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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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라이거 백작가의 가주이며, 라이거 영지의 영주인
펠리스 라이거는 차가운 아들의 눈빛을 보자
가슴이 철컹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둘째 아들의 방문이 주었던 기쁨도 잠시.
보지 못한 사이에 너무나 변해버린 아들의 모습과
이제 15살밖에 되지 않는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뼈가 있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모든 것이 내가 부족한 탓이구나..`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이며,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알고 있는 펠리스였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영광스러웠던 라이거가 과거가 되는 것이 아닌,
없어져 버린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조차 아무도 모르게 만나야 했으며
그 여인이 낳은 아들과 거리를 두고,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딸도 마음껏 안아주지 못했던
펠리스가 아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펠리스의 뒤에 서 있던 케인이 카온에게 말을 걸었다.
"카온 도련님.
이렇게 허락을 받는 것과 일주일이란 시간을 보면
이곳 `필라`를 벗어나려 하십니까?"
지금은 서로 소홀해졌지만 어릴 때 아들이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던 케인이라면
아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펠리스.
하지만 아들 카온의 입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집사장님. 지금 저는 라이거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께
성인식을 치르지 않아 장기 외출을 허가받기 위한
라이거 가문의 피를 이은 아들로
허락받기 위해 온 것 입니다."
카온의 말은 당연하듯 하면서도 말 속에
가시가 가득한 말이기도 했다.
가주와 그의 아들의 일이니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죄송합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주제 넘었습니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케인이 조금 딱딱한 대답을 내놓았다.
케인에게 상처가 될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아들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는 순간, 펠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여전히 에델바이스 차를 드시는 군요."
다른 귀족들은 평민이 마시는 차라며 잘 마시지 않지만
펠리스는 특유의 쓴맛이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며
항상 마시던 차였다.
펠리스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은 그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아들이 말을 함과 동시에 묘하게 변한 손가락 때문이다.
`수신호? 독?`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이 있을 때,
말로써 작전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수신호였다.
찰나의 순간, 짧은 수신호를 남긴 아들의 손가락은
찻잔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 메이가 시장에 갔다가 왕도에서
지금 유행하고 있는 포션이라며 사온 것이 있습니다.
체력을 올려주고 기운을 맑게 해 준다고 하더니
정말이더군요.
치료에 관한 포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 왕도는 왕도인가 봅니다."
아들의 시녀가 왕도의 상인에게서 사 왔다는
포션병을 펠리스에게 건넸다.
`역시! 수신호였어! 제거?`
그것도 지금 사용되는 수신호가 아닌
자신이 후계자 시절 썼던 수신호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음.. 고맙구나.."
"총관이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던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주의 아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은 이들이..
주변 경계는커녕 따라나선 하녀를
더러운 눈으로 보더군요. 그런 기사들에게 호위요?
차라리 용병이 더 믿음이 갑니다.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일어서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들이 뒤에 서 있던
집사장 케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집사장님."
"네. 도련님."
"메이가 음식 솜씨는 좋은데..
깨먹는 접시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나마 바이올렛이 와서 조금 줄었지만요."
빨리 별채에 사람을 보내고
새로 들어 온 하녀는 그대로 두라고 돌려 말하는
아들의 모습이 15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남긴 마지막 수신호.
`거짓..? 무엇이?`
"내일 중으로 조치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돌아오면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래야.. 그들이 쫓겨난 이들처럼
그.딴.눈.빛과 그.딴.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케인을 바라보는 아들의 차가운 눈빛,
그런 아들을 마주 보는 케인의 감정 없는 눈빛.
그 눈빛이 부딪히자 펠리스의 눈빛도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들 카온이 나가자
다시 인자하게 표정이 변한 케인이 펠리스에게 물었다.
"주군. 카온 도련님이 조금 변한 것 같더군요."
"그러게 말일세.."
"엇나가지 않으셔야 할텐데요..
호리페 도련님처럼 책과 검 모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도 아니고..
케이켈 도련님처럼 검에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요즘 카온 도련님을 보면 걱정이 됩니다.."
"음.. 이번 몬스터 토벌을 경험하고
내년에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느끼는 것이 있겠지.."
"그렇겠지요.. 참! 그 포션은.. 드실 생각이십니까?"
케인의 포션이라는 말에
변한 아들에 대해 생각하던 펠리스는
아들이 남기고 간 수신호를 떠올렸다.
변한 아들에 이어, 수신호와 포션까지.
펠리스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 졌다.
`거짓..거짓이라..`
"오랜만에 찾은 아들이 주고 간 것인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마셔야지."
"왕도에서 유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처음 보는 포션이고..
어떤 효용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은 포션입니다.."
