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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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이봐. 성자. 성자라는 놈이
자신의 종이 죽어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건가?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살린다는 성자가
가장 가까이 있는 종도 살리지 못하니.. 쯧.."
신의 아들이 아닌 악마의 아들처럼
성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네놈이!"
"아니지. 네놈이 먼저 시작했지.
성자라는 놈이 감히 나를 따라다닌 것도 모라자
성자라는 놈이 예의도 모르게 끼어들었고,
성자라는 놈이 신성력 또한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신관의 신성력도 아닌
무려 성자의 신성력을 뿜었으며,
성자라는 놈이 자기 종이 죽어가는데 검부터 겨눴어.
저 종이 죽으면 성자라 불리는 놈의 책임이겠군."
"감히 누구를 모함하는 것이냐!?"
"아.. 진짜 시끄럽네..
빨리 내 앞에 나타난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저 새끼 죽어. 그래도 상관없다면
더이상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신의 아들인 나를 위해 죽는 것은 영광이다!"
"아.. 그러셔?"
딱!
손가락을 튕겨 물 마법을 해지시켰다.
"푸하! 콜록! 헉..헉..헉.."
다시 숨쉬기를 시작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모시는 성자가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래."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성자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남자.
"내 심보가 고약해서 `영광` 따위는
주고 싶지 않아 살려 주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인 남자와 이를 보며
짧게 혀를 찬 성자가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라이거 영지가 어렵다며?
왕실과 하나뿐인 공작 가문과 오래전부터 악연이고,
피오네와 포이든까지 끼어든 상황에서
이제는 제국 황제의 눈 밖에 났으니.
저 여자를 나에게 주면 신성국이
네 편을 들어 줄 수 있는데.. 어때?"
본격적인 전쟁 이전에
신성국부터 쓸어버릴까 고민하는 나를 보고
히죽 웃더니 말을 잇는 성자.
"솔직히 저 여자.. 호위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니잖아?
여자가 무슨 기사야 기사는.. 쯧.
백작 가문의 후계자..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데 백작도 되어보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서
계속 가문을 이어야 하잖아?
그런데 너희 가문과 영지를 노리는
늑대들이 쓸고 가면 그러지 못해.
기사든, 시녀든, 밤 시중이든 저 여자만 나에게 준다면
신성국의 권위는 물론이고 성기사들이 도와준다니까?"
개소리를 이어가던 성자가 고개를 리아에게 돌렸다.
"야. 너도 잘 생각해.
아까는 보는 사람도 있고 해서 그냥 넘겼는데..
어디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응?
기사는 무슨.. 검이라도 허리에 차고 있었다면
믿어주는 척이라도 했지.. 쯧쯧..
너도 고향에 가족들이 있고 네 목숨도 소중하잖아?
모시는 도련님과 모시는 가문이 중요해?
너 하나만 나에게 오면 다 해결 되는 거야."
징그러운 눈빛으로 리아를 바라보던 성자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고작 여자 하나만 넘겨주면
너도, 가문도 살 수 있어.
만약 영지가 사라져도 신성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해 줄게."
어서 답하라며 씨익 웃는 성자.
"개소리가 드디어 끝났군. 리아."
"네. 주군."
"저 물에 젖은 생쥐 말고는 다 죽여."
"충!"
"하하하 아직도 기사 놀이에 상황파악이..!"
어이없다며 배를 잡고 웃던 성자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는
리아의 모습에 놀라 굳어버렸다.
리아가 검을 꺼내자 성기사들도
검을 꺼내 검에 신성력을 씌웠다.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는 리아의 모습에 놀라
잠시 말을 잊었던 성자가 연한 노란색의 신성력이
일렁이는 성기사들의 검과 예사롭지 않은 검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리아의 검을 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하하 이 후계자님의 선택이란다.
팔다리 하나 없어져도 내가 치료하면 되니까
얼굴만 다치지 않게..!"
성자의 말은 끝맺음하지 못했다.
리아의 검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오러.
나는 신성력이 물든 검보다
리아의 검이 더 신성하게 느껴졌다.
뿜어져 나오는 것은 오러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리아만의 냉기.
