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성현이 다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성현의 눈에 세상이 다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정지된 것 같은 세상이다. 그곳에서 성현은 평소처럼 움직였다. 허공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하늘에 떠 있던 존재, 그 한 놈, 한 놈의 몸을 자르고 베었으며 찔렀다. 존재는 몸이 꿰뚫렸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몸이 꿈틀대는 게 전부다.
심지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살을 베는 느낌은 확실했지만, 소리는 성현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
성현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신체의 붕괴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놈들의 몸을 도륙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성현의 시선이 검은 구체로 틀어졌다. 땅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 저것이 처박히면 지구는 멸종의 시대로 들어설 거다. 그 옛날, 운석이 떨어지며 공룡이 멸종했던 것처럼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게 분명하다.
성현은 코에 흐르는 피를 슥 훔친 뒤 구체를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뛰었다. 손에는 단 한 자루의 창이 들려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성현은 거대한 검은 구체 앞에 섰다.
쿠쿠쿠쿠쿠!
정지된 것 같은 시간이지만, 구체에 의해 공기가 떨리는 게 느껴진다. 손을 집어넣는 즉시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은 엄청난 마력이다.
하지만 지금 성현의 힘으로 이정도 마력을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조금의 타격은 받겠지만, 죽음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성현이 창을 휘두르기 위해 몸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검은 구체가 ‘화르르르륵!’ 하고 불덩이로 변했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녹일 것 같은 온도였다. 성현이 정말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성현은 이 불덩이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회귀 전, 플로르가 나타나기 전 만들어졌던 것. 그것은 시뻘건 지옥의 불덩이였다.
‘……!’
성현이 눈을 가늘게 뜰 때, 건물은 이미 녹고 있었다.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빌딩의 옥상이 액체처럼 변해 땅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 정도인 것이다. 만약 정상적으로 시간이 흘렀다면 세상은 지옥의 불덩이에 녹은 뜨거운 액체로 가득했을 거다.
성현이 입술을 꽉 씹었다. 지금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야 하는 것은 명확히 알고 있다. 저 불덩이를 막아야 한다.
‘견딘다.’
성현이 온몸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검은 갑주 역시 위기를 느꼈는지 우우우웅,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 * *
플로르의 성.
지르힐은 창을 툭툭 털며 앞을 바라봤다. 플로르의 성은 처참했다. 이제 방금 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이 부서져 있었으며 불에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지르힐의 앞에는 플로르를 도우려 했던 병사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지르힐이 입을 열었다.
“플로르?”
플로르는 보이지 않았다. 플로르는 도주했고 지르힐의 마력이 빠질 때까지 숨어 있기로 결심해서다. 지르힐은 그 뻔한 생각을 느끼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헛수고야.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어.”
플로르는 창조주의 저주를 받아 이동의 제한을 받았다.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평생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지르힐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서 스파크가 튕겨 나가더니 뱀처럼 꿈틀댔다.
“찾아라.”
그것들이 플로르를 찾기 위해 성 전체를 휘감았다. 이제 스파크는 지르힐의 눈과 귀가 되어 플로르의 숨은 곳을 찾아낼 거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르힐의 앞으로 수백 개의 그림자가 섰다. 플로르의 딸과 그 정예병들이다. 인간 세상으로 나갔던 그들이 플로르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그들이 복귀 명령을 받은 것은 성현이 에느가인을 삼키기 전이었다. 플로르는 지르힐의 마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시퍼런 갑주를 입은 노인이 지르힐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지르힐 님을 뵙습니다.”
“나를 알고 있다면, 나와 대적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알겠지. 살고 싶으면 비켜라.”
지르힐의 목소리는 섬뜩했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음의 안식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을 주는 게 지르힐 님이라면 더할 것 없는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르힐 님을 죽일 수 있다면, 그건 더한 영광이 되겠죠.”
노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수백 명의 존재의 몸에서도 폭력적인 기운이 몰아쳤다. 기운에 반응한 공기가 태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으며 공기가 찌릿거렸다. 이들은 지르힐과의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다.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었다.
“싸울 수밖에 없겠네.”
“지금 지르힐 님의 힘으로 저희 전부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놈들이 지르힐을 향해 튀어 나갔다.
콰지지지직!
* * *
플로르는 신하들에게 지르힐을 맡겨 둔 채 지하실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타박타박, 발소리가 불안하게 울렸지만 플로르는 더 속도를 냈다.
‘조금만…… 조금만…….’
플로르는 지르힐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몸의 모든 감각을 개방했다.
‘지르힐의 마력은 가만히 있어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플로르는 시간만 끌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버텨야 해! 그럼 진정한…….’
순간, 플로르는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지연우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신하들이 몸이 썰려 죽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로르가 멈칫한 것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플로르에게 신하들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식은 만들면 되는 것이고 지연우 같은 그릇 역시 또 찾으면 되는 거다. 플로르가 멈춘 이유는 하나, 창조의 저주가 풀린 것 같아서다.
플로르의 크게 떠진 눈이 주변을 둘러봤다. 예민한 감각을 더울 끌어 올리며 세상을 살폈다.
‘그 어떤 저주도 느껴지지 않아.’
플로르를 옥죄고 있던 제약이 사라진 이유는 단순하다. 창조주의 힘을 가진 로안과 게히얼이 성현의 몸속에서 녹아 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제약이 깨졌고 창조주를 향한 맹세가 사라졌다.
플로르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나갈 수 있어.’