`거짓...독.. 해독.. 거짓.. 독.. 효용.. 왕도.. 확인 불가..`
"왕도와 거리가 있고, 우리가 왕도를 찾은 지 오래되었으니..
카온은 이미 마셔 본 것처럼 말했고.. 몸에 좋은 것이라면
나에게 전하기 전에 벌써 샤를에게 전했겠지..
무엇보다.. 처음으로 카온에게 받은 걸세.
독이라도 즐겁게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주군의 뜻대로."
*
어둠이 깊어가는 시간.
집사장 케인은 늦은 시간임에도
이자벨 백작 부인의 방을 찾았다.
"제가 그리워서 온 표정은 아니군요?"
"그대의 향기가 그립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흥!"
"카온이 주군에게 이상한 포션을 전했습니다."
케인의 입에서 카온의 이름이 나오자
인상부터 찡그리는 이자벨이었다.
"그 천한 것이? 포션? 설마.."
"하하하 오러블랙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염려 놓으시지요.
뛰어난 사제도, 뛰어난 마법사도 풀지 못한 독이
오러블랙입니다. 천한 피가 흐르는 카온이,
그것도 아비가 독에 중독된 것도 모르는 카온이
해독제를 구해 온 것을 수 없죠."
"음.. 그렇네요..
아버지도 그걸 주실 때 그러셨죠. 잊고있었네요.
그럼 호리페가 말려서 그 천한 년과 카온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지금 제 앞에서 그 이름을 말하는 이유가 뭐죠?"
"호리페 도련님의 현명함은 저도 감탄했습니다. 하하"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
"이곳에서 주군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이자벨님과 저밖에 모르죠.
주군이 갑자기 돌아가시면 분명 다른 가신들과
제 1 기사 단장은 원인을 찾고자 하겠죠.
독을 쓰기 전에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자벨의 표정이 급하게 밝아졌다.
"네. 호리페 도련님이 명성을 얻고
검으로 성취를 이루기까지 약 2년,
명성과 힘을 얻었을 때!
주군은 카온이 오늘 전달한 정체 모를 포션이
오러블랙이 되어 돌아가신 게 될 겁니다."
"호호호호 역시! 케인이예요!"
케인과 이자벨이 함께하고 있는 시각.
펠리스는 아들 카온이 주고 간 병을 들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독..독.. 오러 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잠깐.. 카온이.. 분명.."
`에델바이스 차를 가리키며.. 독이라는 수신호를.. 설마..`
"그리고.. 병을 건네주고.."
`제거.. 차가.. 독.. 병이 제거.. 설마..
그럼.. 거짓은.. 잠깐!`
"케인?"
`그 전에.. 말했던.. 검을 물고 있지 않은 독수리..
방패를 물지 않은 독수리..`
자신에게 그리고 라이거 가문에
완전한 충성을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펠리스였다.
"단순히.. 책망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였어.."
`오러 홀에 이상이 생기게 하는 독..
그 독이 에델바이스 차에 있었고..
그 차는 케인이 항상 준비하는 차였지.. 그리고.. 거짓..
시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케인을 가리킨 거였어..
검을 물고 있지 않은 독수리.. 하..`
펠리스에게는 카온에게 메이가 있듯
카온 보다 어린 나이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케인이었기에 아들의 수신호만 믿고 판단할 수 없었다.
아들의 거짓말과 진실, 케인의 배신과 충심.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 녀석이 답이구나.."
아들과 케인, 둘 중 누구를 먼저 불러야 할지 정하기 위해
아들이 준 병 속의 액체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
라이거 백작령의 북쪽으로,
북동쪽에는 페페 자작령이 영주성과 영주성까지의 거리가
마차로 3일 거리에 있었고,
북서쪽에는 마노 남작령이 마찬가지 거리고
자리하고 있었다.
마노 남작령.
라이거 영지의 반도 되지 않는 영지지만,
영주의 뛰어난 외교로 일라인 왕국 남부의
교통의 요지이자, 무역의 중심이라 볼 수 있는 영지.
페페 자작령.
라이거 가문의 이자벨 부인의 본가이며,
광산과 넓은 농경지를 통해 엄창난 부를 쌓은 영지.
이런 페페 자작령과 마노 남작령은
지금은 파실리온 백작가가 남부의 중심이라 불리지만
과거 라이거 가문이 남부의 중심이라 불리던 시절
라이거 백작령에 부속된 영지였으며,
라이거 가문을 주군으로 모시는 가신 가문이였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해독제와 함께
전달할 말을 남기고 나와
마노 남작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조만간 아버지가 찾아올 것이다.
포션 하나를 전달했는데 다른 것은 묻지 말고
효과가 있었는지 물어봐라.