마스터가 되면서 그 냉기 또한
더욱 시리고 잔인해졌다.
검에 넘실거리는 새하얀 마스터의 오러,
리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로
조금씩 얼어가기 시작하는 찻집의 내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몸에 두른 리아가
성기사들에게 한발 다가가자
그들도 한발 뒤로 물러났다.
"뭐..뭐뭐 해!? 다다다당장!"
리아의 냉기에 사로잡힌 성자가
이를 떨어가며 외쳤지만, 명령을 받은 성기사 중
누구도 리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리아는 천천히 가로 베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슥!
단 한 번의 베기에
성기사 다섯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머리가 떨어졌다는 것을 아직 인지하지 못한
그들의 목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얼음 위 피의 분수
훗날 벌벌 떨며 성기사들의 피를 뒤집어쓴
죽다 살아난 남자에 의해 온 대륙에 퍼질
리아의 무용담 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은
카온도, 리아도, 그 누구도 아직은 몰랐다.
*
묻은 피를 털어낸 검을
다시 아공간에 넣은 리아가 걸어왔다.
"주군의 명을 수행했습니다."
성기사의 피로 물든 리아의 모습은
성자가 의자에서 떨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찌..어떻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자를 무시하고
리아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물과 바람, 빛이 동시에 쏟아져
순식간에 깨끗해진 리아.
"고생했다."
리아가 오러를 거두어들이자 얼어있던 실내가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야."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물에 빠졌다가
이제는 피에 빠진 남자를 불렀다.
"네? 네!"
"무려 성자님이 돌아다니는데
고작 수행하는 인원이 이게 전부가 아니지?"
"네!"
"데리고 와서 저것들 치워."
"네!"
자신의 지금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
찻집을 나가는 남자와
잠시 뒤 밖에서 들리는 비명.
"감히.. 감히! 성기사를!
신성국이 이를 반드시 벌할 것이다!"
"아.. 그래? 그럼 나야 좋지.
몬스터 숲을 지겨워하던데
칠흑 기사단을 신성국으로 보내면 되겠군."
"칠흑.. 기사단.."
"뭐 이런 병신이 있지?
칠흑 기사단은 알면서 왜 리아는 모르지?
설마.. 이름만 같은 사람인 줄 알았던 거야?
아니면.. 다른 머저리들처럼
카시오스가 진짜 단장이고
리아는 얼굴마담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와.. 뭐가 됐던 진짜 멍청하네..
무려 성자라는 놈이.."
"신의! 신의 이름이 무섭지 않은가?!
나는 신의 아들인 성자다!"
주신 포르테.
무섭다.
무서운 만큼 경외롭다.
하지만,
신의 아들인 성자. 는 아니다.
성자, 성녀라는 존재는 역사 속에 존재했다.
뛰어난 신성력으로 역병을 물리치고,
대륙을 돌아다니며 버림받은 이들을 돌봤으며,
교황과 신전이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았다.
성자나 성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신의 계시 같은 것이 아닌,
신성력이 뛰어나고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자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치료를 받은 이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으며, 교황과 주교,
신전의 타락을 막고자 백성들이 만들어낸 직위인
성자, 성녀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맑은 물이 오염된 물을
정화 시키는 것에 오래 걸리고,
맑은 물을 오염된 물이 오염시키는 것이 금방이듯.
성자라는 이름과 권력에 심취한
신성력이 뛰어난 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필요에 따라 교황이 되기도,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면 교주가 되기도,
때로는 교황과 결탁해 지금의 성자처럼
책임없이 권리만 누리는 성자가 되기도 했다.
몇십 년 만에,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자.
이것은 주신 포르테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강림한 것이 아닌,
신성국이 만들어낸 하나의 인형에 불과했다.
어쩌면 나의 회귀가 일라인 왕국뿐만 아니라
주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신성국까지
벌 하라는 주신의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살생부에 신성국과 성자의 이름까지
마음속으로 새겼다.
"당장 내 앞에 무릎 꿇고.. 컥!"
잠시 생각에 빠진 내 모습에
의기양양해져 소리치는 성자의 목을 쥐었다.
