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넌 그 아이들을 입에 담을 자격 없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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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넌 그 아이들을 입에 담을 자격 없어.
반쯤 올라간, 아니 반쯤 찢긴 치마에 헝클어진 머리.
절망과 분노, 배신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소녀의 `잘못했어요` 라는 말과
`신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라는 사람 말을 하는 돼지.
나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돼지가 소녀를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뭐야? 감히 누가 신성한... 아니! 성자님!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할까?!
신관! 자제는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하는 것이냐?!"
머리채가 잡혀있는 성자를 보고,
적이라는 것이 분명한 나에게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라마즐라 신관을 향해 호통치는 주교.
성자를 소파에 던지고
잔뜩 움츠려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아이고 성자님!`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봉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잠시나마 즐기라는 뜻으로 신경을 거뒀다.
"많이 무서웠겠구나.."
잠시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혹시.. 혼자인 것이냐?"
끄덕끄덕.
점점 쌓여가던 눈물이 소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 자라 주었다."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주자
나보다 두세 살 작아 보이는 소녀가 목 놓아 울었다.
"네놈은 누구냐? 신의 아들이신 성자님을!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사람 말을 하는 돼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
소녀를 안아 올린 채 돌아봤다.
"왜? 너도 신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 따위를 하려고?"
천천히 걸어가 소파 위에 소녀를 앉히고
그 옆에 나도 앉으며 돼지가 아닌 리아를
향해 말을 이었다.
"리아. 이 아이에게 따뜻한 차 좀 내줘."
"네. 주군."
"으으윽.."
"성자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주교의 치료 덕분인지
끌려오면서 생긴 상처들이 사라진 성자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자 나를 향해
뭔가를 외치려 하던 주교가
다시 성자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내가 천하의 악당처럼 보이겠군.
그렇지 않나? 라마즐라?"
"..."
"소녀를 탐하려 한 주교의 모습에
충격이었느니 따위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성자의 만행을 지켜보고 방관한 너도
똑같은 놈이니까."
"네.."
성자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주교가
나를 노려보며 신성력을 뿜기 시작했다.
성자보다 덜하지만, 그와 맞먹는 신성력이 퍼지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또 한 명인 소녀가
공포로 떨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지?"
"알..알레나요.."
"그래. 알레나구나.
알레나. 네가 이곳으로 끌려왔고 너를 떨게 했으며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용서를 구하게 했던 것이
저 신성력 때문이었겠구나."
날뛰는 신성력은 오러나 마나처럼
누군가에게는 공포가 된다.
지금 이 방에 날뛰는 신성력은
최소 익스퍼트급의 살기가 섞여 있었다.
오러나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소녀는
자신의 목에 검이 겨누어지고
머리 위로는 자신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릴
마법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는 이 소녀를 라이거 영지로
데리고 가겠다 마음먹었지만 선택은 소녀의 몫이었고,
나를 따라가지 않는 선택을 한다면
소녀에게 오늘의 두려움은 지워주고 싶었다.
자신의 기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는지
더 짙은 신성력을 쏟아내는 주교 쪽으로
소녀의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알레나.
이 방 가득 채워진 힘은 네가 혼자 감당할 힘이 아니다.
신성력이란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잔인하고 큰 힘이지.
신을 모신다는 것들이 신이 주신 힘이라 칭하는 힘으로
아무 죄도 없고 힘이 없는 너를 겁주고 있다.
이럴 때 너를 보호하고 감싸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테지만..
이 힘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며,
그럴 힘이 있는 자들도 너를 모른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
자신의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너를 도와주고자 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고,
힘이 있는 자 중에서.. 이렇게."
소녀의 눈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신성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르는 척 돌아서는 것이 아닌
도와주는 자들도 분명 있다.
단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닌 진짜 몰랐을 뿐,
또는 너무 멀리 있어 알지 못하고
한걸음에 오지 못했을 뿐."
알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약함을 탓하지 말고,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너를 이끌었던 현실을 원망하지 말고,
그동안 너를 도와주지 못했던 이들을 원망하지 말고,
힘이 없어도 너를 돕지 못했던 이들에게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라.
원망과 증오, 저주의 대상은 바로 저 자이니.."
뫼비우스 고리를 회전시켰다.
방 안 가득해진 나의 기세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꺽꺽거리는 주교와 성자.
"알레나. 나는 지금부터 백성을 키지는 귀족의 의무로,
적과 싸우는 오러 소유자로서의 의무로,
지원과 보호의 의무가 있는 마나 소유자로서 의무로,
여린 백성인 너를 핍박하는 저 둘로부터 너를 보호하며
적인 저 둘을 처단할 것이다.
너에게는 잔인하고 보기 힘든 모습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도, 눈을 감아도 좋다."
"볼..볼래요."
"강한 마음. 너의 과거와 미래가 변할 것이다."
"신..신께서..신성..컥! 신성국이.. 너를.. 감히.."
성자도 주교도 나의 기세에 대응하기 위해
신성력을 뿜어냈지만,
고작 저 정도의 말을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입을 열 때마다 출렁이는 너의 살들이 역겹다.
신을 모신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닌,
탐욕에 물든 너의 모습이 추하다.
신성력을 이용해 소녀를 탐하려는 죄를
지금부터 묻겠다."
"미..미천한..고아..에게 새..로운 부모.. 컥!
새로운 삶에..대..대한.. 댓가..와..신의..축복을..!"
고아인 알레나에게 새로운 부모를 소개해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주려 했다.
