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부터 시작하는 군주 생활-12화 (12/201)

〈 12화 〉 죽어도 살아라. 그 명을 따를 뿐.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12. 죽어도 살아라. 그 명을 따를 뿐.

메이의 부름에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답했다.

"응?"

"바이올렛에게 벨트를 주려다가 못 줬어요."

"응? 왜? 아.. 혹시 릴리와 데이지 때문에?"

"네.. 두 분에게 비밀로 하는 것도 그렇고.."

문제는 장신구 형태의 실드 아티팩트는 아직 많지만,

벨트 형태의 실드 아티팩트가

메이에게 준 두 개가 다였다는 것이다.

"메이. 내가 잘 몰라서 물어 보는는건데..

시녀들이 장신구를 할 수 없다는 건

언제 어떻게 정해진 거야?

총관님의 부인인 시녀장님은 귀걸이를 하고 있던데?"

시녀들은 장신구를 할 수 없다.

라는 것만 알고 있었기에 벨트를 준 것이었다.

"시녀는 장신구를 할 수 없다. 라는 것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시녀들끼리의 불문율 같은 거라고 배웠어요.

백작 이상의 귀족 가문에는 귀족 출신 시녀가 있잖아요?

그런 귀족 출신 시녀와 평민 이하 출신 시녀들을

구분하려는 방법이 장신구예요.

자신의 가문보다 급이 높은 가문의 가주와 부인,

자제들을 모셔야 하기에 화려한 장신구는 할 수 없지만요."

담담하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는 메이의 말이

예전 같았으면 나도 당연하게 받아드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장신구로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을

나누는 행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가문의 몇째 영애겠지만

시녀가 된 이상 어떤 가문의 시녀일 뿐이다.

그 불문율이 어떤 식으로 생겨났을지 대충 예상이 되자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녀들끼리 지키는 것뿐이라는 거지?"

"네."

"좋아. 메이.

내일 아침 먹고 너를 포함해 다들 내 방으로 와줘."

고작 그런 이유였다면

내 사람이 된 이들에게 줄 만한 것들은 많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나고 메이는

시녀들을 데리고 내 방으로 왔다.

"예는 생략하고 다들 앉아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자리가 없네.."

"괜찮습니다. 도련님.

엄지손톱만 한 각기 다른 색 보석 펜던트가 달려있는

목걸이 네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색이 아름다운 보석에

중첩된 네 번의 실드 마법.

어젯밤에 내 앞에서 서 있는 이들을 위해

찾아낸 아티팩트였다.

"몬스터 토벌 전까지는 별채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예상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지.

나는 토벌 전까지 별채를 나갈 날이 많을 것이고

토벌 후에는 아카데미에 입학해.

내가 세운 계획대로만 된다면 토벌 후에

별채에 호위 기사도 들어 올 거야.

호위 기사가 들어와도

어머니와 프레시아를 지키는 기사가 될테고..

즉. 어머니와 프레시아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되겠지만

너희는 아니라는 거지.

나는 내 사람들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례가 어떻고 불문율이 어떻고 같은 건 따지고 싶지 않아."

노란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메이에게 건넸다.

"언제나 밖은 메이는 노란색이 어울릴 것 같아."

파란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릴리에게 건넸다.

"차분한 릴리에게는 파란색이 어울릴 것 같고."

붉은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데이지에게 건넸다.

"열정적인 데이지에게는 붉은색이 잘 어울려."

마지막 투명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바이올렛이게 건넸다.

"순수한 바이올렛에게는 투명한 것이 어울리겠지?"

"도련님.. 저희들은.."

예상이라도 한 듯 메이가 입을 다물자

릴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알아.

시녀들은 귀족 출신이 아닌 이상 장신구를 할 수 없다지?

그게 왕국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고작 관례며 불문율이라며?

너희도 나를 선택했지만 나도 너희들을 선택했어.

나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거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착용해. 이건 명령이야."

조심스럽게 착용하는 이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 예쁘게 꾸미라고 준 게 아니란 건 눈치챘을 테고..

