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사지를 찢는다고?”
플로르의 입술이 잘근 씹혔다. 그리고 그 입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히…… 나를?”
플로르는 지르힐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다. 태초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지르힐은 플로르를 깔보고 있다. 벌레를 보는 것처럼 혐오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다.
플로르가 입술을 움직였다.
“지르힐, 난 예전과 다르다.”
예전에는 무기력할 정도로 지르힐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지금은 다르다. 세상 모두의 입에서 비명을 내뱉게 만들 힘이 있다. 그런데 지르힐은 여전히 플로르를 무시하는 눈빛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나를 우습게 보느냐?”
“어.”
지르힐은 가볍게 대답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 손에서 금빛이 일렁이며 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파지지직! 스파크가 일었고 그것이 지르힐의 온몸을 감쌌다.
플로르는 그 모습을 보며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지르힐에게서 느껴지는 폭력적인 기운은 플로르라 해도 몸이 떨릴 정도였다.
지르힐이 플로르의 앞으로 자박자박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내려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
“끝까지!”
플로르의 눈에 분노가 채워지는 동시에 쥐고 있던 팔걸이가 ‘콰직!’ 소리와 함께 조각났다. 플로르가 내뱉는 지금의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한 거다. 태초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지르힐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자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플로르가 몸을 일으키며 지르힐을 내려다봤다.
“팔 한 짝으로 나를 상대할 수 있나 보자!”
지르힐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말만 할 거야?”
“난 예전과 다르다고 했다!”
프롤르의 입에서 벼락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플로르의 손에서 일어난 불덩이가 순식간에 지르힐을 향해 날아갔고 지르힐의 몸을 때렸다.
콰아아아앙!
지르힐의 몸을 강타한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불꽃에 닿은 벽과 커튼이 화마에 휩싸였다.
화르르륵!
하지만 플로르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나타난 검은 마력이 길게 뻗어지며 채찍처럼 움직였다. 그것이 지르힐의 몸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쾅! 쾅! 꽈광!
“죽어! 죽어! 죽어!”
이어지는 불덩이와 검은 마력의 폭발, 하지만 지르힐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서서 플로르의 모든 것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병력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성을 지키기 위해 남겨 둔 최소한의 병력, 하지만 그 숫자가 300여 명이나 되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들이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깜빡였다.
“……!”
마력을 난사하는 플로르와 불에 타는 성의 내부, 하지만 플로르의 공격을 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다. 지르힐의 주변에 검은 마력과 불꽃이 사정없이 퍼지고 있어서다.
하지만 병력들은 그 상대가 적이라는 것을 빠르게 간파했다. 그들의 손에서도 검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어머니를 도와라!”
후우우웅!
그들의 손에서 뻗어진 마력이 일제히 지르힐을 공격했다.
콰콰콰쾅!
거대한 마력이 이어지며 성이 흔들렸고 돌덩이가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접 전투에 능한 병사가 지르힐을 향해 튀어 들어갔다. 놈이 손에 쥔 칼을 꽉 쥐며 생각했다.
‘목을 벤다!’
놈이 칼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쩌정!
번개가 떨어지며 놈의 몸을 가격했다. 놈의 몸을 꿰뚫고 지나간 번개가 바닥까지 이어지며 ‘파직’거렸다.
“……!”
번개에 직격을 맞은 놈이 잿더미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놈은 눈도 감지 못한 채, 자신이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죽어 버렸다.
“버, 번개?”
그제야 병사들은 플로르가 마력을 쏘아 대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 지르힐?”
“지르힐이야…….”
“버림받은 악이 왔어!”
동시에 검은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한 곳에서 지르힐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플로르와 병사들이 온 힘을 다해 마력을 쏘아 댔지만 지르힐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다.
“어…… 어떻게?”
“저게 가능해?”
지르힐의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지르힐은 악마처럼 보였다.
지르힐이 그들의 기겁한 눈을 바라보며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스산하게 웃었다.
“전부 죽여 줄게.”
그 말과 동시에 지르힐이 창을 바닥에 꽂았다. 금색의 빛줄기가 번쩍이더니 강력한 번개가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쩌저저저정!
바닥이 뒤집어지며 나타난 번개가 병사들의 몸을 강타했다. 어두운 실내가 간헐적으로 번쩍였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몇몇은 번개를 피하기 위해 훌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지르힐의 번개를 피할 수는 없었다. 번개는 지그재그로 이어지며 병사들의 심장을 찢었고 몸을 태웠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살려 줘! 살려 줘!”
“싸워! 싸워야 해!”
그때 한 병사가 벽을 타고 뛰며 지르힐의 뒤에 섰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지르힐의 목을 베기 위해서다. 놈이 소리 없이 이동하며 단도를 손에 들었다.
‘지르힐을 죽이면, 나도 귀족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지르힐에게 다가서는 순간 천장에서 번개가 떨어지며 놈의 정수리를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콰지지지직!
“아아아악!”
놈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 가득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얼마 가지 못했다.
“시끄러워.”
지르힐의 말과 동시에 병사의 입이 녹아내리며 붙어 버려서다.
사방에 스파크가 가득했다. 번쩍이는 그것들이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남은 병사들은 지르힐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겁을 집어먹은 채 주춤주춤 물러섰다.
