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어둠은 가까이 있을수록 짙은 법입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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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둠은 가까이 있을수록 짙은 법입니다.
별채를 나와 본관으로 가는 동안
내 손에서 달랑거리는 남자의 목을 본 이들의 비명이
퍼지는 것은 당연했다.
- 둘째 도련님이 미쳤다는 사실이.. 진짜인가 봐..
- 얘! 쉿! 조용히 해!
- 어떡해.. 나 너무 무서워..
- 별채로 시녀 보낸다고 하던데.. 어떡해..
- 어디로.. 가는.. 총관님 방으로 가는데..?
집사와 시녀들이 소리를 죽여 떠드는 소리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벌컥!
"누가 감히 노크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소리치던
이카인 총관이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라이거 가문의 총관부 총관 이카인 아드린이
라이거 가문의 카온 도련님을 뵙습니다."
이 인사법이 별채로 찾아왔던
집사부 사람이 갖춰야 할 예였다.
툭. 데구르르.
예를 취하는 이카인의 발치에 남자의 목을 던졌다.
"제 2 백작 부인과 백작의 아들인 나를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기에 왼쪽 팔을,
정식 인사에서 어머니를 샤를님이라 부르고
나를 카온님이라 부르기에 오른쪽 팔을,
그자가 바라는 곳이 라이거가 아니라
다른 곳이기에 목을 베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건가요?"
총관은 남작이라는 귀족, 나는 백작가의 자제.
그에게 목을 잘라버린 집사부 사람처럼
말을 낮출 수 없었다.
"없..습니다."
"저 목의 주인은 집사부의 사람이기는 하나
라이거 영지와 영주성의 대소사를 모두 관리하는
총관부가 집사부에서 사람을 보낸 이유를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라이거 영지의 관리와 라이거 가문의 사업과 외교,
정책 등을 관리하는 가신들이 모여있는 총관부.
영주와 그 일가의 시중과 영주성의 청소, 요리,
심부름 등을 관리하는 집사부.
두 집단의 차이는 확실하나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는 것도 분명했다.
이카인은 집사부에서 별채로 사람을 보냈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면,
총관부가 아니라 집사부로 찾아가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말할 처지가 되지만,
총관의 자리는 그냥 오른 것이 아니었다.
"별채에서 일하던 집사부 인원들의 처후와
도련님께서 요청하신 인원에 대한 논의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집사부의 사람에 의해
도련님의 심기가 어지러워진 상황이니
총관부에서 맡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히 허리는 숙이는 총관.
"메턴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든..
피에 금이 흐르는 이들이든..
별채에 왔다가 살아 돌아가고 싶거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천천히 펴지던 총관의 허리가 뚝 멈췄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나가려다
잠시 발을 멈추고 총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카인 아드린 남작님.
총관님의 라이거 가문에 대한 충심은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총관님의 충심이 너무 깊다는 것이
총관님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총관님의 충심을 삽이라 생각하고,
충심이 향할 곳을 땅이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어둠은 가까이 있을수록 짙은 법입니다."
15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과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서는 카온의 등을 이카인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서늘한 눈빛, 그 눈빛보다 자신의 심장을 옥죄던
담담한 말을 남기고 둘째 도련님이 나가자
이카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충심은.. 삽이고.. 충심이 향할 곳이 땅이라..
어둠은.. 가까울 수록.. 어둠다라.."
이카인은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라메스! 삽을 가져오라!"
"네? 삽..을요?"
"당장!"
"네! 총관님!"
*
총관부 직원이 가져온 삽을 들고
이카인이 어디론가 향한 시각.
카온의 행동을 전달받은 이자벨과 두 아들은
이자벨의 방에 모여 있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 호리페.
그 천한 것의 만행을 듣고도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생각이 있는 게로구나?"
이자벨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린 호리페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어머니! 제가 아카데미에서 본 병신 중에
가장 많이 본 병신들이 어떤 부류인지 아십니까?"
"병..신? 아들아.. 그래도 말은 곱게.."
"아차! 하하 오늘만 이해해 주시지요. 하하.
특별한 사유가 없는 귀족가의 자제와
귀족가에 속하기 위해 미천한 재능
갈고닦은 평민의 자식이 16살에 입학해
3년을 아카데미에서 보냅니다.
그곳에서는 가문의 힘 성적이고,
가문의 돈이 성적이며 가문의 인맥이 성적이죠."
호리페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던 아이젝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아카데미에서는 신분이 존재하지않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아우야. 일라인의 건국 왕께서
그런 뜻으로 세운 아카데미라지만
그곳에서도 신분은 존재한단다.
아무튼, 어머니."
"그래. 계속 말해 보거라."
