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지르힐?”
“그래, 나야.”
그 말과 동시에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콰르르르릉!
번개는 서은서와 싸우던 인간들의 정수리에 꽂혔다. 그들의 머리가 쪼개졌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지르힐은 빙긋이 미소를 그리며 성현의 옆에 마법사의 아들을 내려 뒀다. 그리고 흉측하게 변한 성현의 외모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못생겨졌네?”
성현은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지르힐을 향해 미소를 그렸다. 지르힐의 몸도 성치 않다. 백색의 로브는 핏물로 물들었고 남은 마력이 얼마 안 된다. 지금의 몸으로 저 많은 존재와 지르힐을 이기기는 어려울 거다.
성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5분만 쉴게. 그럼 충분해.”
하지만 지르힐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성현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됐다. 저들을 없애고 올 테니 이곳에 앉아 기다려라.”
그 말을 끝으로 지르힐은 몸을 틀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플로르의 불꽃이 다시 모이고 있었다. 지금은 정다운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다. 싸워야 한다.
지르힐이 다리에 힘을 줬다. ‘파아아앙!’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플로르의 신체가 재생되고 있는 불꽃이었다.
하지만 플로르에게 도달하기 전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플로르에게 꼬리를 흔들기 위해 나타난 수많은 군주들과 어머니급의 존재들,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플로르에게 도달할 수 있다.
지르힐이 손에 쥔 창을 빙글 돌리는 순간이었다. 존재들의 손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과 색색의 빛이 지르힐을 향했다.
콰콰콰쾅!
그들의 마력이 거센 파도처럼 지르힐을 덮쳤다. 지르힐의 몸이 흔들렸고 세상은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존재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지르힐이라 해도 저 몸으로 그들의 마력을 정면으로 맞서기는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폭풍 같은 마력의 잔해가 사라졌을 때,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존재들이 눈을 깜빡였다. 자신들의 공격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며 지르힐이란 공포의 이름을 다시금 떠올린 거다. 동시에 태초의 전쟁도 떠올렸다. 몸의 상처는 나아도 마음에 그어진 흉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그들은 당시의 지옥을 떠올리며 자신들도 모르게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젠장!”
“죽여!”
그들이 지르힐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겁을 집어먹은 몸짓으로 발악하는 거다.
지르힐은 존재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며 담담한 눈빛으로 창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지르힐의 머리 위로 존재 수백 명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사방을 감싸며 포위하기 위해서다.
“긴장해라! 상대는 지르힐이야!”
“목숨을 끊을 때까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쳐라!”
그들이 일제히 지르힐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지르힐이었다. 지르힐은 창을 고쳐 잡으며 찌르는 동시에 방향을 틀어 휘둘렀다. 그 창이 패턴이 없이 움직이며 상대를 도륙했다.
존재들은 지르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앞에 있다가도 뒤에 있었고, 위에 있다가도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서 달려들던 어머니급 존재의 머리를 콱 움켜잡았다.
어머니급 존재는 눈에 살기를 담아 지르힐을 죽이려 했던 존재다. 그런데 지금은 울면서 고개를 흔들고 있다. 살려 달라 비는 거다. 하지만 지르힐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심한 눈으로 그녀의 머리를 땅에 박아 버렸다.
콰지지직!
지르힐과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싸우는 전장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지르힐이 창을 휘두를 때다마 아스팔트에는 존재의 몸뚱이가 떨어졌다. 신경이 끊어지지 않은 팔과 다리가 꿈틀거렸고 베인 머리가 눈을 껌뻑거렸다. 세상은 그들의 몸뚱이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잘려 나간 존재가 바닥을 기며 절규했다.
“아아아악!”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오래갈 수 없었다. 지르힐이 땅으로 내려오며 그 머리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놈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지며 아스팔트에는 뇌수와 핏물이 촥 퍼져 나갔다.
세상은 적막했다. 지르힐을 죽이겠다고 용기 있게 외치던 놈들은 이제 없었다.
지르힐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하늘에 떠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눈동자를 내리깔며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제야 지르힐의 앞에서 그들의 몸짓은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 * *
존재들이 지르힐과 싸우고 있을 때, 플로르는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그녀는 태산과 같이 크지 않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불덩이도 없다. 평소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마법사…….”
플로르가 치아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법사의 자폭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다. 당분간 불덩이로 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플로르의 시선이 지르힐을 향해 옮겨졌다. 지르힐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약해져 있다. 거만한 눈빛으로 존재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팔과 다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플로르는 자신의 힘과 지르힐의 힘을 비교해 봤다.
‘지금이라면…….’
지르힐을 죽일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지르힐이라 해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마력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죽인다.’
플로르의 손에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드드드드드! 땅이 울렸고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지르힐 역시 플로르의 주변에서 마력이 모이는 것을 느꼈다. 플로르를 막기 위해 창을 꽉 쥔 채 그녀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이제 지르힐을 막아서는 존재는 없었다. 모두 겁을 집어먹은 채 발발 떨고 있을 뿐이다.
“이제 너 혼자네?”
