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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242화 (242/252)

242화

지르힐을 마주한 존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태초의 전쟁 이후로 오랜 시간을 더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때의 공포가 뼛속에 심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술을 씹으며 억지로 웃었다.

“지르힐, 넌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 우리를 도륙했고 그 많은 존재를 바다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넌 오랜 시간 갇혀 있었고 지금은 한쪽 팔마저 쓸 수 없는 상태다. 그런데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존재의 말에 지르힐은 정말 느긋한 태도로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난 강해졌다. 억겁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수련했고, 예전의 나를 넘어섰다!”

“너…… 이름이 뭐였지?”

“스트라엘.”

“미안,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름이야.”

“지금 우리의 숫자는 태초의 전쟁 때보다 많다. 그때의 넌 이보다 적은 숫자에 밀려 탑에 갇혀야 했다.”

지르힐의 입에 소리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때는 너희같이 귀여운 애들만 있던 게 아니잖아. 플로르, 그리피네, 그 외 수많은 어머니급 존재와 군주가 함께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고작해야 귀족급이네? 너희가 날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미안, 난 너희가 귀엽기만 해.”

“지르힐!”

존재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흘렀다. 그 기운에 바다가 또 한 번 요동쳤다. 그리고 검은 마력이 수천 마리의 뱀으로 변하더니 지르힐의 주변에서 아가리를 벌렸다. 이어서 금방이라도 지르힐을 찢어 먹을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지르힐이 눈동자만 틀어 뱀을 바라봤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다.

“됐고…… 성현이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지르힐은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직 성현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성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탑에서는 통신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곳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이계와 인간 세상을 살펴도 성현은 없다. 메시지를 보내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어.’

만약 성현이 죽었다면 계약이 깨졌다는 신호가 들려왔을 거다. 지르힐의 시선이 다시 스트라엘이라 밝힌 존재에게 틀어졌다.

“말해.”

“우리는 예전과 다르다!”

존재는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지르힐의 주변에서 군침을 흘리던 뱀이 지르힐의 몸을 타고 움직였다. 뱀이 발목부터 허벅지를 타고 올랐고, 허리와 가슴에 이어 목을 조이고 있었다.

콱! 콱! 콱!

뱀이 밧줄처럼 지르힐을 묶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트라엘이 히죽 웃었다.

“넌 내 손으로 끝낸다!”

스트라엘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 손으로 지르힐의 심장을 꿰뚫을 생각인 거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지르힐의 표정은 담담했다. 뱀에 묶인 상태에서도 정말 무심한 눈으로 스트라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유성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지?”

“끝까지 여유를 부려?”

“시간이 오래 지나서 기억이 희미해졌나 봐. 나…… 지르힐이야.”

꽈르르르릉!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그 번개가 그대로 스트라엘의 정수리를 찍어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태초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던 스트라엘이라는 이름의 존재는 허무할 정도로 죽어 버렸다. 시커멓게 타 버린 채 바다로 떨어졌다. 그리고 첨벙 소리가 들려왔다. 지르힐의 몸에 징그럽게 붙어 있던 뱀은 연기가 되어 스르륵 사라졌다.

지르힐의 눈빛에는 어떤 감흥조차 없었다. 코끼리가 개미를 밟아 죽인 것처럼 건조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다른 존재들에게 틀어졌다.

“너희는 성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존재들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지르힐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였지만 죽음이라는 미지의 순간은 두려웠다. 그 순간을 피하려는 것은 생명체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 가지 못했다. ‘텅!’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에 막혀 버렸다.

“뭐, 뭐야…… 이건.”

당황한 그들이 손을 뻗어 앞을 만져 봤다. 사방이 막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딘가 있을지 모를 구멍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보였다. 그 새들이 울어 댄다.

“사, 살려 줘!”

“살아야 해!”

“제발!”

지르힐이 그들의 뒤에 섰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성현이 어디 있는지 아는 놈?”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대답하면 살려 준다니까?”

“살려 주세요! 제발요!”

그들의 표정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맹수를 앞에 둔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인간의 앞에서 대단한 척했던 존재였지만, 지금 그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놈도 보였다. 지르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말이나 해. 성현이 어디 있어?”

“모, 몰라요!”

지르힐은 그들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동시에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세상에 벌을 주는 것처럼 사방에 쏟아진 번개가 존재의 몸을 강타했다. 그들은 잿더미가 되어 타 죽었고 바다로 떨어졌다. ‘첨벙첨벙’ 소리와 함께 바다가 놈들의 사체를 받아 냈다.

“젠장!”

모두가 그렇게 죽은 것은 아니다. 사력을 다해 지르힐을 향해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다.

“죽어!”