긍정적으로 말을 했다면 이 병을 전해주고
마지막 병은 10일 뒤 준다고 해라.
이 말이 아버지에게 전달해 다라는 말의 요점이였다.
이 말을 전하는 동안 몰래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 삶에서 아카데미에 가기 직전까지도
몰래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러 오신다는 것은 몰랐다.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날 설레임에 잠들지 못하고
별채를 서성이다가 어머니 방에서 들리는
울음 섞인 투정을 달래는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두 분의 대화를 엿듣고서야 알았다.
"어쩌면.. 그 대화를 들었기에..
내가 아버지를 무조건 미워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네.."
말도 지쳤는지 점점 속도가 줄어들었고
날도 어두워져 야영을 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말을 속도를 줄였다.
"에고.. 미안하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너에게 몹쓸 짓을 하는구나.."
푸르릉
- 캬하하하하
- 끼요오~
"말아.. 금방 들린 소리가 사람의 소리 같더냐?
아니면 몬스터의 소리 같더냐?"
푸릉?
마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말하 것 같아 재밌게 느껴졌다.
"몬스터면 죽어여하고
사람이라면 무슨 일 생긴 것 같으니 가보자."
천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가다 보니
두 무리의 사람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어둠 속 타들어가는 모닥불이 밝혀주는 빛만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청력을 강화하고 지켜보기로 했다.
"야! 돼지!"
"네네! 여기 돼지 있습니다요!"
"캬캬캬 말하는 것도 돼지! 걷는 것도 돼지! 하하하"
"네네! 돼지입니다. 하하하 살려만 주시면
통행료는 만족하실 만큼 챙겨드리겠습니다!"
"오호! 돼지 새끼가 끄는 마차에
뭐가 있는지 따라 다르지 캬캬캬."
저 수준 낮은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내가 더 부끄러워진다.
`도적질하는 놈이나..
살아 보겠다고 스스로 꿀꿀거리는 놈이나..
하긴.. 저 돼.. 아니 저 상인으로서는 살고 봐야하니..`
살고자 하는 상인의 의지를 속으로 칭찬해주고
도와주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마차에서 들리는 다른 목소리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봐! 이 상단 노예 상단이야! 다른 마차에 여자가 있어!
그년들은 알아서 하고! 우리 풀어주면
페페 영지 빈민가로 들어가는 뒷구멍을 알려주지!"
"캬~ 노예 상단이었어?
캬캬캬 너 수고가 많구나? 캬캬캬"
"하.하.하."
"저 범죄 노예들 없으면 너 먹고살기 힘드냐?"
"아이고! 저놈들은 못 본척 해주십소 나리!"
"아이고~ 어쩌냐..
도적과 범죄 노예는 친구라서 말이지. 하하하하
예들아! 우선 계집이 있는 마차를 끌고 와라!"
"형님! 이 년들 아주!
와.. 특히 한 년은 최상품입니다요!"
"그래? 캬캬캬 아주 정중히 모셔와라!
너희 형수님이 될 수도 있다. 캬캬캬"
"저.. 두목님.. 노예들 만큼은.. 하.하.하."
"그래 그래. 돼지야.
노예들 만큼은 내가 잘 써 줄게. 으하하하"
"하.."
결국, 돼지 상인은 포기한 듯 주저앉아 버렸다.
남자 노예들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상단과 여자 노예들은
구하고 보자는 생각에 움직였다.
그리고 마노 남작령으로 가는 목적을
조금 쉽게 이루기 위해서는
상단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내가 자신들 곁으로 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여성 노예들을 마차에서 끄집어 내린 도적들은
품평과 음담패설을 널어놓기 바빴다.
누워있는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이미 시체가 된 이들도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은.. 옷을 보니 용병인 것 같고..
나머지는 상단 사람들이였나..?`
잠시 멈췄던 걸음이 도적 대장의 목소리에 다시 움직였다.
"오~ 최상품이 저년이야? 캬캬캬
이 년아! 기도라도 하는 거야? 크크크크
그래그래~ 지금은 신에게 매달려라
조금 있으면 내 아래에 매달려 있있테니 캬캬캬"
"형님! 저희들은.. 헤헤"
"그래 이놈들아! 오늘 제대로 회포 한번 풀어보자!"
"우와아아아~ 형님 최고이십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야
모닥불에 비치는 여자들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처럼 보이네?`
서로를 끌어안고 도적 두목이 말을 할 때 마다
움찔거리며 덜덜 떨고 있는 두 명의 여자.
그녀들과 다르게 도적들이 무슨 말을 하든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감은 상태로 미동도 없는
은색 머리칼의 여자.
우선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발걸음을 조금 더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