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플로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플로르는 죽음조차도 성현의 뜻을 따라야 했다.
“아아아아악!”
플로르가 악에 찬 분노를 내질렀다. 그녀는 억겁의 시간을 살며 끝없이 신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마지막은 어이없을 정도로 덧없었다.
“내가! 내가! 내가! 아아아악!”
“넌 끝났어.”
성현은 플로르의 머리를 창으로 툭툭 두들긴 후 몸을 틀었다. 부서졌던 건물이 다시 세워지는 게 보였다. 갈라졌던 땅이 다시 붙었고 사방을 채웠던 용암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심지어 존재와 짐승들에 의해 죽었던 사람들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며 이곳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박상문 하사도 있었고 이창민 중사도 있었으며 마법사도 보였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께 기도했다. 종말을 눈으로 본 그들은 지금까지의 죄를 회개하며 성실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현의 권능이었다. 성현은 에느가인을 흡수했다. 신을 몸에 담은 게 아니라 그 권능을 흡수해 버린 거다. 지금 성현의 권능은 신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내뱉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의 기억은 곧 모두 사라질 거다. 성현은 이 지옥 같은 기억을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성현의 옆으로 지르힐이 다가왔다. 그녀 역시 멀쩡한 상태다. 잘려 나갔던 팔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살핀 후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봤다.
지르힐은 성현의 몸에 담긴 마력에서 창조주와 로안 그리고 게히얼이 뒤섞여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이 기적 같은 상황이 성현의 권능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고……. 이거 어떻게 할까?”
성현이 시선을 틀어 만신창이가 된 플로르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친 플로르가 중얼거렸다.
“그냥…… 죽여라.”
“끝까지 반성을 안 하네.”
성현이 플로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플로르를 감쌌다. 플로르의 피부가 노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늙어 가는 것을 느낀 플로르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늙는 게 싫었다. 영원히 아름답고 싶었다.
하지만 성현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플로르의 아름다웠던 얼굴에 주름이 지어졌고 치아가 빠지며 탄력 있던 볼살이 움푹 팼다. 그 모습은 동화 속에 나오는 추악한 마귀할멈과 같았다.
플로르가 비참한 모습으로 고개를 흔들 때였다. 성현은 플로르의 배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마력의 원천인 코어, 그 옛날 가짜 에느가인이 폭발하며 그녀의 몸속에 들어갔던 파편을 꺼내기 위해서다. 코어가 빠지면 플로르는 평범한 생명체가 된다. 지금껏 세상을 공포로 몰아세웠던 권능은 사라지고 만다.
“안 돼!”
플로르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성현의 손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코어가 들려 있었다. 성현이 조용히 코어를 바라봤다. 그리고 힘을 꾹 주자 ‘콱!’ 소리와 함께 코어는 먼지처럼 부숴지며 땅에 쏟아졌다.
이제 플로르의 눈에는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플로르를 보며 성현이 입을 열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야.”
에필로그
경기도 양평, 넓은 마당에 모던한 디자인이 인상적인 단독 주택이었다.
눈이 사박사박 내리던 그날, 성현은 거실의 벽난로 앞에 앉아 멍하니 불을 보고 있었다. 장작 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그런데 성현의 옆으로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눈망울을 빛내며 다가왔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뭐가?”
성현의 질문에 아이들이 재촉했다.
“어제,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까지 말했잖아요. 그다음 해 준다면서요. 어떻게 됐어요?”
“아…… 그 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사라졌어. 존재나 계약 그리고 짐승에 대한 모든 기억이 없어진 거지.”
“그…… 신이 된 사람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응.”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말에 두 꼬마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고생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주면 섭섭하지 않을까요?”
“그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니라서, 섭섭하지 않을걸. 그리고 함께했던 동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에이…….”
성현이 전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신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 주인공이 조금 더 멋진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었나 보다. 명예를 얻거나, 세상을 멋지게 통치하거나. 하지만 성현이 꺼낸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
“처음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어. 사회의 구조가 존재들과 계약자, 길드 등에 맞춰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신이 된 주인공은 그들의 사회에 조금 개입을 했지. 기억을 조작하고 짐승과 존재가 없던 시절처럼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거야.”
그 일은 시간을 정지한 상태로 3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아이가 성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입을 열었다.
“꼬마는 어떻게 됐어요?”
“왕이 됐지. 하지만 그다음은 몰라. 이제 이계와 인간 세상은 서로 교류할 수 없어. 모든 문이 닫혔으니까. 하지만 잘할 거야. 카심의 아들이니까.”
“이제 그 존재들도 죽어요?”
“응, 저주가 풀렸잖아. 나이가 들면 하늘 나라로 돌아가겠지. 천사도 마법사도 그리고 그 신이 된 사람도 자연스레 하늘 나라로 갈 거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여자아이가 성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플로르는요? 안 죽인다고 했잖아요.”
“탑에 갇혔어.”
“그 천사가 감금되어 있던 탑이요?”
