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타국이고 적국입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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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타국이고 적국입니다.
애써 당당한 척하는 포이든 왕의 모습이 우습다.
카이젠 제국 황제의 유흥 때문에 장소가 제국이고,
하필이면 제국의 대전이다.
그리고 그 유흥 덕분에
잠재적 적들의 수장들이 전부 모였다.
우리가 오늘이 지난 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대전을 벗어나 내가 심어준 오해를 풀든,
서로의 손을 잡든, 아니면 잡았던 손을 놓든
자기들끼리는 어떤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어쩌면 서로 검을 겨누지 않은 상태에서 보게 될
마지막 기회.
꺼낼 수 없는 검 대신, 사용할 수 없는 마법 대신
혓바닥을 놀려 나를 찍어 누를 시도라도 해야 했다.
그들이 믿는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협박을 하든,
동맹했음을, 또는 더 큰 동맹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며 압박을 주든,
문을 닫고 있는 가문을 이용해 경제적 위협을 하든
어떻게 해서든 나를 눌렀어야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두 왕비처럼 손이라도 내밀어야 했다.
이렇게 다 모인 상황이 아닌
나와 따로 만났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 이들의 목적이
나와 라이거 영지 하나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이 품의 계획의 시작이 라이거 영지일 뿐
그 끝은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말을 아낄 때라고 생각하는
포이든과 피오네의 두 왕.
그 두 사람에게 닫힌 입이었기에
더 빠져나오기 힘든 생각을 심어주고,
아직도 멍청하게 나만 노려보고 있는
제라드 왕에게 얼마나 무능력한 왕이고,
얼마나 썩어가는 왕실인지 알려줄 것이다.
"우리가 서로 안부를 묻고 술잔을 나눌
훗날을 기약할 사이가 아니니 생략하고 말하죠.
`카제`는 잘 있습니까?"
"그..그걸 어떻게.."
"카제?"
"카온 라이거."
놀라는 포이든 왕과 궁금해하는 제라드 왕.
그리고 아직도 고귀한 척
점잖게 내 입을 막으려는 테슬린 공작.
"전하. 설마 `카제`를 모르십니까?
혹시.. 포이든 왕국의 침략을 받은 역사까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포이든 왕국의 침략이 치욕스러운 역사지만
이를 완벽히 막아내면서
우리는 스스로 그 치욕을 씻었다!"
"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겠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기록은 권력이 있는 자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니까요."
아공간에서 `카제`의 기록이 적힌 서류를
제라드 왕과 두 왕비에게 한 장씩 건넸다.
"포이든 국왕. 여기 적혀 있는 카제..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포이든 왕과 테슬린 공작을 노려보는 제라드 왕.
문득 이렇게 화를 내는 제라드 왕이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난 것인지 궁금해졌다.
당시 영지미들이 비참하게 죽고
모욕당한 것에 화가 난 것일까,
그런 이유에 테슬린 공작 가문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카제`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는 현재 왕의 무능이며 과거 왕들의 잘못이다.
자신의 무능과 선대 왕들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카제` 하나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테슬린 공작 가문과 포이든 왕국,
이 둘만 눈에 들어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딱 제라드 왕답다.
"오라버니! 이게 다 사실 인가요?
혹시 가주의 서재에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이유 중에 이것도 있는 건가요?"
테슬린 공작의 동생이자
일라인 왕국의 제 1 왕비인 헤이라스 왕비의
표정을 보니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이조차도 뛰어난 연기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어제 그녀의 모습을 떠올라
연기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같은 서류를 본 로자이 왕비는
주먹만 꽉 쥐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
오히려 멍청하게 나서주면 나에게 도움이 될 뿐이다.
"두 분께서는 뭘 그렇게 노여워하십니까?"
"나는 일라인 왕국의 왕!.."
"네네. 그러시죠.
일라인 왕국의 왕이고 왕비님께서는 왕비님이죠.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뭐?"
"그렇게 노여워하시는 분들이
왜 핍박받는 라이거 가문과 고통에 시달리던
라이거 영지민을 모른 척 하셨습니까?
왜 피해자인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가해자인 것들에게 뒤로 도움을 줘,
우리를! 라이거를! 세상에서 지우려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중앙 정치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를 했습니까?
아니면 몬스터 토벌을 게을리했기라도 했습니까?
제 눈에는 과거 대륙 진출을 꿈꾸는 포이든 왕국과
지금의 왕실이 똑 같습니다.
그렇게 분노하시는 카제의 활동과
뒤에서 수작질이나 하는 전하나 테슬린, 포이든,
피오네, 제국! 다 똑같아 보입니다."
"카온!"
"가장 심한 것은 일라인 왕국의 왕!
바로 전하이십니다. 왜?"
나에게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타국이고 적국입니다."
"그..그.."
"과거가 어떻고, 선왕들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살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 없는 과거를
단지 전하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고,
과거를 도구로 사용하는 전하이시기에
현재를 올바른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니까요.
과거 테슬린 공작 가문과 손잡고 침범한 포이든 왕국과
피오네 왕국와 손잡은 전하의 모습.
정말 많이 닮았군요.
그렇게 예뻐하시는 피오네 왕국의 왕녀를
왕후로 맞이하는 것은 전하의 사랑이니,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자리가 일라인 왕국의
`네 기둥` 가문으로서 나서게 될
마지막 자리일지 모르니 전하께 한마디 올리죠."
"..."
"전하께서 지금도 뒤로 감추고 계시는 왕녀와
눈을 마주치는 동안.. 다른 두 국왕께서도
아주 끈끈한 눈빛을 종종 주고받으시더라고요.
전하와 달리 그 눈빛에 담긴 뜻이 사랑이 아니라면.."
