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제가 만든 집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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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제가 만든 집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막사를 나가기 전 아버지께서 앉아계셨던 의자에
이번에는 내가 앉았다.
대화의 주체가 바뀐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공작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향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그렇군."
행동에 거침이 없었던 나보다
`정`과 `목숨`, `영지민` 이란 단어들을 이용해
감정에 호소하기 편한 상대가 아버지였을 테니
공작으로서는 나보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제 성격 아실 테고,
시간이 없다는 것은 공작님도 아실 겁니다.
그러니 서로 돌려 말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종전을 하게 되면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야 당연히 서부와 남부의 평화지.
아니, 어쩌면 일라인 왕국 전체의
평화와 단합이라고 할 수 있지.
그대도 알지 않은가?
바다 건너 포이든 왕국과
사막 너머 피오네 왕국이 손을 잡았어.
그들의 창끝이 향하는 곳은
우리 일라인 왕국일 거야.
힘을 합쳐 침략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같은 왕국민들끼리 전쟁이라니!"
앞선 대화에서 `나는 반성했다.`라는 배경을
깔아 놓았기 때문인지 가증스러운 말을
잘도 내뱉는 공작이었다.
우리는 영지 방어와 서부 정벌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 출정이었다.
급조한 6만의 군을 상대로 나와 칠흑 기사단,
몬스터 숲 방위군을 제외한
라이거 가문의 전력 전부를 데리고 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자금과 물자 등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서부 군 좌우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우리 군의 사상자가 나왔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했고, 이제는 다른 하나의
목표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만히 있는 우리를 서부가 먼저 건드렸습니다.
10만의 군을 움직인 비용과 전투 중
주신의 품으로 떠난 이들은요?
베로니카 후작이 항복을 선언하고
패전의 보상을 지급한다는 서신..
아니, 약조라도 받고 오셨습니까?
설마 그런 것도 없이
승리를 눈앞에 둔 우리에게 찾아와
왕국의 평화니, 단합이니 하는 말로
종전을 운운하셨던 겁니까?"
"서부 군에 남은 것은 고작
베로니카 후작 군뿐이네.
그것도 후작 본인과 기사 몇, 병사 몇뿐이지.
반대로 라이거 군의 인적, 물적 피해는
거의 없지 않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은 일라인 왕국이 하나가 되어야 하네.
서부도 일라인 왕국의 영토고 귀족이며
백성들이야. 라이거 군은 피해가 없지만,
서부는 그렇지 않아.
그래.. 그들이 먼저 침략한 것은 맞아.
하지만 이번 전쟁에 참여한 귀족들의 영지에는
남은 것이 없을 거야.
심지어 영지를 이끌 귀족도
라이거 군에 의해 죽었어. 그러니.."
"그러면."
모든 것을 서부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공작의 말을 끊었다.
"우리가 서부를 통합하고 남부와 서부가 하나인
라이거 영지로 만들면 되겠네요."
"그게 무슨!"
"공작님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죽인 귀족의 부재 때문에
그들의 영지가 힘들고 보상할 여력이 없으며,
지금은 일라인 왕국이 하나가 되어야 할
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라인 왕국이 여러 귀족과
여러 영지가 뭉쳐진 왕국이듯,
남부와 서부를 하나인 라이거 영지로 만들고
우리의 자금과 인력을 쏟아붓겠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을 볼 생각이었군."
"라이거 가문을 건드렸으니까요."
아공간에서 바이올렛과 마린다가 확보한 자료를
공작 앞에 던졌다.
"그리고 이런 자들을 그냥 둘 수 없고,
이런 것들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까요."
자료 속에는 베로니카 백작이
후작으로 승작하는 과정에서 지금은 감금되어있는
제라드 왕과 나눈 협력 조항과,
남부 침략 전 헤이라스 왕비와
주고받은 거래 내용.
이를 이용한 후작의 앞으로의 정책 방향과
계획서 등이 적혀있었다.
"하.. 미친! 이건 어디서.."
"베로니카 영주성 내 집무실..
조잡한 마법 금고에 있었다더 군요."
"후.. 이미 영주성도.."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던 공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서부 귀족들까지 강제하지 않는다면
라이거 영지의 확장을 인정하겠다."
마치 왕이라도 된 듯한 공작의 말이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누리라는 의미로
그냥 넘어갔다.
"대신, 신성국의 영토를 왕국에 헌상하게.
왕권도 중요하지만, 귀족들의 균형도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야.
하나 된 왕국이 필요한 지금.
거대해진 라이거 영지는
귀족들의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킬 걸세."
귀족들 간의 균형,
치우친 힘에서 나오는 질투와 분란.
정상적인 왕국에서는 공작의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신성국의 영토를 내어 줄 뜻이 없다.
탄압의 백성들을
또 다른 탄압으로 밀어 넣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단,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다?"
"솔직히 묻죠.
지금의 왕실이 엉망이 된 신성국을 재건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질 자금과 인력이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없다.
왕실의 자금은 피오네 왕국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일라인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포이든 왕국과 손을 잡고
왕실은 물론 귀족들을 타락 시켰으며,
능력 없는 후계자에게 작위를 인계하게 만든 것이
공작 본인이었다.