플로르가 손을 뻗었다. 손이 불에 타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몸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 세상에 직접 가면, 그리고 그곳에서 성현을 사로잡으면…….
‘지르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 * *
그 시각, 성현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검은 갑주마저 휘감았다.
“부숴 버린다!”
성현이 창을 휘둘러 불덩이를 때렸다.
콰앙!
불덩이는 멀쩡했다. 오히려 넘실되는 불꽃이 성현의 신체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현은 멈추지 않고 다시 불덩이를 때렸다.
꽈아아아앙!
성현이 불덩이에 집중하며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존재의 몸이 반으로 갈리고 썰리며 요란한 비명이 하늘을 채웠다. 성현이 공격할 때는 들려오지 않던 소리가 이제야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하지만 성현은 그것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덩이를 때리고 또 때렸다.
성현은 회귀 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덩이와 함께 나타난 플로르, 이번에도 이 불덩이 속에서 플로르가 강림한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거다. 승리를 한다 해도 세상이 멀쩡할 수 없다.
‘안 돼!’
어머니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성현의 친구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는데, 모든 것을 불덩이에 처박을 수는 없다.
성현은 다시 창을 휘둘렀다. 신의 권능을 창끝에 집어넣고 세상을 부술 것처럼 움직였다.
콰지지지직!
불덩이가 깨졌다. 하지만 그것은 성현의 힘 때문이 아니다. 수백만 개의 불꽃이 떨어지며 세상을 불구덩이로 만들었다. 녹아내린 건물이 용암처럼 세상에 흘렀다.
“끼아아아악!”
“불이야!”
“살려 줘!”
불꽃에 닿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불꽃에는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짐승도 존재도 그리고 그들의 계약자도 불꽃을 피하지 못했다. 불덩이가 된 그들이 서로에게 뒤엉키며 계속해서 달라붙었다. 녹아내린 피부는 그들을 하나로 만들고 있었다.
“끄어어어억!”
성현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 이 광경은 회귀 전 봤던 것과 같다.
“강림하는 것인가?”
그때 성현의 귓가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야…….”
곧 플로르가 나타난다. 그런데 성현은 웃고 있었다. 양피지와 신의 마력이 뒤엉키며 성현의 생명력은 고작 몇 시간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플로르가 직접 나타났다. 찾으러 갈 시간을 벌어 준 거다. 성현이 몸에 닿은 불꽃을 털어 내며 자세를 잡았다.
그사이 녹아내린 생명들이 뒤엉킨 덩어리가 점차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시뻘건 지옥의 불덩이,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가 세상에 강림했다. 태산처럼 거대한 모습, 보는 것만으로 웅장했으며 그것은 싸울 의지를 없애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성현은 엄청난 속도로 플로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인사를 나눌 생각은 없다. 그저 짐승처럼 서로를 죽이면 되는 거다. 길게 찌른 창이 플로르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퍼어어억!
하지만 플로르에게 타격은 없다. 뚫린 곳에 불꽃이 일렁이더니 다시 채워졌다. 성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한 번에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저 쉬지 않고 플로르의 몸을 계속해서 관통했다. 쓰러지지 않으면,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면 되는 법이다.
푹! 푹! 푹!
플로르의 몸을 오가며 성현의 검은 갑주는 불꽃에 휩싸였다. 창조주가 만든 갑주가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한 채 녹아내렸다. 갑주로 보호되고 있는 성현의 몸 역시 성할 수는 없었다. 피부가 흉측하게 녹았고 피가 끓어올랐다. 생체 리듬이 깨졌으며 녹은 피부로 인해 눈꺼풀이 뭉개졌다.
-가까이 있지 마라! 떨어져라!
마법사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무의식의 세계 역시 긴급할 정도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대로 무의식이 무너지며 갇혀 있던 마력이 밖으로 흘러 나가면, 성현은 죽고 만다.
-지금 네 몸으로 저 온도를 견딜 수 없다.
성현은 마법사의 말을 듣고 플로르의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플로르의 시뻘건 눈동자가 성현을 찾아냈다. 천천히 머리를 숙이며 눈을 맞추더니 히죽 웃었다.
“한계를 느꼈는가?”
“아니.”
플로르는 성현을 비웃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성현은 인간이다. 플로르의 권능을 이겨 낼 수 없다. 플로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깔깔깔 웃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성현이 팔을 뻗었다. 검은 마력이 폭발하며 그 주변으로 지난 회귀자들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마법사의 분신에 회귀자들의 권능을 집어넣은 거다. 플로르가 그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들은?”
플로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멸망시킨 문명의 생명체가 성현의 손에서 재탄생되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귀자들의 숫자가 하늘을 까맣게 수놓았다. 놈들이 플로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흡혈귀의 형상을 가진 회귀자가 가장 앞서 움직였다. 이어서 도마뱀의 머리를 가진 회귀자가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뛰었다. 그들의 형상은 가지각색이지만 목적은 같다.
“죽어!”
“모여 봤자 벌레는 벌레일 뿐이다. 불나방은 아무리 달려들어도 불꽃을 이길 수 없다.”
흡혈귀 형상의 회귀자가 플로르에게 닿기도 전에 그대로 타 죽었다. 하지만 열기에 강한 회귀자가 플로르의 몸을 타고 뛰어올랐다. 손에 쥐고 있던 철퇴를 휘둘러 플로르의 얼굴에 박아 넣었다. 그게 신호였다. 다른 회귀자들이 일제히 플로르를 공격했다.
콰지지직!
콰직!
콰지지지직!
마지막으로 성현이 움직였다.
“이제 그만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