지르힐의 말에 플로르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언제까지 건방 떨 수 있는지 보자.”
“기대해 봐.”
지르힐이 땅을 ‘쾅!’ 하고 박차며 플로르를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플로르의 손에서 마력이 부풀어 올랐다. 허공이 찢어지더니 지옥의 문처럼 어두운 세상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지옥의 불꽃이 뱀처럼, 그것도 수천 마리가 튀어나와 지르힐을 향했다.
지르힐은 플로르의 공격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불꽃의 뱀이 지르힐의 팔과 다리를 움켜쥐었다.
플로르가 시뻘건 눈으로 지르힐을 노려보며 외쳤다.
“와라! 넌 지옥의 불꽃 안에서 죽고 말 거다!”
콰르르르르르릉!
자욱한 먼지가 세상을 뒤덮었다. 세상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먼지가 점차 가라앉을 때, 성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져 있는 지르힐이었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땅에 쓰러져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지르힐!”
성현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흘렀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지르힐의 고개가 조금씩 틀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성현을 바라봤다. 성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다. 그 앞으로 플로르가 깔깔거리며 다가와 지르힐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그리고 세상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세상의 관리자여, 버림받은 악이여…… 오늘로 창조주의 모든 룰은 깨졌다. 이제 이 세상은 내가 관리할 것이며…….”
세상을 울리는 플로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깨물린 입에서 붉은 피가 질질 흐를 정도였다.
“너만은…… 반드시 죽인다.”
성현이 왼손을 뻗어 땅에 떨어진 창을 쥐었다.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고 비틀비틀 걸었다. 성현의 몸은 죽어 가는 중이다. 살점이 떨어져 너덜거리는 근육이 드러났고 뼈가 보였다. 하지만 플로르의 얼굴을 한 번 갈겨 주지 않으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성현이 지나간 자리에 은빛이 수놓이고 있었다. 그 빛에 닿은 마법사의 아들에게 혈색이 돌아왔다. 무너진 건물이 시간을 역행한 것처럼 쌓여 올라갔다.
그리고 성현의 신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녹아내린 살이 제자리를 찾았으며 떨어져 나간 곳에 새살이 돋아났다. 심지어 잘려 나간 오른팔도 빛줄기가 휘몰아치며 재생되었다.
성현의 걷는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이제 비틀거리는 걸음은 없다.
에느가인이 성현의 몸에 완벽히 흡수된 거다. 신체는 그 힘을 견딜 수 있도록 재구성되었고 폭발할 것 같던 마력도 안정을 되찾았다.
쉬이이이이익!
성현이 엄청난 속도로 플로르를 향해 날아갔다. 그 속도에 거센 바람이 일었다. 주변에 있던 존재들은 그 태풍 같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쓸려 갔다. 이곳저곳에 처박히며 비명을 질렀다.
플로르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성현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성현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온몸에 은빛을 휘감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 속도는 플로르의 인지를 넘어선 상태였다.
플로르는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한 발을 움직이기도 전에 저 멀리 있던 성현이 이미 코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꽈지지직!’ 하고 성현의 주먹이 플로르의 광대뼈를 부수고 지나갔다.
플로르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성현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꽈직! 콰직! 꽝!
플로르는 도망치기 위해 손을 휘저었지만 성현에게 그 모습은 슬로모션과 같았고 그저 사냥감일 뿐이었다.
성현의 주먹이 플로르의 복부에 꽂히자 그녀의 몸뚱이가 활처럼 휘어졌다.
“쿨럭!”
플로르는 내장이 터지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그리고 살기 위해 허공으로 뛰었다. 하늘로 올라가 성현의 머리 위로 마력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접어야 했다. 성현이 플로르의 발목을 잡은 채 채찍처럼 땅에 집어 던졌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아스팔트에 갈아 버렸다.
쾅! 쾅! 쾅!
플로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승리가 가까워졌는데, 뜬금없이 성현이 나타나 자신을 짓밟고 있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감히 인간 따위가!”
플로르가 분노했다. 그때 성현이 플로르의 오른쪽 발목을 쿡 밟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와자자작!
성현이 힘을 주자 플로르의 발목은 두부처럼 으깨졌다.
“아아아악!”
하지만 성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 발목에 발을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발목, 무릎, 고관절…… 모든 관절을 으깨 버릴 거야. 비명은 질러도 좋아. 듣고 싶었거든. 지금부터 죽고 싶다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줄게. 잘 배워라.”
“이, 이 미친 새끼…… 끼아아아악!”
성현은 계속해서 플로르의 몸을 짓밟았다. 뼈가 튀어나오고 피가 튀었다. 플로르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그때마다 성현에게 붙잡혀 땅에 처박혔다.
플로르의 모습은 처참했다. 짧은 시간 이어진 고통에 삶을 포기했다. 성현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욕망이 가득했던 눈동자에는 영혼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성현은 플로르의 포기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성현이 창을 들어 플로르의 턱을 치켜세운 후 입을 열었다.
“아직 삶을 포기하지 마. 넌 쉽게 죽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