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아니면 피오네 왕국의 신하이십니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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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아니면 피오네 왕국의 신하이십니까?
재빨리 뒤 따라 나온 죽다 살아난 남자가
마차 두 대 중 한 대를 가리켰다.
"이 마차에 오르시면 됩니다."
"성자의 마차인가?"
"네. 제국 성도의 신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신성국으로 안내하라 했는데?"
제국에서 신성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과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 둘 뿐이었다.
내가 왕성 텔레포트 게이트 사용을 거절했으니 당연히
마차로 이동할 것으로 생각했다.
"성자께서도 왕성 텔레포트 게이트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성국 내에서라면 모를까..
제국에서 신성국으로 가는 마차길은.. 모릅니다.."
"길을 모른다?"
진정한 성자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성자라는 이름을 달고 성자 노릇을 했으면
대륙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성자께서는 마차로 이동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셔서.."
"이름이 뭐지?"
"신관 라마즐라입니다."
"그래.. 라마즐라.
성자가 쓰레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래도 대륙 곳곳에 신성력을 펼쳤다고 하던데?
아.. 일단 나는 신성국으로 안내하라 했고
그대는 그런 나를 신전으로 안내한다고 했으니
일단 이동하지."
가는 길에 성기사들이 다시 검을 겨눈다 해서
겁먹을 내가 아니고, 라마즐라가
어떤 함정을 준비했더라도 죽이면 그만이다.
쿵!
성자를 마차에 집어 던지고 리아와 함께 마차에 오르고
라마즐라가 마지막으로 마차에 타며
짧게 마차의 문을 세 번 두드리자
마차가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 라마즐라? 마차의 겉과 속이 완전 다른 세상이군."
신성국의 상징인 흰색과 신성력의 색을 닮은
옅은 노란색으로 깔끔하게 색칠된
마차의 외부와 달리 안은
온갖 보석으로 도배되어있으며
모든 성직자들에게 금지된
술이 담긴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
"이 거슬리는 냄새와 여자 향수 냄새까지..
성자라는 놈이 빈민구제 빼고 다 하고 있었군."
신성국에 전해지는 교황 법에는
사람의 정신을 해치는 술과
사랑이 없는 성관계는 금지되어있으며
이를 어긴 자는 파면한다고 명시되어있다.
가장 앞장서서 법을 지켜야 할 성자가
이러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 이제 제국에서 신성국으로 가는
마차길을 모른다는 것과
성자가 마차로 이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그리고 나를 신전으로 안내하는 이유를 듣고 싶은데?"
"성자께서 수련을 마치고 세상에 나오시자
엄청난 기부금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겠지.. 오랜만에 나타난 성자라고
너희끼리 정한 놈이니까."
"... 성자께서는 처음 다른 왕국으로 이동한 곳이
일라인 왕국이었습니다."
신성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
카이젠 제국과 일라인 왕국 두 곳 이었기에
두 곳 중 어느 곳을 선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일라인 왕국 북부는
도로가 잘 정비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때 성자께서 마차 이동은
각국 성도와 인근 영지로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동안 쌓였던 기부금과 교황의 지원으로
각국의 성도 신전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었습니다."
"하?"
텔레포트 게이트는 만들 수 있는 마법사와 자금,
마나석만 있다면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엄청난 마나석을 소비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고,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서는
출발지와 도착지 모두의 허가가 필요했다.
자국 내에서의 이동은 절차가 번거롭지 않지만,
타국으로의 이동은 절차도 까다롭고
일정 인원수 이상은 허가되지 않는다.
"각국의 허가는 쉽게 났습니다."
"쉽게? 미쳤군."
"성자님과 신관 다섯,
성기사 14명. 총 20명이 이동하는 대신,
이동 시 성기사들은 무기 착용이 금지되었으며,
이동 후 왕실의 허가 또는, 왕실의 협력으로
구제 활동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일라인 왕국에서 성자든,
왕실이든 이름을 걸고 구제 활동했다는 말은.. 아.."
마차에 굴러다니는 술병, 빠지지 않고 스며든
관계의 냄새와 향수 냄새가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하였다.
"잠깐. 신성국 내에서도 성도 근처만 돌아다녔어?
그래도 신성국 내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유명할 거 아니냐."
"신성국 내에서 성자님은
성도를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성자님을 뵙고자 각지에서 직접 찾아오셨으니까요.."
"하.. 마지막으로 묻자.
저 새끼는 여자를 강제로 희롱했나?"