지르힐이 그들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번개로 만들어진 금빛 창이 쥐였다. 그녀가 오랜만에 만져 보는 자신의 무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날 죽인다고? 재밌는 소리네.”

지르힐이 창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날아오던 놈들의 사지가 잘렸다.

“끄아아악!”

“비명은 듣고 싶지 않다니까.”

지르힐의 말과 동시에 놈들의 입도 녹아 버렸다.

“끄으으으읍!”

그리고 번개를 피해 도망치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무리였다. 어느새 그 뒤에 선 지르힐이 창을 휘저어 놈의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살육이다. 수만 명의 존재가 죽어 가며 바다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존재의 사체가 둥둥 떠 있고 몸뚱이를 잃어버린 얼굴이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에 떠 있는 것은 오직 지르힐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지르힐을 죽여 이름을 떨칠 것이라 외쳤던 젊은 존재들과 그들의 허세를 보며 혀를 차던 세대들이 모두 함께 사라졌다.

지르힐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하늘은 번개를 내리치던 검은 먹구름이 채우고 있었다. 지르힐이 그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플로르? 보고 있지? 너희가 나를 왜 악조차 버린 여자라 불렀는지 기억나게 해 줄게.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기다려. 도망치지 말고.”

* * *

플로르의 성.

지르힐의 폭력적인 모습을 플로르가 지켜보고 있었다. 꽉 씹힌 플로르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지르힐이 풀려날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 현실을 직접 마주한 것은 예상과 달랐다. 플로르의 몸이 발발발 떨려 왔다. 손이 자신도 모르게 축축해졌다.

“지르힐…….”

플로르는 눈을 꾹 감았다. 태초의 전쟁이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그 끔찍했던 일, 죽어 가던 모든 존재들, 무심한 눈으로 존재를 죽이던 지르힐. 모두를 하찮게 내려다보던 그 시선. 그날을 떠올리던 플로르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죽여 버릴 수 있겠어.”

플로르는 지르힐이 강한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지르힐의 싸움을 보며 느꼈다.

‘넌 확실히 약해졌어. 그리고 약해지고 있어.’

지르힐의 몸짓은 예전과 달랐다. 태초의 전쟁이었다면, 저 싸움은 10초도 걸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르힐은 저 벌레 같은 것들을 죽이는 데 몇 분이나 사용했다. 오랜 시간 마력을 봉인했기 때문이다. 빠져나간 마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다.

‘게다가…….’

지르힐의 잘린 팔, 그곳에서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즉, 지르힐은 지금도 약해지는 중인 거다.

‘시간을 끌면 돼. 그럼 지르힐은 나한테 안될 거야. 그때까지 버텨야 해.’

플로르는 지르힐이 자신보다 약해질 시간을 계산하며 중얼거렸다.

“일단…… 확실한 조건을 만들어야 해.”

플로르의 시선이 다시 마력으로 만든 검은 구체를 향해 틀어졌다. 검은 구체는 인간 세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플로르가 그 구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성현을 찾아라. 인간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사지를 찢어도 좋지만 죽이지는 말라!”

* * *

강남역에 사이렌 소리가 가득했다. 짐승이 나타났기에 모두 집 또는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라는 신호.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더 끔찍했다.

비행기만 한 잠자리. 빌딩을 타고 오르는 10여 미터의 지네. 자동차만 한 바퀴벌레,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스쳐 봐도 수십만 마리, 그것들이 도로를 매웠다.

언론은 시끄러웠다.

-세계 각 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짐승의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지금 당장…….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통신 시설이 끊겼는지 ‘치이이익!’ 소리만 이어질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짐승만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존재가 내려오고 있었다. 존재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세상을 채웠다.

“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공간을 채웠다. 강남역에 있던 사람들은 짐승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달렸다.

“아기만! 아기만은 살려 주세요!”

아기를 안은 애엄마가 힘을 내서 빠르게 뛰었다.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가 짐승을 피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서! 어서 와요!”

한 남자가 손을 뻗어 애엄마를 잡고 커피숍으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문을 쾅 닫았다.

“살았…….”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와장창창!’ 하고 커피숍의 유리가 깨지며 거대한 쥐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쥐는 애엄마를 도왔던 남자의 머리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깨진 유리창에 남자의 피가 사정없이 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발버둥 쳤지만 무리다. 남자의 행동은 곧 멎었고 찢어진 뱃가죽에서 내장이 질질 흘러내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도로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끈적끈적한 피가 사방을 채웠고 그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다.

“계약자는? 계약자는 언제 오는 거야!”

사람들은 계약자가 와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도심 곳곳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서 잠시 뒤 나타날 계약자를 기다렸다. 그들이 나타나면 그래도 해결 방안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계약자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여기 있네?”

계약자가 낄낄 웃으며 숨은 사람들을 찾아 칼을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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