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그 과정이 끝난 후 지르힐은 성현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클로이의 사체가 너저분하게 놓여 있다.
“그대가 일어났을 때, 지저분한 걸 보면 안 돼.”
지르힐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마력이 흘러나와 클로이의 사체와 쇠사슬을 태웠다. 그것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고 주변에는 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지르힐의 시선은 다시 성현에게 향했다.
“그대…… 시간이 없다.”
* * *
잠시 후, 성현이 힘겹게 눈을 떴다. 가뜩이나 어두운 동굴 안이었고 흐릿한 시선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뿌연 시야 사이로 누군가 서 있다는 것만 느낄 뿐이다. 하지만 성현은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지르힐?”
“그래.”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성현이 눈에 힘을 줬다. 안개처럼 막혀 있던 시야가 조금씩 걷히며 앞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 하얀색 로브 그리고 성현을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눈빛, 정말 지르힐이 앞에 서 있었다. 성현이 상체를 일으키며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반갑다.”
무의식의 공간에서 본 것은 여러 번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체를 앞에 둔 것은 처음이었다. 회귀 전부터 수십 년을 함께했지만,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얼굴. 억겁의 시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자유를 찾아 줬다는 게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하지만 지르힐은 웃지 않았다. 성현을 향해 조용히 상체를 구부리며 성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눈을 마주했으니 됐다. 난 이제 가 보겠다. 그동안 고생했다. 넌 이제 쉬어라. 다음은 내가 한다.”
“어?”
“난 네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지르힐은 몸을 틀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마음이 바빴다. 플로르의 폭주로 인간 세상이 박살 나는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존재의 세상도 요동치고 있다. 거짓된 평화가 깨지며 너도나도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깃발을 꽂고 군대를 일으키고 있다.
창조주가 만들어 낸 세상이 정말 종말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지르힐,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관리자로 태어난 그녀의 업이다.
그런데 뒤에서 성현의 웃음소리가 끌끌끌 들려왔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숨이 붙어 있으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워야지.”
지르힐의 눈빛이 다시 성현을 향했다. 그녀가 화난 얼굴로 성현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대!”
“쏘리.”
성현이 동굴 벽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은 알고 있어.”
성현의 신체는 이미 망가졌다. 양피지에서부터 그 많은 회귀자들이 가진 권능,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권능을 몸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가 퍼석해지며 말라붙어 간다. 심장이 요동쳤으며 내장이 흘러내리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
심지어 그 망가진 몸으로 엄청난 숫자의 존재가 쏘아 대는 마력을 그대로 받아 냈다. 지르힐이 상처를 치료했지만, 몸이 죽어 가는 걸 멈출 수는 없다.
“지금 눈을 뜬 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성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리피네를 죽였을 때, 이서아가 봤던 미래 때문이다. 당시 이서아는 말했었다.
“지, 지연우가 돌아올 거예요.”
이미 죽은 지연우가 무슨 수로 돌아온다고 한 것, 성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것은 플로르가 또 미친 짓을 한다는 것. 그리고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
“끝까지 싸워야지.”
지르힐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성현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현이 품에서 알약을 꺼내 씹으며 말을 이었다.
“넌 플로르의 성으로 가. 난 우리 세상으로 갈 테니까. 그리고 싸움이 끝나면…… 같이 밥 먹자.”
“그대!”
지르힐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대신 그녀의 펄럭이는 소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쓰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플로르는 강할 거야. 네가 구속당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강해졌거든. 그리고 너…… 팔 하나 없잖아. 마력이 새는 것 같은데, 조심하도록 해. 마지막으로…… 팔 하나 없어도 예쁘네.”
“뭐라?”
“예쁘다고.”
“지금 그게 무슨!”
하지만 지르힐의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성현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창고로 이동한 거다. 성현은 창고를 통해 인간 세상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
그렇게 그 자리에는 지르힐만 남게 되었다. 지르힐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씹었다. 입에서 한숨만 새어 나왔다. 그리고 지르힐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플로르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성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다.
* * *
인간 세상은 종말이 다가온 것과 같았다.
하늘과 땅, 바다에는 수십만이 넘는 존재와 짐승이 가득 했고 도심 곳곳의 벽에는 인간의 핏물이 흉측하게 묻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라디오에서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비명만 가득할 뿐이다. 흐르는 바람에는 피 냄새가 맡아졌다.
그리고 하늘을 떠다니던 용의 입에서 불덩이가 튀어나와 세상을 불살랐다.
“끄아아아악!”