“싸워라! 무엇을 겁내느냐!”
플로르의 외침에 병사들이 턱에 힘을 주고 용기를 냈다.
“씨, 씨×!”
그들이 병기를 고쳐 잡고 지르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놈들의 몸이 검은 마력으로 휘감겼다. 지르힐을 상대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는 중이다.
하지만 지르힐에게 놈들의 행동은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르힐이 창을 툭툭 움직이더니 놈들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이어서 놈들이 맞부딪쳤다.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었다.
지르힐의 움직임에 뇌수가 비산했고 몸통과 분리된 얼굴이 허공에 떠올랐다. 놈들의 관절이 기괴하게 꺾이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콰직! 빠드드득! 꽈직!
지르힐의 창에 스치기만 해도 놈들의 몸은 갈가리 찢겼다. 믹서기에 들어간 것처럼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지르힐은 버림받은 악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강했고 잔인했다.
그런데 플로르는 그 심각한 장면을 보며 스산하게 웃고 있었다.
‘지르힐의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어. 팔이 왜 없나 했더니…… 사슬을 억지로 뜯고 나왔구나?’
지르힐은 사슬을 억지로 풀어내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 탓에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중이다.
‘지금의 지르힐은 대단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저 마력은 별것 아닌 게 될 게야.’
플로르는 그 시간이 되면 자신의 손으로 지르힐을 잡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플로르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네 마력이 소진될 때까지, 끝까지 숨어 있겠다. 날 찾아봐라, 지르힐…….’
플로르의 몸이 그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 * *
경기도 과천. 그곳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수많은 존재와 계약자, 짐승 그리고 낭인 들과 생체 병기들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우위에 있는 것은 존재였다. 인간들은 계속 죽어 나갔지만, 존재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한 존재가 손바닥 위로 검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점점 커지더니, 과천 전체를 덮을 만큼 거대해졌다.
“죽어라.”
콰르르르릉!
그 거대한 구체가 굉음을 내며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것이 떨어지면, 아파트는 모래처럼 무너질 것이고 과천은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이창민 중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망가진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움직였다.
“막아야 해…….”
이창민 중사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는 마지막 권능을 쥐어짜며 떨어지는 구체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 한다.
그런데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성현과 지연우가 싸우는 곳이었다.
“유성현…….”
성현과 지연우는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성현의 창이 궤적을 그리며 지연우를 찔러 댔고 지연우는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유리한 것은 지연우였다.
콰직!
성현의 뒤에 나타난 존재가 발을 휘둘러 성현의 등을 후려쳤다. 성현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 곧바로 지연우의 공격이 이어졌다.
‘젠장…….’
한 놈도 쉽지 않은데, 몇 놈의 공격이 동시에 이어지자 성현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성현의 신체는 붕괴되는 중이다. 싸우지 않아도 천천히 죽어 가고 있다.
“죽어!”
지연우의 검이 성현의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성현은 몸을 틀며 놈의 공격을 피했고 창을 휘둘러 놈의 척추를 끊었다.
하지만 성현은 기뻐하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의 일격에 지연우가 죽었겠지만, 놈은 존재의 피부를 이식받은 상태다. 상처가 재생되었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히죽 웃기까지 했다.
“너…… 약했구나?”
그 말과 동시에 지연우의 손톱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성현의 뱃가죽을 파고들었다.
“큭!”
시뻘건 피가 투투툭 쏟아졌다. 성현은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또 다른 존재가 성현의 머리를 가격했다.
뻐억!
성현은 몇 바퀴를 굴렀다. 재빨리 자세를 잡으며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훔쳐 냈다.
지연우와 존재들이 성현을 향해 다가오며 거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얌전히 따라오라. 그럼 죽이지는 않을 거다.”
성현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나를 인질로 삼으려고? 그래서, 지르힐을 어떻게 해 보려고? 미안한데, 지르힐에게 짐이 되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너희를 이길 수 있어.”
그렇게 말했지만 성현의 머릿속에 승리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일대일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게다가 그 한 놈, 한 놈의 권능이 만만치 않다. 성현은 진심으로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
순간, 성현은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툭툭 두들기는 것을 느꼈다. 살짝 시선을 틀어 보니, 이창민 중사였다. 이창민 중사가 힘겨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저걸 다른 곳으로 소환시킬 거다.”
성현도 느릿하게 떨어지는 거대한 구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태양을 가렸고 세상은 어둠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성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창민 중사의 몸 상태는 딱 봐도 좋지 않다. 저 몸으로 권능을 사용하면 반드시 죽는다.
“……안 돼요.”
“돼.”
이창민 중사가 녹아서 뭉뚝하게 변해 버린 손을 성현에게 뻗었다.
“받아. 상문이 유품이야. 네가 잘 간직하고 있어.”
성현은 박상문 하사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도착했을 때 박상문 하사는 이미 흔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유품이라니.
“바, 박상문 하사가 죽었다고요?”
성현의 서글픈 목소리에 이창민 중사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놈 몸에서 나온 돌덩이야. 그렇게 술 담배를 하던 놈인데, 몸에서 사리가 나오네.”
이창민 중사가 성현에게 건넨 것은 손톱만 한 돌멩이 2개였다.
그런데 그때 성현의 머릿속에 마법사의 음성이 다급히 스쳤다.
-에느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