분노에서 황당으로 표정이 변한
테슬린 공작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 다른 의미가 있겠죠.
전하도, 테슬린 공작도..
비련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말이 끝나자 찾아온 잠깐의 침묵.
심어주려 한 오해가 모두 진실이었기에
찾아온 짧은 침묵.
부정했다가는 거짓말이 들킨 아이처럼
더 의심받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긍정도 할 수 없기에 찾아온 침묵.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모래마저 사방으로 흩어 놓았다.
악동 같은 나의 `놀이`가 끝났으니
흩어진 모래를 어떻게 할지는
`놀이`를 방해받은 남이 이들의 몫이다.
대전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대전 구석의 허공을 향해 살짝 웃어 주는 것을 끝으로
손에 묻은 모래까지 털어냈다.
대전을 나서자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리아가 서 있었다.
"좀 어울려 주다가 나오느라고 늦었다."
"연회가 취소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국의 수도나 좀 돌아보고..
그런데 너 표정이 좋은데?"
다른 이들이 봤다면 구분 못 할 정도였지만
리아는 상당히 언짢아하고 있었다.
"벌레 한마디가 달라붙었을 뿐입니다."
귀족 영애라는 신분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갖춘 리아에게
분수를 모르는 벌레들이 접근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잘 처리했어?"
"함부로 처리할 수 없는 신분이라 그냥 무시했습니다."
"하긴.. 일라인 왕국도 아니고 제국이니까.
가자! 기념품도 좀 사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기분 풀자.
나도 더러운 입 냄새를 좀 맡았더니 속이 안 좋아."
리아와 함께 제국의 수도를 구경하고 있는데
거슬리는 기운들이 느껴졌다.
"리아. 혹시 달라붙었다는 벌레가 신성국 사람이었어?"
"네. 주군."
"그럼 저 새끼들의 목표가 내가 아닌 너인가?
그런데.. 원래 신성력이 이렇게 역겨운 건가?"
기운을 숨길 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신성력이 우리에게 곧장 향하고 있었다.
"저도 제대로 된 신관은 보지 못해서.."
각 왕국에는 신전도 있고 신관들도 있다.
하지만 신전을 지키는
대신관이라 불리는 이들은 신성국의 개이며,
신전에서 퍼져 왕실이나 귀족 가문으로 들어간
신관들은 돈과 권력의 노예다.
이들의 신성력은
절대 평민이나 천민에게 향하지 않는다.
아픔을 호소하는 평민들을 어여삐 여겨
무상으로 치료해 주는 이를
`신의 힘을 댓가 없이 사용한다.` 말하며
죄인 취급한다.
라이거 영지의 신관은 평민에게 신성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힘에 대한 굴복이고 살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아버지도 나도 일단 필요하기에
그나마 힘에 굴복한 신관을 데리고 있을 뿐
그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일단 좀 조용한 곳으로 가야 얼굴을 드러내겠군."
조용한 찻집을 발견한 나는 리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나 따라오는 기운들.
그리고 우리가 주문도 하기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이 아름다운 여인의 주인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 또래의 남자가 거만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리아에게 다시 고개를 돌려 `이 새끼` 였나고
눈빛으로 물어보자,
리아가 똑같이 눈빛으로 긍정했다.
"성자님이 물으셨다!
어서 예를 갖추고 답하라!"
신성력의 따라온다 했더니
리아에게 접근한 벌레가 성자라는 놈이었다.
"아.. 오늘 예 못 받아서 죽은 혼들이
단체로 되살아난 날인가..
이놈도 예.. 저 놈도 예.. 하.."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성자를 바라봤다.
"신의 아들이신 성자님 앞이다!
자세를 바로 하고 예를 갖추라!"
딱!
내가 손가락 튕기자 예를 갖추라고 소리치던
이름 모를 누군가의 머리 위로
물로 된 구체가 나타나 그의 머리를 감쌌다.
물고문과 같은 효과의 마법은
바이올렛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숨을 쉬지 못해 버둥거리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리치는 성자를 바라봤다.
"시끄러워서."
"어서 그만두지 못할까?!
신의 아들인 성자를 따르는 신의 종이다!
저 종이 잘 못 된다면
신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풉!"
신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아이들이 보는 책에도 담지 못할
유치한 말을 잘도 하는 성자의 모습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크흡!"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리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리아가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니 더 참기 힘들었다.
"푸하하하하 하하하하.
리아. 너도 참지 말고 웃어.
너 웃음 참는 모습! 하하하 너무 웃겨. 하하하"
나의 웃음이 그들에게는 분노가 되었을까.
찻집이 그들에게서 터져 나온 신성력으로 가득했다.
적당한 신성력은 사람들에게 안정을 주고
기도와 함께 한 신성력은 다친 이들을 낫게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날뛰는 신성력은
검사의 오러와 마법사의 마나와 같은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가 된다.
짙은 분노를 담은 신성력이 찻집에 퍼지고,
집기들이 넘어지고 깨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흥미롭게 지켜보던 고객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밖으로 뛰쳐나갔고,
찻집의 주인 부부까지 말리기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신의 아들인 성자가 명한다!
당장 신을 욕보이고!
성자인 내 앞에서 천한 웃음을 보였으며!
신의 아들을 모시는 종자를 해한
저자의 무릎을 꿇려라!"
신성력이 가득한 공간.
검을 꺼내든 성기사들은 이곳 한정이라면
자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다섯 명의 성기사가 나를 향해 한 발 내딛는 순간,
나는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신성력과
이를 느끼고 뚝 하고 걸음을 멈춘 성기사들.
입을 닫아버린 왕들과 달리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성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