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꼬마는 바닥을 박박 기며 지르힐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항아리에 있는 피를 쇠사슬에 뿌렸다. 그때마다 ‘치이이익!’ 하고 쇠사슬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렸다.
지르힐은 어떤 말도 내뱉지 않은 채 안쓰러운 시선으로 꼬마를 바라봤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약속하고 있었다. 꼬마의 염원을 반드시 이뤄 주겠다고. 카심의 명예를 회복하고 꼬마가 왕가를 재건하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반드시 약속하마…….’
꼬마의 오른손은 녹아 있었다. 구멍 난 항아리를 손으로 막은 채 이곳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다리는 잘려 나갔다. 꼬마가 이곳까지 기어 온 흔적이 참혹할 정도의 핏물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꼬마는 그 고통을 참으며 쇠사슬을 녹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꼬마의 의식은 흐려진 상태다. 지금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꼬마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계처럼 하는 중이다.
그렇게 지르힐의 목을 감금하고 있던 쇠사슬이 ‘쿵!’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이어서 지르힐의 양 어깨를 감싸고 있던 것이 풀렸고 허리를 잡고 있던 쇠사슬도 녹아내렸다.
“이제…… 허벅지와 발목 그리고 왼쪽 손목만 남았습니다.”
꼬마는 피를 토해 내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덜컥, 덜컥’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쇠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르힐은 마력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 폭력적인 기운이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더 짙게 만들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검은 연기가 쉬지 않고 퍼져 나가는 중이다. 그 마력에 담긴 기운은 세상을 공포로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지르힐은 자신의 상태를 살피며 빙긋이 웃었다. 이제 자신을 이곳에 가둔 플로르와 그 존재들을 살육할 시간, 남은 손목만 풀려나면 곧장 그들에게 달려가 목을 벨 생각이다.
그런데 꼬마의 행동이 뚝 멎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 지르힐의 시선이 꼬마에게 틀어졌다.
“왜 그러지?”
“피, 피가 모자랍니다.”
“……!”
성현이 그리피네를 쥐어짠 후 가져온 피다. 그 양은 충분했다. 하지만 플로르가 보낸 인형에게 공격을 당했고 항아리를 깨졌다. 꼬마가 다급히 구멍을 막았지만 상당량의 피를 바닥에 쏟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지르힐의 한 손목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지, 지르힐 님…….”
꼬마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꼬마는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플로르의 공격을 피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 * *
플로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앞으로 들었다. 인형과의 통신이 끊겼다. 아무리 마력을 보내도 연결되지 않는다.
‘유성현…….’
이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통신을 끊은 게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유성현이다.
‘결국 지르힐을 풀어 주겠다는 것인가?’
통신이 끊겨졌지만 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빤히 알 수 있었다. 꼬마는 질긴 생명을 이어 가며 탑을 기어올랐을 것이고 지르힐을 풀어 줬을 거다.
플로르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솟았다. 태초의 전쟁, 당시의 지르힐이 떠올라서다. 그 많은 존재를 상대로 거리낌 없이 마력을 쏘아 대던 모습, 처참한 몰골로 죽어 가던 존재들, 지르힐은 말 그대로 악이었고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 지르힐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려 한다. 그리피네의 피는 그 쇠사슬을 녹일 것이고 자유를 찾은 지르힐이 할 일은 뻔하다.
‘방법이 없는가?’
플로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 번뜩 든 생각이 있다.
‘유성현…….’
이번에도 유성현이다.
‘지르힐은 그 인간을 아끼고 있어.’
억겁의 시간 동안 외롭게 갇혀 있던 지르힐은 인간 따위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 인간을 인질로 삼으면, 지르힐의 행동에 제약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플로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아래에 서 있던 신하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플로르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유성현은 어디에 있는가?”
“……?”
신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성현은 지금 지르힐의 탑으로 향하는 바다에 서 있다. 그곳에서 수많은 존재를 상대로 싸우는 중이다. 한 신하가 앞으로 나서며 손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그 원에서 바다,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많은 수의 존재가 나타났다. 성현이 통신 마법을 건 것은 탑의 주변이었기에 그곳의 모습은 잘 보였다.
“유성현은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저곳 도망치고 있기에 정확한 모습은 포착되지 않지만…….”
“그러니까, 정확히 어디에 있느냐?”
신하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원에 보이는 광경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그 어떤 곳에도 성현이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존재들에게 가려져 있는지, 아니면 수면 아래에 있는지는 몰라도 성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라! 그게 지르힐을 막을 방법이다!”
플로르의 외침이 벼락같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곳에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모든 마력을 쏘았고 유성현은 그것을 정면으로 맞았습니다.
성현이 통신을 끊기 위한 권능을 쓰던 순간이었다. 존재의 마력이 성현을 덮쳐 왔지만 성현은 피하지 않고 권능 사용에 우선했다. 성현은 그 모든 마력을 몸으로 받아야 했다.
-유성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죽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르힐을…….
“사체는?”
플로르의 질문에 그곳에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그리고 놈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체는 찾지 못했습니다. 잔해도 남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놈은 마법사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잔해가 남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검은 갑주라도 우리 모든 존재의 마력을 견딜 수는 없을 겁니다.
플로르가 입술을 씹었다.
“말도 안 되는…….”
놈은 되도 않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창조주가 직접 만든 마법사의 갑주가 고작 그 정도의 마력을 받았다고 먼지처럼 사라질 리 없다.