여자아이는 겁을 내고 있었다. 천사가 풀려난 것처럼 플로르 역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두려운 거다. 성현이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마력을 모을 수 있는 코어가 사라졌잖아. 고통 속에서 외롭게 죽어 갈 거야.”
이번엔 남자아이가 물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요. 나오면요?”
“글쎄,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면,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가 또 나타날지도 몰라.”
아이들이 몸을 오들오들 떨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거실 옆의 문이 열리더니 마법사가 머리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삼촌!”
아이 둘이 마법사를 향해 달려가 안겼다. 마법사가 빙긋이 웃으며 손으로 마당을 가리켰다.
“눈 온다. 눈싸움하자.”
“오빠도 왔어요?”
“밖에서 눈사람 만들고 있어. 어서 나와.”
“와!”
아이 둘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법사의 아들과 뒤엉켜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신이 난 목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올 때, 마법사가 성현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나와. 눈싸움해야지.”
“추워, 텔레비전이나 볼래.”
“텔레비전은 계속 볼 수 있잖아? 하지만 눈은 매일 내리지 않아.”
“내 꿈이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거란 것 알잖아?”
성현은 엉덩이를 끌며 벽난로 앞으로 더 다가섰다. 텔레비전에서는 ‘페이트 그룹 서은서 회장 취임’이라는 자막이 떠올라 있다. 성현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뜬금없이 모델로 활동하는 이서아의 얼굴이 보인다.
‘반갑네.’
하지만 반가운 얼굴을 더 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텔레비전의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성현이 홱 고개를 돌리자 마법사가 리모컨을 들고 낄낄 웃고 있었다.
“어차피, 쟤들 오늘 밤에 온다고 했잖아? 눈싸움이나 해.”
성현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아직도 눈싸움이 좋아?”
“애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쟤들은 크면 우리랑 안 놀아 줘. 그러니까, 지금 해야지. 나와!”
마법사가 성현을 질질 끌기 위해 어깨를 잡았다. 성현이 “갈게, 갈게.” 하고 귀찮은 듯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외투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애들한테, 옛날이야기 해 줬거든.”
“어떤?”
“플로르.”
“……그걸 이야기했다고?”
마법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로르와 싸웠던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네가 내장 꺼낸 것도?”
성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마법사를 바라봤다.
“내가 바보냐? 애들한테 그런 것을 이야기하게?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그냥, 동화처럼 말해 줬어.”
“다행이네.”
“그런데 애들이 플로르가 무섭대.”
“응?”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성현은 아이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전했다. 조용히 말을 듣던 마법사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웃으면 바닥에 뒹굴 것 같다. 그렇게 한참 웃던 마법사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와…… 플로르가 무섭다고? 자기 엄마가 더 무서운 거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그런데 넌 그 무서운 존재를 천사로 표현했고? 미쳤네.”
“악마라고 표현하면 죽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천사는 아니지. 악마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그때였다. 낄낄거리던 마법사의 얼굴에 미소가 증발했다. 그가 겁먹은 눈동자로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그곳에 지르힐이 서 있었다. 금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지르힐이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무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쏘아봤다.
“……악마?”
마법사가 식겁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게임 이야기하는 거야, 게임. 요즘에 재밌는 게 나왔더라고. 설마, 우리가 너한테 악마라고 하겠어? 넌 천사지. 날개만 없을 뿐이야.”
하지만 지르힐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법사가 억지로 웃으며 말을 돌렸다.
“우리 지금 눈싸움할 건데? 같이…… 할래?”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싸움할 시간 없어. 애들은 놀게 하고 마트에 가서 장이나 봐. 밤에 손님 오잖아.”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 그리고 서은서와 이서아가 집으로 온다.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와 짐승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지만, 성현과 함께했던 그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성현의 작은 욕심 때문이었다.
성현이 마법사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장이나 보러 가자. 눈싸움은 다녀와서 하고.”
“응…… 악마의 지시를 어기면 안 되는 법이지.”
마법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뒤에서 지르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마법사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설마 들었나?’ 하는 얼굴로 천천히 몸을 틀었다.
“지르힐? 미안한데…….”
그런데 지르힐이 보는 것은 마법사가 아니다. 다정한 눈길로 성현을 바라보며 자박자박 다가왔다. 그리고 성현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먼지 묻었어.”
성현이 빙긋이 웃으며 지르힐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럼 다녀올게.”
마법사는 두 사람의 애정 표현을 보며 헛구역질을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가 지르힐이 째려보자 곧바로 방긋 웃으며 “보기 좋아.”라고 중얼거렸다.
성현이 마법사와 함께 마당으로 나섰다. 현관에서는 지르힐이 손을 흔들며 말한다.
“운전 조심해.”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떨어지는 눈발을 잡기 위해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다. 그러다가 마실을 나갔다가 돌아온 성현의 어머니를 향해 달렸다.
“할머니! 나도 눈사람 만들어 줘!”
성현이 몸을 빙글 돌리며 그 모든 상황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