 구체와 함께 창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 꼬마를 만나 준비해 둔 항아리를 꺼냈다. 물론 평범한 항아리는 아니다. 그리피네의 피가 가진 마력을 견딜 수 있는 물건이다.
성현이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그 안을 가리켰다. 그러자 핏물로 이뤄진 구체가 성현의 지시를 따라 항아리로 향했고 그 안을 채웠다.
붉은 피가 찰랑거릴 정도에서 딱 멈춘다. 온도를 올린 것도 아닌데, 부글부글 끓고 있다. 성현은 항아리의 뚜껑을 닫으며 그제야 참고 있던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하…….”
그리피네와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약점을 모르고 있었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리피네와 싸우며 느낀 게 있다. 성현은 플로르를 이길 수 없다. 플로르는 그리피네와 달리 추악한 외모를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든 자신의 힘을 개방할 수 있고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지르힐이 있다. 항아리에 담긴 그리피네의 피를 이용해 지르힐에게 자유를 선물하면 플로르를 막을 수 있다.
“곧 얼굴 보겠네.”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 성현이 몸을 틀었다. 그 모습이 창고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밖으로 나온 성현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유르라헬의 서재를 천천히 둘러봤다.
최초의 성녀 유르라헬이 아끼던 곳, 태초의 모든 것을 기록해 둔 곳, 창조주가 그리피네에게 허락하지 않은 곳.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가득했다.
-서재는 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마법사의 목소리에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서재의 끝을 향해 걸어 보라.
성현은 마법사의 말에 따라 서재의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성현이 걸은 만큼 거리가 더 넓어졌다. 넓어진 만큼 새로운 책이 나타났다.
-나도 말로만 들었을 뿐,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다. 필요한 게 있을지 모른다. 읽어 봐라. 궁금하지 않은 가? 왜 그 많은 존재 중 그리피네만이 성에서조차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었을까? 창조주는 왜 그런 저주를 내렸을까? 이 서재에 있는 비밀이 궁금하지 않느냐?
태초의 시간과 창조주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창조주가 말했던 ‘자유’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에느가인에 대한 진실도 볼 수 있을 거다.
성현이 낄낄 웃었다.
‘궁금은 한데, 그냥 눈으로 봐도 수천만 권이 넘을 것 같거든? 이걸 언제 읽어?’
-어렵지 않다. 잠시 의식을 넘기라, 내 아들과 나의 이름을 걸고 너에게 약속한다. 의식을 넘겨도 해를 끼치지 않을 거다. 그 지식을 공유하겠다.
마법사에게 이름을 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자신의 이름까지 걸었는데, 성현의 몸을 차지한 후 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다.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리지?”
-이 정도 책이라면…… 1시간 정도?
수백만 권, 어쩌면 수천만, 수억 권을 넘어갈지도 모를 만큼 책이 많다. 그런데 1시간 안에 모두 읽겠다니. 성현은 끌끌 웃으며 대답했다.
‘해 봐.’
동시에 성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마법사가 그 의식을 차지한 거다.
마법사가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태초부터 마법사란 지식을 탐하는 존재였지.”
그 말과 동시에 마법사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마법사가 또 하나 만들어지며 둘이 되었다. 끝이 아니다. 손가락을 또 한 번 튕기자 마법사가 넷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사는 여덟, 열여섯, 서른 둘, 예순 넷…… 쉬지 않고 불어났다.
“분신술이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내 의지로 행동한다. 하나, 불어난 만큼 내 힘도 분열되기에 전투에서 쓸 만한 권능은 아니다.”
마법사는 의식에 갇힌 성현을 향해 친절히 설명한 후 주변을 살폈다. 수만 명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마법사가 그들을 향해 지시했다.
“읽어라.”
그러자 다른 마법사들이 휙, 휙 몸을 날리며 책꽂이로 향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걸로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분신을 만들어 냈다. 드넓은 서고가 어느새 마법사로 가득했다.
한 놈이 허공에 둥실 떠오른다. 책을 꺼내더니 제목을 확인한 후 둥둥 뜬 채 양반다리를 한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책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책장 넘기는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어떤 놈은 수십 권의 책을 한 번에 띄워 놓고 펼쳤다. 그 많은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눈동자가 빠르게 이동하며 그 내용을 모두 머릿속에 담는다.
책에 기록된 것은 천문학과 물리학 같은 과학적 내용에서부터 수학과 종교에 대한 내용 그리고 마력과 권능, 존재해서 안 되는 해괴한 마법까지.
그곳에는 전 우주의 역사가 적혀 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은 1초에 열 권에서 스무 권을 뽑아 읽을 정도로 책장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는데, 지금 장에서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 이게 뭐지?”
시간은 정지했다. 그리고 매번 반복되고 있다. 창조주가 만든 양피지, 그것으로 인해 시간은 되돌아간다. 시간을 되돌린 자의 이름을 회귀자라 부르며, 회귀가 시작되면 그를 제외한 다른 자들의 기억은 모두 지워진다. 회귀자는 창조주의 자유 의지를 받들어 세상을 정화시키려는 자.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사체는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유르라헬의 서재, 유르라헬이 죽은 지금도 역사서는 저절로 적혀지고 있었다.
마법사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첫 번째 회귀자, 마르엔티.
마르엔티라는 이름의 생명체의 기록이 적혀 있다.
먼 우주의 생명체, 그가 살던 곳 역시 에느가인을 얻기 위한 플로르에 의해 망가졌다. 마르엔티는 양피지를 손에 얻어 회귀했지만 역시 플로르에게 패배했다.
두 번째 회귀자 자미엘로.
자미엘로 역시 지구와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태어난 생명체.
그 역시 플로르에게 대항하기 위해 싸웠고 회귀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그런데 그런 회귀자가 수천 명에 가깝다. 모두 죽고 또 죽었다. 죽었다 깨어났지만 그들은 또 비참하게 죽었다. 그들의 기록만 책으로 수백 권이었다.
마법사의 본체가 와서 그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빼앗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르엔티…… 자미엘로…….’
마법사의 기억에 그들의 이름은 없었다. 이미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들이 살았던 행성은 알고 있다. 모두 플로르의 군대에 의해 사라진 행성의 이름이다.
‘가능해…….’
양피지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찢어져도 다시 재생되었다. 성현 이전에 다른 누군가가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마법사는 책장을 탁탁탁 넘겼다.
최종장.
마지막 회귀자, 유성현 : 지르힐의 계약자. 멈춰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으며…….
예상대로 성현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동안 성현이 싸워 온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마지막이라 적힌 것은…….’
성현이 그 양피지의 기운을 흡수하며 완벽히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지금껏 반복되던 시간이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장이라…….’
수천 명의 회귀자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최종장에서 마지막 승자가 가려진다는 거다.
마법사는 한숨을 내뱉으며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잉크가 묻어 있지 않은 빈 종이만 보인다.
이 빈자리에 성현이 승리했다는 문장이 적힐지, 아니면 죽었다는 내용이 적힐지 마법사는 불안하기만 했다. 수천 명의 회귀자들이 플로르의 손에 당했다는 걸 읽어 가며 성현이 승리한다는 생각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현에게는 지르힐과 마법사가 있지만, 그 힘이 완벽하지 않다. 마법사는 망령이며 지르힐은 묶여 있다. 그리피네의 피로 지르힐이 풀려날 수 있지만, 억겁의 시간 동안 감금되었던 그녀의 힘이 온전할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플로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비겁했고 야비했으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길 수 있을까?’
그때였다.
‘지금껏 죽은 회귀자들의 능력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먼 구석에서 책을 집어 던지듯 읽고 있던 마법사의 의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