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꼬마는 계단의 난간을 잡고 비틀비틀 올라섰다. 다리는 힘이 풀렸고 시야는 흐려지고 있다. 꼬마의 꽉 다문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는 중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꼬마는 항아리를 놓칠까 온 힘을 다해 쥐고 있었다.
‘조금만…….’
지금 성현은 수많은 존재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이번은 쉽지 않을 거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꼬마는 서두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지르힐을 풀어 줘야 한다. 그래야 성현이 살 수 있다.
‘조금만 더…….’
꼬마는 힘을 내서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퍽!’ 소리와 함께 둔탁한 기운이 느껴졌다.
“……!”
항아리의 아랫부분이 깨졌고 담겨 있던 그리피네의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 피가 바닥에 떨어지며 계단을 녹였다.
“아…….”
꼬마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깨진 항아리, 누군가가 마력을 쏘아 부순 거다.
‘뭐, 뭐야…….’
꼬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은 지르힐이 갇힌 탑이다. 지르힐에게 악감정을 가진 생명체는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갑자기 마력이 쏘아져 항아리가 깨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꼬마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틀었다. 마력을 쏘아 댄 게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거다. 그런데 몇 계단 아래에서 무릎까지 오는 인형이 웃고 있다.
“……!”
그것은 플로르의 마력이 담긴 인형이었다. 그것이 자박자박 계단을 걸어 오르며 꼬마를 향해 올라섰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당황하는가? 내가 올 것을 예상 못 했나? 지난번에 인형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걸 확인했을 텐데……. 이것은 생명체가 아니라 물건이니까.”
꼬마는 항아리를 꽉 쥔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인형은 꼬마와 거리를 벌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며 말을 이었다.
“지르힐을 풀어 주는 것은 안 된다. 넌 태초의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지르힐의 무서움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지르힐을 가둔 것은 우리지만 창조주는 풀어 주지 않았다. 창조주마저 지르힐을 풀어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
“…….”
“그 여자는 미쳤다. 풀려나는 순간 우리의 세상을 무너뜨리려 할 거다. 그걸 바라는가?”
인형이 조용히 웃으며 꼬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항아리를 내놓아라. 그리피네의 피를 버리고 지르힐을 계속해서 이곳에 가둬라. 그럼 내 너에게 약속하겠다. 너의 왕가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내 뜻을 따르면, 넌 어렵지 않게 일국의 왕이 되어 새로운 군주로서 이름을 알릴 거다.”
“…….”
“카심의 아들아,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내가 너에게 네가 원하던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꼬마가 마른침을 삼켰다. 꼬마가 원하던 것은 왕국의 재건. 카심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 플로르라면 그 꿈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 플로르의 손을 잡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국의 왕이 되어 왕좌에 오를 수 있을 거다. 꼬마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엿이나 잡수세요.”
“……뭐?”
꼬마의 대답은 플로르의 예상과 달랐다. 당연히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꼬마는 플로르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운 채 말했다.
“네 밑에 들어가는 게 왜 왕이야? 어딘가의 영주겠지.”
“……!”
“우리 아버지는 그런 비굴한 짓은 하지 않았어. 나도 그런 쪽팔린 짓은 안 할 거고.”
그 말과 동시에 꼬마의 손이 항아리의 부서진 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질질 새는 피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이다.
동시에 ‘치이이이익!’ 소리와 함께 꼬마의 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고통 속에서 꼬마가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르힐 님은 풀려날 거야. 그때까지 긴장 꽉 하고 있어라.”
꼬마는 몸을 틀어 다급히 계단을 올랐다. 인형이 쫓기 전에 지르힐을 만나야 한다. 꼬마의 몸뚱이에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꼬마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형이 조용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비록 인형에 담긴 마력은 미미하지만 너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말을 끝으로 인형이 타타타탁 소리를 내며 꼬마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꼬마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평소였다면 꼬마의 권능으로 인형 정도는 이길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꼬마는 만신창이다. 인형을 죽일 만한 힘이 없다.
* * *
그 시각, 성현은 갑주를 입은 채 존재와 싸우는 중이었다. 아니, 싸운다는 의미보다는 사력을 다해 공격을 피한다는 표현이 옳다.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수천수만의 존재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지금 성현은 지르힐이 풀려날 때까지 놈들의 공격을 피해 다니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쾅! 쾅! 쾅!
바다는 폭격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고 죽은 자들의 사체가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인간이!”
존재들은 당황했다. 수많은 숫자의 존재를 상대하면서 죽지 않고 도망 다니는 성현의 몸짓에 혀를 내둘렀다. 온 힘을 다해 폭격하고 있는데, 날다람쥐처럼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성현을 보면 이제 짜증이 치솟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이 당황한 이유는 또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바로 태초의 전쟁 이후 태어난 어린 존재들, 그들이 일시적으로 성현의 편에 서 있었다. 성현을 상대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그들은 어린 존재까지 상대해야 했다.
쾅!