효과는 착용자가 위험에 처하면

자동으로 실드 마법이 펼쳐지는 목걸이야."

뚝.

메이를 제외한 셋의 손이 동시에 멈췄다.

정확하게 가치는 모르나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명령이야."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프레시아에게 준 것처럼 화려한 장신구는 아니지만

보석이 사용된 것과 실드가 중첩된 것을 보면

그 시절 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이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귀족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사람이냐 내 사람이 아니냐가 중요했다.

*

이틀 뒤 오전.

식재료를 사러 나갔던 메이가 돌아와 전해준 쪽지에는

각기 다른 길로 향했던 선별된 인원들이

이틀 뒤 정오쯤 집결지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내가 지정한 집결지는 올해 말,

몬스터 토벌이 있을 남서부 요새 마을인 `창의 마을` 에서

삼일 거리에 있으며,  몇 해 전 영지민들의 민심이

라이거 가문에서 멀어진 계기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릴리와 데이지가 오면서 본채와 완전 선을 그었던 것이

오히려 내 행동을 자유롭게 했다.

어머니와 메이에게만 외출을 알리고 집결지에 도착하자,

60여 명의 인원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점심인지 간식인지 모를 음식을 먹고 있었다.

모여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나를 발견한 리아가 뛰기 시작했고,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 리아의 눈이 향하는 곳에서

나를 발견한 리먼도 뚱뚱한 몸을 이끌고 뛰기 시작했다.

"카온 도련님!"

"리아! 오랜만이구나."

"네! 도련님! 메턴강의 은혜를 입은 리아가

라이거 가문의 카온 도련님께 인사 올립니다!"

잘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모습이라

잠시 헤어지기 전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은 더욱 깊어지고 맑아져 있었다.

"헉.. 헉.. 헉.. 리..리먼이..라..헉..헉.."

"됐다. 숨이나 쉬거라. 리먼."

"헉.헉헉.. 죄송합니다. 헤헤"

크게 숨을 고른 리먼이 짧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총 56명 중 56 모두 도착했는데.."

"했는데?"

"중간에 세 명이 도망치려 해서 따로 마차에 구속해 놓았고,

네 명은.. 그게..

리아님이 속한 상단과 함께 이동하는 와중에..

리아님과 다른 여성 노예들을 노려서.."

리먼이 부르던 리아의 호칭이

리아에서 리아님으로 변해 있었다.

"하.. 그래서?"

"도련님이 아끼시는 리아님를 범하려 해

그들을 죽이려 했으나..

리아님이 저들의 처벌은 도련님에게 맡겨야 한다며..

일단 마차에 구속해 놨습니다."

선발된 인원 중 여자는 리아를 포함한 모두 다섯.

앞으로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것은 잊고

몬스터 숲에서 당분간 살아야 할 이들이라

다섯의 여자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하지만 검을 잡고 한 번이라도 휘둘러 본 자신은 괜찮지만,

나머지 넷은 아니라고 말하는 리아의 말에

이동하는 동안만이라도 여자로서 배려해 주었다.

"잘했다. 용병들은?"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돌려보냈습니다."

"좋아. 리먼. 모두 모아줘.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기 전에 그들을 처벌하겠다."

"네! 도련님!"

리아 또한 지금은 내 뒤가 아닌 그들과 함께해야 하기에

리먼을 따라나섰다.

잠시 뒤.

어떻게 마련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리먼이 마련한

작은 단상 위에 서서 선발된 인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이곳으로 무사히 오라는

단 하나의 명도 지키지 못하고

여성들을 범하려 한 이들부터 처벌하겠다!

이는 현재 너희들의 주인인 나에 대한 명령 불복종이며!

귀족인 나에 대한 귀족 모욕죄에 해당하기에

즉결처형에 처한다! 리먼!"

나의 부름에 리먼은 상단의 종업원들에게 눈짓했고

그들은 노예들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저들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가 행운인가..`

"너희들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모를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을 알려 주겠다.

리먼! 준비한 것들을 하나씩 나눠 주도록."