"..."
"그렇군. 살 가치가 없는 놈이군."
성자, 아니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사라졌다.
성자라는 권력을 이용해 탐욕을 부렸다.
빈민을 구제해야 할 시간에 탐욕을 행했다.
국가 간에 중재를 해야 할 시간에 탐욕을 행했다.
희망을 담은 백성들의 기부금을 이용해 탐욕을 부렸다.
이로써 성자는 살 가치가 없어졌다.
도착한 제국의 신전.
성자가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오는 모습을 봤음에도
리이가 뿜어내는 마스터의 기세에
모두가 주저앉아 벌벌 떨 뿐 다가오지 못했다.
내가 향한 곳은
신전의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곳이 아닌
제국 신전의 주교가 있는 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신성국에게 항의하는 것이 아닌
신성국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
카온과 리아가 성자의 머리채를 끌고
신전으로 들어가고 있던 시각.
왕국으로 돌아온 제라드 왕과 두 왕비는
오랜만에 마주 앉아있었다.
"젠장! 카온..카온.. 카온.. 그놈이! 감히!"
카온이 심어 놓은 오해와
밝혀져 버린 `카제`에 관한 것 때문에
피오네 왕국의 왕녀를 데리고 오는 날이 미뤄졌다.
씩씩거리는 제라드 왕을 노려보며
헤이라스 왕비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마치 이런 날을 기다렸다는 듯 왕비의 시녀가
꽤 많은 서류를 왕 앞에 놓았다.
"이게 무엇이오. 왕비?"
"전하께서는 일라인 왕국의 왕이십니까?
아니면 피오네 왕국의 신하이십니까?"
짝!
벌떡 일어나 헤이라스 왕비의 뺨을 후려친 제라드 왕.
"나는! 자랑스러운 일리인 왕국의 왕이다!"
"옛말에 간신이 입을 열면 금화가 쌓이고
충신이 입을 열면 매를 맞고 돌아온다더니..
틀린 것이 하나 없군요."
"뭐라?!"
"북부의 땅 중 참 많은 곳이
어느 상단의 땅으로 바뀌었더군요."
"왕비는 몰라서 지금 그 일을 꺼내는 것인가?!
귀족이란 작자들이 도박이며 사치에 빠져 빚을 졌고!
갚지 못해 땅으로 빚을 갚았을 뿐이다!"
"네. 그렇죠.
귀족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일게 상단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왕실에 엄청난 세금을 납부했죠."
헤이라스 왕비가 부풀어 오른 뺨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쓸었다.
"저는 전하께 뺨을 맞아
이렇게 뺨이 붓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전하께서는 뒤통수를 맞고 어떨지 궁금하군요."
자신의 뺨을 쓸던 손을 내려 시녀가 내려놓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기던 제라드 왕이
더욱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내 던졌다.
"이것이 사실인가? 진실인가 물었다!
이 정보는 어디서 난 것인가?!"
왕비의 지시로 시녀가 건넨 서류에는
엄청난 세금을 바쳤던 상단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피오네 왕국에서 들어와
일라인 왕국의 상단으로 세탁된 상단,
피오네 왕국의 자금으로
영지 경영이 어려운 귀족들에게 고리대를 놓고,
경영에 어려움이 없는 영주들에게는 사치를 권유해
결국, 빚의 늪에 빠지게 만들어
합법적으로 영지의 일부를 차지한 상단.
이렇게 끌어들인 자금으로 일라인 백성들에게
피오네 왕국의 문화를 전파하고
피오네 왕국의 우수성을 알리던 상단.
"전하께서는 피오네 왕국을 대국이라 하시기에
그다지 충격이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름 충격은 충격인가 보네요."
"저희는 일라인 왕국의 전통성이
피오네 왕국에서 나왔다는 소문에도 가만히 계시고..
일라인 왕국의 전통 의상이 피오네 왕국의
과거 평민들의 의상이라는 소문에도
가만히 계시고..
북부의 전통 음식이 피오네 왕국 천민들의
주식이었다는 소문에도 가만히 계시기에
이 상단의 정체도 이미 알고
그들의 행동을 인정해 줬는지 알았습니다."
로이자 왕비가 헤이라스 왕비의 말에 힘을 실었다.
사실 두 왕비도 상단의 정체를 몰랐다.