"귀족가의 자제들이야 어려서부터
가문의 연공법을 공부하고,
가문의 검술이며 마법을 배워 오지만,
평민들은 아카데미에서 배우면서 점점 발전하죠..`
그런 인간 중 꼭 커져 버린 힘에 취해
같은 평민에게 해를 가하고 빈민가들 쓰레기들에게
칼과 마법을 몰래 쓰는 것들이 있지요.."
아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자벨이
손뼉을 짝! 친 후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 그래! 밟으니까 꿈틀하고!
꿈틀하다 보니까 힘이라도 있는 줄 알았나 보구나!"
"그렇지요. 카온 그놈이 쫓아낸 것도 집사와 시녀!
오늘 죽인 집사부 사람도..
마나 홀 하나 없는 사람일 뿐이지요.
지금은 자기 잘난 맛에 취하게 두시면 됩니다.
취하면 취할수록 올해 말! 몬스터의 피가 난무하고
오러 소드의 빛이 춤을 추는 곳에 가면!
자기가 얼마나 병신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호호호 그렇구나! 그래! 호호호"
"네! 그 병신은 이제 막 오러 홀을 열고,
검술을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는
우리 아우에게도 맞는 병신이니까요 하하하"
이자벨과 두 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카인는 영주성 뒷 뜰로 이동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땅을 파기 시작했다.
라이거 가문에서 내려주는 영지를 마다하고
총관으로서 라이거와 함께한 아드린 남작가.
아드린 남작가의 충심은 왕국이 아닌
라이거 가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는 왕가를 비롯해 대 귀족들의 부러움을 사기도했다.
"흡! 흡!"
아드린이란 성을 받기 전부터 이어진
충심을 담아 땅을 파 내려갔다.
- 총관님의 충심이 너무 깊다는 것이
총관님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
시녀 출신 백작 부인의 아들이자
지금까지 조용했던 둘째 도련님이
잘린 목을 들고 찾아와 한 말이 떠올랐다.
"충심이! 깊다는 것이! 뭐가 잘 못이란 말인가!"
가문이,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충심이 부정당한 것 같아
악으로 삽질을 해나갔다.
"헉.. 헉.."
얼마나 땅을 팠을까.
기울어져 가다 못해 페페 자작가의 금전적 지원 없이는
버티기 힘든 라이거가 만큼
자신의 충심도 점점 힘을 잃어 가는 것인가.
삽을 든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위로 퍼 올리던 흙이 힘이 닿지 않아
다시 떨어지는 모습에 이카인은 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밝음은 어둠이 되었고 첫 삽을 펐을 때 떠 있던 해는
이미 달이 되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하.. 달 한번 밝구나.."
둥근 저 달이 자신의 충심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깊게만 깊게만 파서 다행이지..
넓게 팠으면 올라가지도 못할 뻔 했구나.."
양쪽 벽에 발을 고정하고 힘겹게 올라와 땅을 밟았을 때
이카인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충격에 휩싸였다.
"아.. 저 달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저 달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구나.."
남편이 삽을 들고 무작정 나가
땅만 판다는 소리는 들은 자신의 부인이자,
이름만 시녀장일 뿐인 라이나 아드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와 옆으로 아드린 남작가의
시녀와 집사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서있고,
부인의 맞은편, 즉 아카인의 왼쪽으로는
자신을 따르는 총관부 사람들 몇몇이 나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 깊기만 한 충심은.. 내 눈을 가리는 구나.."
- 어둠은 가까이 있을수록 짙은 법입니다. -
문득 둘째 도련님의 두 번째 말이 떠오르자
달빛에 생긴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발아래 가장 짙은 어둠.
"후.. 저 어둠 속에 비수가 내 발목을 긋는다면..
나는 저 여인과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쓰러졌겠구나.."
이카인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자신의 양옆을 한 번씩 둘러보고는
둘째 도련님 있는 별채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
총관부에서 나온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어머니의 방이었다.
"어머니.. 많이 놀라셨죠?"
"후..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구나..
카온아.. 묻지 않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구나..
도대체 하룻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꿈을 꾸었다 했더냐.."
어머니의 물음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여졌다.
2년 뒤 아버지가 독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프레시아가 험한 꼴을 당하고 생을 마감하며..
라이거라는 이름은 존재하지만,
라이거 가문의 주인은 라이거가 아닌 페페 이며..
페페의 욕심이 과해 결국 파실리온의 손에 들어가는
결과만 알고 있던 지난 삶.
서스 파실리온에 의해 목이 떨어지고
어둠을 헤매다 주신 포르테의 은혜로 만나
그들의 삶을 느끼고 그들의 지혜와 힘을 배웠으며,
주신과 계약한 선조들의 댓가를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왔다. 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네.. 꿈을 꿨습니다.
아주 비침하고 억울한 삶을 사는 저를 봤지요..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괴롭힘이 무서워 검을 놓은 삶을 보았고..