리먼이 다시 종업원들에게 눈짓하자 종업원들은

그들의 발아래 용병들이 주로 입은 가죽 갑옷,

단검 하나와 작은지도 한 장.

가문의 문장이 지워진 각양각색의 갑옷과 투구,

그리고 검 한 자루를 내려놓았다.

어리둥절한 이들 사이로

얼굴이 붓고 멍이든 남자 한 명이 보였다.

"리먼. 저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얼굴이야?"

"아! 카시오스라고 하는 자인데

리아님과 같이 이동하던 노예입니다.

리아님이 혼자 남자 네 명을 막을 수 있었던 것도

저자가 맞아가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네네"

"오호.. 혹시 리아에게 마음이 있었던가?"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동생이..

어느 귀족가 자제에게 범해지고 자살했다고.."

"하.. 지랄맞은 세상이야.."

"노예상을 하는 제가 하기에는 조금 웃긴 말인데..

저들 중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노예인 이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귀족인 내가 자네 생각에 동의하는 것도 우긴 일이지."

"하하하"

갑옷과 무기가 모두 지급되자 리먼이 아래로 내려갔다.

"뒤를 보라! 몬스터 숲이다!

너희들이 지금부터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첫 지점까지 이동 후 서쪽으로 열흘 거리에 있는

버려진 요새에 도착하는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예들의 표정에서는

절망이 피어올랐다.

싸움이라는 것을 했어도 주먹다짐이 전부였던 이들이다.

갑옷은 입어본 적도 없으며,

검은 어떻게 잡는지도 모르는 이들이다.

심지어는 이들 중에 여자도 있었다.

단상 위에서 무심하게 말하는 소년의 말은

스스로 죽으러 몬스터 숲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같았다.

절망에 물든 이들을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갑옷을 입고 검을 들어 몬스터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희들의 가족과 너희들의 신분은

더이상 노예가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 노예가 되고 평생을 노예로 살며

노예끼리 가정을 꾸리며 태어난 아이가

노예로 살아야 하는 삶.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귀족이 되는 것도,

기사가 되는 것도, 대 마법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바란다.

노예병으로 끌려가 고기 방패가 되지 않기를.

광산으로 끌려가 햇빛을 잃지 않기를.

누군가의 성노가 되거나,

환락가로 끌려가 몸을 팔지 않기를.

빵 한 조각이 아닌 한 끼의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내일 눈을 뜨면 가족들의 숫자가 그대로이기를.

소와 돼지의 똥이 아닌 귀족의 똥을 치우기를.

차라리 맞아 죽는다면 귀족의 손에 맞아 죽기를.

그리고 그들은 꿈꾼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자신이 아니라면 가족들이, 그것도 힘들다면

아이들만이라도 노예에서 벗어나기를.

가족이 없는 자는 살아남기만 한다면

꿈을 이룬다는 생각으로,

가족이 있는 자는 자신은 죽어도

가족들만큼은 노예에서 벗어나고,

살아남는다면 같이 이루어진 꿈을 만끽하기 위해

죽음의 선물이라 여겼던 갑옷을 입고 검을 허리에 꽂았다.

"갑옷을 입고 검을 찬 것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 생각하지 마라!

그대들의 목표는! 서쪽의 버려진 요새다!"

죽어가고 절망하던 눈빛이 살고자 하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죽어도! 살아라!"

내 외침과 함께 49명의 이제는 노예가 아닌 이들이

산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아라..`

나를 위해 그들의 꿈을 이용한 가혹한 명령.

그 죄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비겁한 기도를 속으로 올렸다.

"카온 도련님?"

리먼의 부름에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응?"

"저들이.. 도망쳐서 숲을 벗어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그런 자들이 있을 거야.

그래서 서쪽으로 향하기 직전까지는 내가 따라갈 것이고."

"그 이후에는.."

"리먼. 저들은 지금까지 검으로 사람은커녕

몬스터도 죽이지 못했던 이들이야.

갑옷을 입고 검을 가지고 있어도

막상 고블린이라도 마주면 얼어버리겠지.

휘두르는 검은 허공을 가를 뿐이고.."