이는 모두 신의 은혜이기에 감사를 표하면 축복을 주겠다.
감사의 표현은 몸을 내어주는 것이고
몸을 섞는 것이 바로 축복이다.
이 개 같은 논리에 어이가 없었다.
발아래가 얼기 시작한 리아의 분노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충격받은 표정의 라마즐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마즐라. 너는 모르고 있었던 표정인데?"
"성자와 주교들.. 교황이
여자와 동침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로 품은 여자들이 없었다는 말도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제가 본 여자들은
손에 쥐어진 것들에 만족하며 떠났습니다.
제가 본.. 여자들은 말이죠..
교황청의 구제 정책으로 고아들을 귀족들이나
상인 집안에 입양 보낸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성자니, 신의 아들이니 하며 소리치다가
물에 젖은 생쥐가 되고 피에 젖은 생쥐가
되었을 때의 모습과 조금 달라진 라마즐라.
지금에 와서 진실을 말하고 반성한다 해도
그를 용서해 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
성자와 교주를 향해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붉은 구슬 두 개가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성자는 교주는 오러가 가득 실린 검도 아닌,
활활 타오르거나 시리도록 차가운 얼음의 창도 아닌
고작 작은 구슬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 오자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작은 구슬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그들이 함부로 사용했던 곳.
펑! 펑!
"으아아아악!"
"아아아아 아파! 아파!"
두 번의 폭발음과 두 개의 비명.
작은 마법 구슬은 정확히
남자의 그곳만 폭발시킨 뒤 사라졌다.
그들이 가진 신성력 때문에
피는 멈추고 상처는 아물었지만
흔적조차 남지 않은 흉물까지 재생시키지 못했다.
고통에 기절한 것이 아닌 충격에
정신을 놓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마라즐라에서 말했다.
"교주도 데리고 간다."
"네.. 그런데.. 입양된 아이들은.. 컥!"
라마즐라의 목을 움켜쥐었다.
"몰랐다지만 넌 그 아이들을 입에 담을 자격 없어.
교황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다 찾아낼 거야."
라마즐라를 문쪽으로 밀며 잡았던 목을 놓았다.
"게이트로 안내해."
"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도착한 곳은 교황청이 아닌
성자가 사는 대신전이라는 곳이었다.
"리아."
"네. 주군."
"영지로 가서 칠흑 기사단 데리고 와."
"충!"
리아가 아공간에서
텔레포트 아티펙트를 꺼냄과 동시 사라졌다.
"칠..흑 기사..단"
"오늘 신성국은 사라진다."
*
카온이 신성국으로 이동하고,
일라인 왕국의 제라드 왕이
자신의 궁에 갇혀 온갖 집기들을 던지고 있던 시각.
포이든 왕은 피오네 왕국 왕성 인근 영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르륵.
낡은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왕녀가 장난감을 당장 가지지 못해
마음이 상하여.. 달래 준다고.."
"하하 피오네 국왕. 괜찮습니다.
장난감이 클수록 가지지 못한 아쉬움은 큰 법이지요.
오랜만에 같잖은 귀족들의 헛소리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간을 보내니 좋았습니다."
피오네 왕과 포이든 왕의 비밀 회담이었다.
"카온 그놈에게 완전히 당해 버렸습니다.."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렸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두 왕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마주 앉아 있는 상대방도
그러했음을 알고 있었다.
"크흠.. 지금은 지난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지요."
"그렇죠. 덕분에 정신이 맑아지기도 했고.."
"포이든 국왕. 일라인 왕국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카제`에 관한 것이겠지요."
몇백 년간 이어져 끊임없이 추적해
흔적을 지우는 단체 `카제`
일라인 왕국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그 집요함을 품고 어떤 형태와 어떤 모습으로
피오테 왕국에서 활동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운영하는 것에는 상당한 비용이 듭니다.
`카제`의 본 업무는 모두
일라인 왕국을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우리 왕국에는 없다는 말입니까?"
"누군가를 찾아 제거하는 임무의 `카제`는 없죠."
"그렇다면.."
"국왕께서도 우리 왕국에
정보 조직 하나쯤은 심어 놓지 않았습니까?"
첩자나 정보 조직이
검이나 마법만큼 중요한 전략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고 모든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이기에
피오네 왕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포이든 왕국에서 노예가 된 자 중에
우리 왕국의 귀족들이 있소?"
"귀족의 피가 흐르는 것들은
아무리 하위 귀족이라도 다루기가 힘들지요."
귀족이 없다는 말에, 귀족이 아닌
평민 이하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피오네 왕을 보며
포이든 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로가 솔직해진 기념으로
피오네 왕국 내의 모든 `카제` 활동을
멈추라 지시하지요."
"아닙니다.
평민은 돈이지만 천민은 독이지요.
왕국의 천민이 국왕께 도움이 된다면 데려가지요."
"허허.. 그럼 그 부분은 일라인 왕국이 아닌
카이젠 제국 황실의 회의장에서 논해 봅시다."
"하하하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러지요. 하하하"
카온의 무례로 제국과 일라인 왕국,
또는 제국-일라인 연합과 라이거 가문,
그리고 또는, 테슬린 공작 가문이 포함된 전쟁.
제국이 군사를 일으키면 좋고
그렇지 않아라도 일라인 왕국은
곧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두 왕은 생각했다.
동시에 폐허가 될
일라인 왕국 영토를 서로 나누는 것 보다
더 큰 영토인 제국을 나눠 가지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것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카온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친 황제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은 두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