“유성현은 도망쳤다.”
플로르는 성현이 도망쳤다고 확신했다.
“멍청한 놈들! 놈은 지르힐에게 너희를 맡겨 둔 채 그곳을 떠났다!”
곧 지르힐이 나타날 것이다. 그럼, 그곳에 모인 모두는 살아남을 수 없다. 플로르는 그곳에 있는 그들이 구석에 몰린 쥐처럼 느껴졌다.
플로르가 계단을 내려오며 그곳과 연결된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신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간 세상을 공격한다.”
“……!”
플로르의 말에 신하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러운 지시가 뜬금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플로르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간 세상에 있는 유성현을 찾는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을 잡아라. 놈의 어미를 죽여도 좋다. 놈의 지인을 잡아 찢어도 좋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놈을 손에 얻는다. 그래야, 지르힐을 막을 수 있다.”
플로르는 인간 세상의 신이 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을 틀었다. 일단 지르힐을 막는다. 그녀를 다시 탑에 가둬 둔 후에 그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 성은 나 혼자 있어도 된다. 내 그릇을 만드는 존재를 제외한 모두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라. 너희가 가진 계약자를 움직이고 너희를 따르는 모든 존재를 활용하라.”
“……!”
“긴장하라. 태초의 전쟁, 그 비극이 다시 벌어지려 한다!”
그 말을 끝으로 플로르의 시선이 앞에 놓인 유리관, 그곳에 담긴 마법사의 자식을 향해 틀어졌다. 그리고 플로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만약, 유성현을 잡을 수 없다면…… 저 아기의 다리를 찢어 가도 좋다. 마법사가 폭주하면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 없을 게다.”
신하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목소리로 “예!”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플로르가 몸을 틀었다.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왕좌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신하들을 내려다봤다.
“시작하라.”
* * *
다시 바다.
그곳에 떠 있는 존재들은 아직 대치하는 중이었다. 태초의 전쟁 이전의 세대와 이후의 세대.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스산하게 웃고 있었다.
“유성현이 사라졌는데, 이제 그만하자. 곧 지르힐이 올지도 모른다. 정말 지르힐이 풀려났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싸워서는 안 된다. 모두 힘을 합쳐 대항해야 한다.”
전쟁을 겪은 존재의 말에 이후의 세대가 낄낄 웃었다.
“그럼, 약속 하나 합시다.”
“어떤?”
“지르힐은 우리가 상대할 겁니다.”
“멍청한!”
“제발…… 전래 동화 속의 이야기를 가지고 겁먹지 마세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옛 기억을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거예요. ‘나 옛날에 지르힐과 싸웠었다. 지르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이런 이야기는 이제 지겹습니다.”
이후의 세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놈이 자신의 마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르힐이든 무엇이든, 오늘 죽여 주겠습니다. 그 몸뚱이를 찢어 먹겠습니다. 심장은 내가!”
그 말과 동시에 다른 놈이 그 앞에 섰다.
“눈동자는 내가 파먹지.”
“다리는 내 것이야.”
전쟁 이전의 세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거짓된 평화가 지속되며, 저들은 공포를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지르힐이란 이름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그래, 몸뚱이는 너희에게 줄 테니…… 지르힐이 나타나면 힘을 합치자. 그럼, 너희가 원하는…….”
전쟁 이전의 세대가 간곡히 부탁할 때였다. 그들은 느꼈다. 서늘함과 섬뜩함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를 압살할 것 같은 이질적인 기운. 그들의 시선이 천천히 틀어졌다.
“……!”
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멀리 지르힐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하얀 로브를 입은 지르힐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다를 산책 나온 것처럼 걸으며 그곳에 모인 수많은 존재를 보며 느긋하게 웃고 있다.
“지, 지르힐이다.”
“지르힐이야.”
“미, 미친……. 진짜 풀려났어.”
전쟁 이전의 세대, 그들의 얼굴이 공포로 질려 갔다. 하지만 이후의 세대는 달랐다.
“뭐야? 팔도 한 짝 없는데?”
“팔은 내가 먹기로 했는데, 그럼 어디를 먹어야지?”
지르힐의 왼쪽 소매가 펄럭이고 있었다. 왼쪽 손목을 구속한 쇠사슬을 녹이기 전에 그리피네의 피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뜯어낸 거다. 그 모습이 전쟁 이후 세대에게는 우습게 보였나 보다.
“지르힐을 죽이고 이름을 떨친다!”
그들이 지르힐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콰콰콰콰!
그 속도에 바다가 갈라지고 태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퍼어어어엉!
급기야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놈들의 숫자가 수천이다. 성현은 저들을 상대로 피해 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폭력적으로 솟아올랐다. 그 모든 힘으로 지르힐을 죽이려 하는 거다. 그런데 지르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느긋하게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귀엽네?”
그 말과 동시에 수천 명의 존재, 그들의 몸이 찢어졌다. 콰지지지지직! 찢어진 팔이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다리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사지가 멋대로 뒤틀어졌다. 빠드드드득! 목이 뒤틀렸고 관절이 기괴하게 꺾이며 틀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지르힐이 손을 흔들자 그들의 입이 녹아내리며 닫혔기 때문이다.
“으으으으읍!”
자신만만했던 그들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리는 것은 순간, 지르힐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끝에 있는 가장 나이 많은 존재 앞에 나타났다. 나이 많은 존재가 움찔거릴 때, 지르힐이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현이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