거대한 마력이 바다를 찢을 듯 떨어졌다. 성현은 바다를 박차고 뛰며 마력을 피해 냈다. 그러자 수십 명의 존재들이 저돌적으로 성현을 향해 날아왔다. 그 모든 놈들의 몸에 살기가 가득하다.
“제발 죽어라!”
성현은 눈을 찡그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성현의 허벅지에 힘이 꽉 들어갔다. 파아아아앙! 성현은 엄청난 속도로 놈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때마다 성현의 허벅지에서 핏물이 왈칵, 왈칵 쏟아졌다. 바다로 들어갔을 때, 백상아리로 변한 존재에게 물린 상처다. 마법사가 빠른 목소리로 성현의 상태를 물었다.
-몸은 어떤가?
‘견딜 만해.’
-그럼 마력을 더 끌어 올려라. 저놈들이 진심으로 너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존재들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성현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해 다니는 성현을 보며 그 느긋함은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온 힘을 다하려 한다.
성현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것이 성현의 몸을 휘감았고 주변에 수백 개의 라이트닝 볼이 만들어졌다. 그 라이트닝 볼은 예전과 달랐다. 성현은 양피지에 담긴 마력을 흡수하고 지난 회귀자의 권능을 손에 얻었다. 라이트닝 볼 역시 그 하나하나가 파괴적으로 변했다.
콰콰콰콰콰쾅!
수백 개의 라이트닝 볼이 허공으로 쏘아져 올랐다. 공간을 가른 라이트닝 볼이 존재를 향했다.
파지지지직!
미처 피하지 못한 존재들은 라이트닝 볼을 정면으로 상대했고 그 몸이 스파크에 휘감겼다. 그 빛이 사방에서 요란하게 번쩍였다.
하지만 별다른 타격은 주지 못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이 플로르급의 존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중급 이상의 존재는 된다. 라이트닝 볼로 치명상을 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성현이 굳이 라이트닝 볼을 쏘아 올린 이유는 하나다.
“또 어디로 도망치는 거냐!”
번쩍이는 빛이 그들의 시야를 가렸을 때, 성현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놈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다. 근접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지르힐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기가 용이하다.
-통신을 두절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뜬금없는 마법사의 말에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야?’
-지르힐에게 연락이 왔다. 너에게 메시지를 보낼 시간조차 없는지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통신을 두절시키라 한다.
마력을 방해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지 못하게 해 달라는 뜻이다. 그럼 지르힐과의 연락 역시 두절된다. 그런데도 그 권능을 요청한 것은 꼬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성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봤다. 존재들의 권능이 성현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불꽃과 검은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중이다. 그 힘에 바다가 갈라졌고 폭풍 같은 바람이 성현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젠장.’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것을 피할 시간이 없다. 지금은 지르힐의 요청에 따라 통신을 어지럽혀야 한다. 성현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서 피어난 마력이 하늘을 뒤덮을 때, 존재가 쏜 마력이 성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르르릉!
* * *
꼬마의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허벅지 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 다리가 없다. 하지만 꼬마는 포기하지 않고 계단을 박박 기어오르는 중이다.
인형이 깔깔 웃으며 꼬마의 옆에 서 있었다. 장난치는 것 같은 눈빛으로 꼬마를 내려다보며 잘려 나간 꼬마의 다리를 손에 쥐었다.
이제 인형은 꼬마가 소중히 안고 있는 항아리에는 관심조차 없다. 어차피 이곳에서 꼬마의 목숨이 사라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형이 꼬마의 다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내 뜻을 따랐다면 보장된 미래가 있었을 텐데, 이제 넌 두 다리도 없구나. 평생을 벌레처럼 기어 다니며 세상을 올려 봐야 할 게다. 난 그게 안쓰럽다. 그래서 네 목숨을 끊어 주려 한다. 위대한 왕가의 자식이었던 자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인형은 더 크게 깔깔 웃었다. 이제 꼬마를 죽이고 그리피네의 피를 바다에 던져 버리면 모든 게 끝난다. 그럼 플로르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없다. 세상은 플로르의 손에 들어오는 거다. 인형이 말을 이었다.
“눈엣가시 같던 그리피네도 없다. 날 상대하려던 지르힐은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을 거다. 이제 이 세상의 신은 나다.”
“다, 닥쳐…….”
꼬마는 울고 있었다. 플로르의 인형을 상대로 어떤 반항도 못하고 죽어 가는 게 억울해서다.
꼬마의 눈물을 바라보던 인형이 입술을 죽 찢어 웃었다. 그리고 꼬마의 앞에 서서 그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 목을 꺾어 주겠다.”
“죽어서도 널 저주할 거다, 플로르…….”
“얼마든지.”
인형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그 마력이 꼬마의 목을 타고 흘렀다. 이제 인형이 힘을 주면 꼬마의 목은 떨어져 나갈 거다.
그런데 그때 인형이 실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툭 땅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인형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인형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
꼬마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는 게 아니다. 항아리를 들고 지르힐에게 가는 거다.
꼬마는 한 손으로 항아리를 쥔 채, 다른 손으로 계단을 잡고 질질 위로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꼬마는 드디어 지르힐의 앞에 도착했다.
“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