그녀들 또한 상단이 바친 엄청난 세금으로
사치를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어리석은 귀족이라 욕하며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뒤로도 필요할 때 쓰라며 상단이 바친 돈과
물건들을 보며 웃었던 이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제국에서 돌아와
엉망이 된 계획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데
평소에 말없이 묵묵히 일하던 시녀 하나가
성도의 정보 조직 `킬`이 보내왔다며
서류 뭉치를 건넸다.
평소라면 조금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심했을
헤이라스 왕비였지만,
묵묵히 일하는 시녀에게서는 `믿음`이,
정보 조직 `킬`의 능력에서는 `희망`이 그
녀의 머릿속으로 헤집고 들어왔고
건네준 서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해 줄
빛처럼 느껴졌다.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고 경악한 것도 잠시.
헤이라스 왕비는 이것을 이용해
제라드 왕을 끌어내리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로자이 왕비가 동의했다.
"하? 진실이 그렇다고 해도
그대들 또한 상단이 가져다준 돈으로
온갖 사치를 하지 않았나?
그대들이 이를 탓할 자격이 없음이야!"
"네. 저희도 죄인이죠.
피오네 왕국이 우리 왕국을 좀먹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치 따위나 하고 있었다니..
네. 인정합니다. 그리고 반성해요.
하지만! 전하처럼 일라인 왕국의 문화와 양식을
마치 그들에게서 나왔고!
평민이나 천민들의 사용했을 법한 천한 문화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들을 위해
입을 닫지 않을 겁니다!
또한! 우리의 역사의 반도 되지 않는 역사를
가진 왕국을 대국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 따위!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피오네 왕국의 왕녀가 왕후가 된다면
나라가 어떤 꼴이 날지 보지 않아도 훤합니다.
그 왕녀가 상단의 정체를 모르지는 않겠지요.
당연히 작위가 내려지고 왕녀를 위해,
더 나아가 피오네 왕국을 위해 힘쓸 겁니다.
전하께서 승하하시고 그 왕녀의 자식이 왕이 되면!
지금도 이딴 무지한 소문이 돌고 백성들이 흔들리는데
그때쯤이면 일라인 왕국이 피오네 왕국의
속국이 될 겁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왕국을 꿈꾸고
어떤 왕이 되고 싶은지 모르겠으나!
전하께서 승하하시고 나면
일라인 왕국이 어떻게 될지 걱정됩니다.
해서! 저희는 이 사실을 근거로
전체 귀족 회의를 열어 전하의 폐위와
제 1 왕자의 왕위 계승을 건의할 생각입니다!"
"감히! 반역의 죄를 범하고 싶은 것이오!?"
"반역이 아니지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무능력한 왕을 폐위시키는 올바른 일이지요."
"여봐라! 두 왕비를 끌어내 감옥에 가둬라!
뚫린 입으로 스스로 반역을 말하는
두 왕비를 폐위시키고 내가 친히 벌할 것이다!"
벌떡 일어난 제라드 왕이 밖을 향해 외쳤으나
아무런 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무얼 하느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왕실 기사도,
왕의 호위 기사도 아닌
제 2 왕자 제퍼트 일라인과 그의 기사들이었다.
"전하를 궁으로 모시고 불편함이 없게 모셔라."
""충!""
"감히! 놓아라!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기사들에게 양쪽 팔이 잡힌
제라드 왕이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모셔라. 전하께서 가시는 길에 몸이 상하신다면
감히 전하의 몸을 상하게 한
문턱이나 벽에 죄를 물으면 된다."
힘으로 끌고 가도 탓하지 않겠다는 왕자의 말에
기사들의 움직임은 더 험악해졌다.
"놔! 놔라! 감히! 누구..!"
쾅!
고래고래 소리치는 제라드 왕이
기사들에 의해 끌려나가고 문이 닫히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형님께서는 일부 기사단과
귀족들을 제압하고 계실 겁니다."
헤이라스 왕비를 내려다보는
제퍼트 왕자의 표정이 사나웠다.
"약속을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켜지지 않는다면 형님과 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테고..
형님이 살아남는다 해도 왕국은 온전치 않을 겁니다."
헤이라스 왕비는 자신을 노려보는 제퍼트 왕자에게
인자하게 웃어주고는 시선을 로자이 왕비에게 돌렸다.
"동생. 아드님이 언제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니?
공국의 왕으로 손색이 없어."
"저도 왕이 된 아들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언니와 제가 손을 잡고 있는 한
왕국과 공국은 영원하겠지요."
카온과 정보 조직 `킬`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전달된 상단의 정보가 일라인 왕국에
새로운 끈적한 바람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