어리숙한 행동으로 가족과 영지민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그건 네 탓이.."
"물론, 저 혼자만의 탓과 저만의 잘못은 아니지요..
하지만 제 탓이고 잘못이기도 합니다..
제 1 부인의 말을 잘 들으며 형을 따르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도.. 편해지고.. 프레시아도..
행복한 날이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참았더니 더 참으라 하고!
견뎠더니 더 견디라 했습니다.
하나를 내주었더니 다른 하나를!
다시 하나를 주었더니 또 내놓으라 했습니다.
네.. 꿈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아들의 말을 곱씹으며 묵묵히 듣고 있던 샤를은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카온은 모르고 있을 테지만 남편이
이자벨과 집사장 케인의 눈을 피해
본채와 별채가 이어지는 지하 통로로
자신을 찾아와 한탄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들을 위해
무언가 힘이 되어 주고 싶었던 샤를.
"내가.. 귀족이 아니였다는 것이..
힘이 없다는 것이.. 분하구나.."
분한 듯 입술을 깨무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분명.. 저는 많은 피와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피에 물든.. 저를.."
"주신 포르테님의 품에 너의 자리가 없게 된다 해도..
내 품에는 언제나 너의 자리가 있을거란다.."
"어머니.."
다음 날 아침.
아직 피의 향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접견실에서 나와 이카인이 마주 앉아 있다.
"표정이 변했군요."
"빛과 따뜻함이 해와 달에만 있다는
오만함을 버린 탓이겠지요."
"총관님께서 느낀 빛과 따뜻함이
해와 달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러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 주와 이번 주..
도련님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저번 주와 이번 주 도련님 주변은
전혀 변한 것이 없지요.."
아키인이 말한 저 말의 의미와
다음에 이어질 질문들이 예상이 갔다.
왜 15년, 아니 오러 홀을 익히고
검을 손을 잡은 후 5년 동안 가만히 있었냐,
호리페보다 검과 책을 멀리하고,
아이젝보다 검을 멀리했다가 이제 와서 이러냐,
후계자 싸움에 발을 담그기에는
페페 자작가의 힘을 엎고 있는 호리페와 달리,
시녀 출신 어머니를 두고 있는 나는
도와줄 사람이 없지 않나,
힘을 숨기고 있었다면 조금 더 세력을 키운 뒤
힘을 드러냈어야 하지 않나 등.
"힘을 숨기고.. 기회를 본다라.. 이카인 총관님."
"네. 도련님.."
"힘이 있기에 힘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린다라..
그 기회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후라면..
그것은 기회를 기다라는 현명함이 아닌!
기회면 기다라는 멍청한 짓입니다."
"아.. 힘이라면..."
"이카인 총관님. 이카인 아드린 남작님.
그대는 제 사람이 아닙니다."
이카인 아드린. 그의 충심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충심은 라이거 가문과 가주에 한해서다.
라이거 가문과 가주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향해지는 충심.
그의 눈빛이 변했지만, 그는 어머니와 나,
프레시아의 별채 행에 찬성했던 인물 중 하나다.
나는 내 사람,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아닌 이상
먼저 내 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힘을 숨기지 않지만,
힘을 숨기는 방법이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숙이는 이카인이었다.
"그렇군요.. 질문의 답 감사합니다.
어제 집사부 사람이 왔고,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두 가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귀족 모독죄로 감옥에는 있는 집사와 시녀들은
일주일 뒤 영지에서 추방당할 예정입니다."
왕국 법에 따르면 귀족 모독은
당사자가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사형이다.
하지만 나와 어머니, 프레시아를 모독했던 이들은
당사자인 우리가 용서하지 않았음에도
사형이 아니라 추방형을 받았다.
"하.. 추방이라.. 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추.방.이 아니라 페페 자작령으로
금.의.환.향.이라고?"
"죄송합니다.."
내부의 일이기에 이자벨이 주관했던 일이다.
이카인은 자신이 형을 확정 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이고,
"됐습니다."
나도 이를 알기에 그냥 넘어갔다.
"음.. 두 번째는 올해 말,
도련님도 토벌에 참가하라는 명입니다."
"말을 바로 해야지요. 아버님의 명이 아니라
제 1 부인과 호리페 형의 명 아닙니까?"
"큼.. 토벌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나이는
16살 이후이니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나이 16살.
이 16살의 나이는 귀족 자제들이
처음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나이다.
아카데미와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첫해에는
비록 기울어져 가는 가문이지만,
일라인 왕국의 `네 기둥` 가문 중 하나라는 것에
주목받고, 다음 해부터는 몬스터 토벌의 전공으로
또 주목을 받게 된다.