"많이 죽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들은 세 살 먹는 애들이 아니야.

몬스터 중에서 제일 약한 고블린이 왜 집단생활을 하고,

왜 한 인간에게 두세 마리의 고블린이

뭉쳐서 공격하는지 알고 있을 나이지.

오히려 성안에서 생활하는 평민들보다 더 잘 알 거야."

"아.."

"그래.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걷고 있을지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뭉쳐야 살 수 있고,

혼자든 두 명이든 열 명이든 힘을 합쳐서라도

몬스터를 죽여야 하며,

서로의 지식을 공유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걸러내어

어떻게든 요새로 가야 한다는 것을."

리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위가 뛰어나고 금전적 여유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날의 반도 살지 않은 소년이

어떤 길을 가고자 하며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는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참! 이곳에 온 순간부터 궁금했던 건데..

이곳이 원래 이렇게 생긴 곳입니까?

제 기억이 이상한 건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느낌입니다.."

"몇 년 전. 천민 출신 이주민들의 마을이 있었고

그해 모두 죽은 곳이지."

리먼이 기억이 난 듯 눈을 부릅떴다.

"아!"

이자벨 부인이 호리페 형님을 낳고 얼마 후.

호리페 형님에게 좋은 것을 입히고 싶다는 마음에

호리페 형님을 안고 페페 자작령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점점 무너져가는 라이거 영지의 시장보다

점점 커져가는 페페 자작령의 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싣고 오던 중 이자벨 부인이 탄 마치가

갑자기 뛰어나온 천민에 의해 급하게 섰고,

이에 놀란 호리페 형님이 울기 시작하면서

이자벨 부인은 분노했다.

마차로 뛰어든 천민을 그 자리에서 죽인 것도 모자라

라이거 영지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과

점점 늘어나는 천민에 대한 대책의 방법으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마을을 만들고

천민들을 이주시켰다.

집이 생긴 천민들은 라이거 가문을 찬양했지만

그 목소리는 일 년이 채 지나기 전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 해 몬스터 토벌 당시,

이 지역과 새로 생긴 마을을 지키기 위한 병사는

이곳이 아닌 한 시간 거리의 뒤에 주둔했지만,

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불타고

사람이 죽어 나가도 움직이지 않는 병사들과

그 병사들의 주인인 라이거 가문을 원망하며 죽어갔다.

그리고 모든 천민 출신 이주 주민들이 죽자

그때야 본격적인 몬스터 토벌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이자벨 부인의 만행 중 하나였다.

"그래. 안 그래도 꺼져가던 라이거 가문의 희망이

완전히 꺼져버린 곳이지."

그 말을 끝으로 숲으로 향하는 카온을 보며

리먼의 눈빛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선택의 순간을 가져온 것인가.."

변해버린 눈빛의 리먼은 뚱뚱한 것은 여전했지만

말 앞에 `네네`를 붙이며 비굴하던,

말끝마다 `네네` 하며 어리숙해 보이던

리먼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이동 경로가 변경되는 지점에 도착하기

전 리먼의 말처럼 도망치려는 두 명을 목을 베고

영주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대들의 몫이다.

리아. 너도 증명해야 할 것이야.."

*

카온의 바램처럼 리아는 스스로가 카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반나절 거리에 이정표가 있다고 있어..

아직 보이지 않아..`

아직 첫 번째 지점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벌써 소규모 고블린 무리를 세 번이나 만났다.

고블린 자체는 기사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기 전에

경험한 적이 있어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 몬스터를 경험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처음 만난 고블린 무리가 50여 명이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도망치기 위해 소리치는 순간,

리아와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패닉에 빠져버렸고,

인간들의 두려움을 느낀 고블린은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공격해 버린 것이다.

달려드는 고블린을 향해 리아와 몇몇이 검을 들었지만

조금이나마 검을 다룰 줄 알았던 리아와 달리

몇몇의 검은 허공을 헤맬 뿐,

대부분의 고블린을 리아 혼자 처리했다.