용의 불은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다. 목표 대상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태워 버린다. 불에 맞은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로를 뛰어다녔다.
“살려 줘! 불 좀 꺼 줘!”
불에 탄 살이 녹아내렸고 그 냄새가 고약했다. 그 사람이 도로 한복판에 쓰러지자 그 위로 짐승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물론, 그들을 막기 위해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 병기와 페이트 길드의 길드원이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그 숫자를 막기는 어려웠다. 놈들의 숫자는 끝이었다.
“몇 곳만…… 몇 군데만 더 도와줘도 좋았을 텐데…….”
서은서의 입에서 아쉬움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의 전면에 나선 것은 페이트 길드뿐이었다. 나머지 길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며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도 이기적이었다. 전투가 계속되면 다른 길드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세상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자신들이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믿고 있어서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권력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기적인 생각이…….”
서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뒷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징징대고 있을 수는 없다.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세상은 플로르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 지금은 싸워야 한다.
“조, 존재가 과천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전령을 맡은 길드원이 빠르게 달려와 외쳤다. 그러자 서은서의 시선이 과천 쪽으로 틀어졌다. 전령의 말대로다. 꽤 많은 존재가 과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을 수놓은 숫자는 셀 수도 없다.
“아, 안 돼…….”
서은서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과천에는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가 운용하는 포병이 있다. 그들은 지금 그곳에 자리를 잡고 낭인과 함께 자주포를 쏘아 대고 있다.
“막아야 해!”
인간 병기와 페이트 길드가 그래도 존재의 군대와 비빌 수 있는 것은 모두 자주포 때문이다. 그것이 짐승을 견제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포가 쓸려 버린다면 승산은 최악으로 떨어진다.
“길드원에게 전해! 포를 지켜야 한다. 모두는 과천으로 이동……!”
그 순간이었다. 존재와 짐승으로 가려져 어두웠던 하늘이 뭔가 이상했다.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그곳에서 빛줄기 하나가 새어 나왔다.
“뭐…… 뭐야…….”
그 빛줄기가 붉은색으로 타오르더니 허리케인처럼 휘감겼다. 그 크기가 대단하다. 지방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그리고 그 빛줄기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서은서는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콰콰콰콰콰! 빛줄기의 옆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태풍의 거센 바람을 무시하듯 하얀 날개를 퍼덕이는 천사와 같은 존재 수백 명이 빛의 기둥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떤 천사는 금나팔을 불고 있고 또 다른 천사는 인간들을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머리를 쓰다듬고 오르는 놈도 있었다.
그런데 그 천사의 모습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천사는 인간 개개인이 생각하던 그 모습으로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천사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살로,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성녀로,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로.
놈들은 인간을 현혹하고 유혹할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인간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빛줄기의 붉은색은 더 짙어졌다. 피처럼 새빨갛게 그리고 검붉게, 마지막으로 점차 새하얀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는 봤다.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심지어 해외에서도 그 빛줄기를 보고 있었다. 물론, 눈으로 본 게 아니다. 느낀 거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구, 구원자?”
사람들은 구원자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빨을 드러낸 짐승과 사악한 존재를 물리치고 세상에 평화를 선물할 구원자.
“빛이 변한 색을 보라! 새빨갛던 것은 우리의 피요! 검붉은색은 짐승의 피라! 마지막으로 은빛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성스러운 힘이다! 모두 신을 맞이하라!”
신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중 몇몇은 빛의 기둥에서 내려오는 것이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조아렸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려올 자를 기다렸다.
“신이시여!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하소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빛의 기둥에서 한 사람이 계단을 걷는 것처럼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지연우였다.
* * *
경기도 과천.
동물원의 주차장에 자주포가 방렬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짐승과 싸우기 위해 기관총을 잡고 있던 자들 역시 보통의 사람과 같았다. 그들은 임무를 잊고 눈을 깜빡이며 빛의 기둥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센 바람으로 나무가 휘어지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빛의 기둥에서 내려오는 구원자 지연우였다.
“진짜…… 신이야?”
“신이 있는 거였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곳에 있던 이창민 중사가 담배를 입에 물며 옆에 있던 박상문 하사를 향해 마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건…… 뭐냐?”
“저도 모르겠는데요.”
“신은 네가 가지고 있던 것 아니었어? 그 신이란 것들이 아직 네 몸에 있는 거 맞지?”
“네.”
이창민 중사가 낄낄 웃으며 담배꽁초를 툭 버렸다.
“그럼 저것은 신의 탈을 쓴 악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