과거의 영광과 당연한 것을 통해
과시하려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무슨 의도인지 뻔히 보이는데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네?"
"아닙니다. 참여한다고요. 제가 속한 군은요?"
"영주님과 제 2 기사단은 1군으로 남부,
세 도련님과 제 1 기사단은 2군으로 남서부입니다."
"아이젝도?"
"네. 이미 경험해 보고 싶다며 직접 청을 올렸습니다."
아이젝 라이거.
형인 호리페 앞에서는 쥐죽은 듯 조용하고
형의 뒤만 따르는 동생이척 하지만 욕심 많고,
형의 뒤를 치기 위해 힘을 키우던 망나니.
"남동부는 역시 페페 자작령의 지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나에 대한 지원은?"
"없습니다.."
"있다고 말했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일 테지요.
그럼 한 달 뒤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들을 추방 보낸 것는 내가 어쩔 수 없지만..
옷으로 가려지는 메이의 몸 곳곳에..
멍 자국이 있더군요..
넘어져서 생겼다.. 일하다가 생겼다는 그녀의 말을
제가 너무 믿어버렸네..
제가 그녀에게 지은 죄는 어떻게 씻으면 될까요?"
"팔과 다리 중 한 곳은 성하지 않게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제 죄를 씻을 수 있기를 바라죠."
이카인이 돌아가고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올해 말이라.. 약 두달 남았군..
우선 시조님의 무덤을 다녀오고 다음은.. 해독제."
*
라이거 가문의 시조 필립 라이거의 무덤 방문의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라이거 가문의 핏줄을 이은 자와
그의 배우자만 허락된 공간.
필립 라이거의 유언에 따라 이름 뒤에
라이거라는 성이 붙은 이들은
누구나 방문을 요청할 수 있었고,
그 요청은 영주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가능했지만,
영주는 요청을 거부할 할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무덤을 훼손하거나 허가 없이 들어간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반역의 죄를 물어 참형에 처했다.
"시조의 유언이 없었더라면.. 이자벨이 어떻게 해서든
내가 무덤을 방문하는 것을 막았겠지.."
제 아들이 유일한 혈통이요,
후계자라 생각하는 이자벨이라면
내가 시조의 무덤을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치욕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으니 문밖에서
아직은 익숙지 않은 하녀의 노크 소리가 들린다.
마차로 한 시간 거리일 뿐이지만
나의 외출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외출이었기에
혼자 나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시녀인 메이가 따라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그 유일하다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메이가 나를 따라나서게 되면
어머니와 프레시아가 시녀 하나 없이 있게된다.
그래서 이카인은 카온의 요청에 따라
메탄강의 은혜를 받은 시녀를 보내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속한 곳이 있어
보직을 변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카인은 단 하루, 또는 며칠이면 된다는 생각에
카온에게 메탄강의 은혜를 입어 태어난 하녀를
허리 숙여 권했고 나는 그것을 허락했다.
이제 막 교육을 시작했을뿐더러
나의 사람이 아닌 하녀를 어머니 곁에 둘 수 없어
결국, 내가 데려가기로 했다.
머리를 땅에 박은 채 덜덜 떨기만 했던
어제 처음 만난 여종의 목소리가 들린다.
- 도..도련님! 주..준비 다..됐습..니다!
집사와 시녀와 하녀와 하인.
똑같이 귀족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을 말하지만
속한 부류의 신분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왕국과 왕가의 핏줄들 옆에서 시중을 드는 모두가
귀족가 여식들이다.
공작가에는 백작가의 후계 구도에서 멀어진 여식도
몇몇 공작가에 충성하고 있으며,
백작가인 라이거 가문의 집사장은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귀족들이 충성을 맹세한 가문의
일선에서 일하는 자들이라면 ,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은 모두가 평민이다.
평민 이상의 신분이 귀족가에 충성하고
일을 하는 이들을 남자는 집사, 여자는 시녀라 불렀다.
반면 천민 출신으로 외모가 뛰어나
귀족가에 종사하는 사람의 눈에 띄어,
시녀와 집사들이 하지 않으려 하는
더럽고 귀찮은 일을 하는 존재로
영주성 내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남자는 하인, 여자는 하녀라 불렸다.
영주성 내의 온갖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신분 상승이었기에
꿈의 일자리가 볼 수 있었다.
그런 천민 출신 하인과 하녀들에게조차
같은 `하인`이라는 명칭을 쓰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노예 출신 하인과 하녀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인과 하녀가 아닌
또 다른 이름 `종`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색을 밝히는 주인이 벗으라 하면
장소가 어디든 벗어야 했고,
주인이 매를 들면 왜 맞는 것인지 모르고
맞아야 했으며,
`죽여라` 라는 한마디에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였다.
"들어와."
그런 운명을 가진 이제 12살의 하녀
바이올렛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