두 번째 고블린 무리를 똑같은 양상으로 처리하고 나서야

카시오스와 여성들이 포함된 그룹이

리아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검을 잡는 법과 간단한 베기,

지르기를 가르치기 위해 잠시 이동을 멈췄지만,

지금까지 유일한 검이자 방패였던 리아였기에

다른 이들도 이동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나타난 앞선 두 번의 무리보다

조금 더 많이 나타난 고블린.

이번에도 리이가 먼저 나섰고 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배운 이들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때,

여자이면서 모두의 중심처럼 행동하는 리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몇몇이 뭉쳤다.

과시라도 하듯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어

처음으로 무언가를 죽였다는 느낌과 피의 끈적함을 느꼈다.

세 번째 고블린 무리를 몰살시킨 이들은

두 개의 그룹이 형성된 채 첫 번째 지점에 도착했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첫 번째 지점이

첫 야영지가 되어 그렇게 각자의 밤이 깊어 갔다.

몬스터 숲에서의 첫날 밤이 지나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에게 잘 잤냐라는 안부는 필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영원히 뜨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요새에 도착하면 뭔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

고블린이지만 첫 생명을 죽였다는 떨림.

살고 싶다는 갈망.

각종 희망, 절망, 고뇌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게 했다.

그런 생각들이 밤새 자연스럽게

두 개의 그룹에서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리아를 중심으로 뭉친 그룹. 총 25명.

각자 살아온 환경과 지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리아가

지식의 공유를 건의했고,

리아를 잠정적 리더로 인식한 이들은 이에 동의했다.

리아가 원하는 이들에게 검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려 했고

다른 이들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먹을 수 있는 뿌리와 열매, 버섯들을 분류했다.

단, 산짐승들을 사냥하고 도축해

간단히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정보는 잠시 접어 두었다.

불을 피우고 고기 굽는 냄새가 퍼져 몬스터들이 몰려왔을 때

이를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정보들을 다른 그룹에게도 전달하고

힘을 모으려 했으나 이런 리아의 노력은

두 번째 그룹에 의해 무너졌다.

리아가 여자인 주제에

검 좀 쓴다고 설친다 생각하는 그룹. 총 9명

이 그룹에 모인 이들의 공통점은 리아가 싫다는 것이었다.

왜 자신들과 함께 몬스터 숲에 왔는지 모르지만,

뛰어난 외모로 귀족 소년에서 관심받는 여자가

당장은 자신들보다 검을 잘 쓴다는 이유로

모두의 중심에 서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야 리아가 나을지 모르지만 몇 번 검을 휘두르다 보면

여자인 리아보다는 나을 것이란 자만심도 있었다.

귀족 자제가 갑옷과 검을 주며 살아남으라 했다.

그렇기에 귀족 자제는 강한 자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질투와 자만심, 그리고 잘못 생각한 자신의 판단이

리아의 제안을 거절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희망으로 검을 차고 갑옷을 입었지만,

하룻밤 새 절망의 늪에 빠져 자신들은

귀족의 여흥에 팔려왔다고 생각하는 그룹. 총 13명.

이들은 박쥐였다.

절망 속에서도 살고 싶은 욕심에

리아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고,

겉으로 봤을 때 힘이 있어 보이는,

옆에 있어야만 오래 살 것 같은 두 번째 그룹을 따랐다.

리아와 리아가 리더로 있는 그룹을 완전히 배척하는

두 번째는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리아는 그들에게도 검을 가르치고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는 세 번째 그룹을 통해 두 번째 그룹에게도

정보만이라도 전해지기를 바라는 리아의 마음이었다.

그런 리아를 향해 카시오스가 물었다.

"리아. 대놓고 너를 싫어하는 놈들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어?"

서쪽 버려진 요새에 무엇이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카시오스와 달리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리아는

카온을 위해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가고 싶었다.

"난 단지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을 뿐이야."

`그래야 도련님의 힘이 커질테니까`

"후..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리더로 인정한 너라서 뜻에 따를 뿐이야.."

"죽어도 살아라. 그 명을 따를 뿐."

"..."

"한 시간 뒤에 출발한다!"

리아의 외침이 그룹마다 다른 의미로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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