"넌 성자라는 이름을 쓸 자격 없어."
"나..나는..성..컥.자.."
축 늘어져 기절한 성자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리아를 불렀다.
"밖에 가게 주인 좀 들어오라고 해."
"네. 주군."
잠시 뒤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가게 주인 부부뿐만이 아니었다.
"성자님!"
"이.. 무슨!"
널브러져 있는 성자를 향해 뛰어오는 두 명의 남자와
목이 잘린 동료에 분노하며
검을 꺼내 리아와 나에게 달려드는 성기사.
"안됩니다!"
"멈춰라!"
피에 젖은 남자의 외침과
리아의 외침이 동시에 찻집에 울렸다.
남자의 외침이 아닌 마스터의 외침에 의한
속박에 묶인 모든 이들의 행동이 뚝 하고 멈췄다.
난장판에 피로 가득한 자신의 찻집을 보고
하얗게 질려있던 주인 부부가
성기사들이 검을 꺼내는 순간 주춤거리고
리아가 외치는 순간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주인 부부를 향해 걸어갔다.
다가갈 수록 떨림이 심해지는 부부.
한쪽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네?"
"나는 일라인 왕국
라이거 가문의 후계자 카온 라이거라 한다."
"네..네.. 저는.."
비록 타국이지만 귀족은 귀족이다.
힘겹게 일어나 예를 올리려는 부부를 말리며
말을 이었다.
"됐다. 잠시 쉬어가고자 들어왔는데
벌레들이 달라붙었어..
쫓아내려고 팔을 휘저어도 나가지 않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해로운 벌레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
하지만 나와 벌레 때문에
그대들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나를 욕해도 좋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손님들을 위한
향기로운 차를 내어줄 수 없으니
보상을 받아 주었으면 한다."
아공간에서 금화 주머니 하나를 꺼내
주인 부부에게 건넸다.
왕국의 금화는 제국의 금화는
똑같이 불순물이 없는 금으로 만든 것이지만
왕국과 제국이라는 차이,
환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번거로움,
황실의 허가를 받고 금화를 녹여
다시 제국의 금화로 만들거나,
다른 금 장식물로 만들어야 하는 수고스러움 때문에
약 7할의 가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준 금화 주머니에 들어있는 금화는
3할을 포기하고도 피로 물든 찻집을
재단장하는 비용을 넘어,
이 찻집이 포함된 건물 자체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헉!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이건.."
"미안함을 표현할 길이 이것뿐이니 받아 주게."
"말뿐인.. 사과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더 받기가 힘듭니다.."
기물을 파손하고 난장판을 벌여놓고
적선하듯 금화 몇 개 던져주고 가는
귀족들이 수도 없이 많다.
금화 주머니를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내 진심을 그대로 받아주는 부부에게 고마웠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라이거 가문은 제국의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사를 가진 가문이다.
이런 가문의 후계자가 고개를 숙이면 받아 주겠는가?"
"헉!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받겠습니다! 네! 받겠습니다!"
"이 돈으로 새로운 찻집을 열든,
사치를 하며 평생을 살든 그건 그대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그대들이 사치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 같아 한가지 조언을 해주지.
자신이 품지 못할 돈이 생기면
시야가 좁아지고 벌레들이 달라붙을 거야.
마음속에 욕심이 생긴다면 한 발 뒤로 물러서 세상을 보게.
물러선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린
어린 생명이 보인다면 그들을 품어주게.
그리고 다가오는 벌레들은 잘 골라내야 할 거야."
시선을 아직 기절해 있는 성자에게 향했다.
"성자의 탈을 쓴 버러지가 있을 수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부부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려 주고 일어나 성자에게로 향했다.
성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물과 피에 젖은 생쥐를 바라봤다.
"야."
"네!"
"안내해"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신성국"
성자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찻집을 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추고 생쥐를 다시 바라봤다.
"리아가 속박을 풀면 저 병신들 보고
저것들 치우게 하고 설명 좀 해.
그럼 조용히 따라오겠지."
"네.."
리아가 속박을 풀고 내 뒤에 서는 것을 보고
찻집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