피오네 왕국과 손잡은 왕실과,
포이든 왕국과 손잡은 공작이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인 아카데미조차
망쳐 놓았으니, 옛 신성국의 백성들을
올바르게 보살필 인물이 없었다.
왕실은 피오네 왕국의 자금으로 사치하고,
귀족들은 영지민들의 세금으로 사치했으며,
공작은 작위 명처럼 포이든 왕국과의
공작 활동에 힘을 썼기에
당연히 자금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자금과 뛰어난 인재들이 있죠.
신성국이 라이거 자치령이 되어 정상화가 된 뒤..
새로운 왕이 그곳을 품을 준비가 되면
`네 기둥` 가문의 이름을 걸고 왕국에 헌상하죠."
"서면으로 작성 가능한가?"
"`네 기둥`의 명예조차 못 믿으시겠다면
작성해 드리죠."
"좋다."
역시 공작은 서부의 평화와
서부 영지민들의 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서부의 민심이 필요한 공작답지 않게
서부와 전쟁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는
생각과 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반면,
신성국에 대한 대화에서는 `서면 작성`을
거론할 만큼 머릿속이 정리된 듯 보였다.
즉. 서부는 신성국 영토의 처우를 꺼내기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새로운 왕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솔직히.. 난 왕이 되고 싶었네.
내가 아니더라도 내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보고 싶었어.
하지만 다 부질없었어.
뿌리와 등을 돌리고 외척과 손을 잡았지..
그리고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고..
뿌리를 놓친 나는 설 곳이 없었어..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그딴 왕관이 무엇이기에 가족까지.."
또다시 구구절절한 공작의 연기와
마음에도 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왕국의
전통성에게 충성하기로 했다네."
그가 말한 진정한 왕국의 전통성은
다른 왕자나 왕녀가 아닌
오로지 제이슨 왕자일 것이다.
"외부의 침략을 몰아내고
더 강건한 역사를 써나갈 일라인 왕국을 위해
이번 귀족 회의에서 남부와 서부를 대표해
라이거 가문이 지지해 주었으면 하네."
포이든 국왕에게나 숙였을 법한 공작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지지하죠."
아버지는 물론,
허락의 말에 고개를 든 공작도 놀란 듯했다.
"대공의 작위와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
대공 즉위 선물로 3개월간 백성들의
남부와 서부로의 이주의 자유를 주시면
제이슨 왕자든, 제퍼트 왕자든,
아니면 로즈 왕녀든, 왕실이 내세운
새로운 왕을 지지하죠."
*
공작은 카온의 제안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짧게 스쳐 간 생각에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우선 대공의 작위를 긍정하기 전에
확실히 할 게 있었다.
"대공이라면 공국을 세우겠다는 말인가?"
대공의 작위와 자치권이면 공국을 의미했다.
"왕의 칭호를 사용할 의사는 없습니다.
라이거 공국이 아닌
라이거 대공작의 작위를 원할 뿐입니다.
자치권 또한 왕국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지법의 확대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군요.
그보다.. 가만히 있는 라이거 영지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항에 가깝고요."
공국은 왕국에 속하지만,
독립의 성향이 강한 의미였다.
하지만 카온이 요구한 것은
독립의 꿈을 꾸는 공국이 아니라
공작보다 한 단계 위이자 명예직에 가까운
대공작의 작위뿐.
`네 기둥` 가문으로서 그동안 억눌리고
대접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꼭두각시로 세울 제이슨 왕자가
민심을 얻을 좋을 기회기도 했다.
그동안의 왕들과 다르게 라이거 가문을 품은 왕.
갈대 같은 귀족들에게 기회라는 희망을 줄 수 있고,
오로지 라이거 가문에게만 향했던
남부 백성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기회였다.
전쟁을 종결시키며 넣고자 했을 민심보다
더 큰 민심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역시
라이거 가문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라이거 가문이 먼저 다른 영지를 침범할 일은 없고,
그들이 뭘 하든, 공국이든, 명예 대공이든
왕국에 세금을 내는 것은 분명하다.
서부까지 장악하고 대공작에 오른 라이거 가문이
내는 세금은 엄청난 양일 것이다.
작위 하나 내려 주고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이점들.
왕이 될 제이슨이 이를 활용해
부유하고 강한 왕국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라이거 가문을 품었기에 생겼던
백성들의 기대와 희망을 클수록,
제이슨이 왕국을 엉망으로 운영한다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실망도 클 것이다.
그때 자신이 나선 된다.
배신한 왕국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그들과 협력해 제국을 정복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왕국의 안전과 평화를 가져온
자신이 나서면 된다.
또한, 영원한 적과 동맹이 없듯.
두 왕국 중 하나에게
신성국의 영토를 내어준다는 조건으로
라이거 영지를 차지하는 기회를 엿볼 수 있다.
비상한 머리의 카온이라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거 가문을 때가 오기 전까지 건드리지만 않으면
카온은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백성의 이주도 나쁘지 않다.
이주의 자유가 있더라도
고향을 잘 떠나지 않는 것이 평민들이다.
천민들의 이주가 주가 될 것이고,
이는 다른 영주들의 골칫거리를 덜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동안 문을 닫았던
라이거 영지가 백성들이 이주하는
3개월이란 기간 동안 문을 연다.
이는 그동안 심어 놓기 힘들었던 첩자들을
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결심을 내린 테슬린 공작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 대로 관련 서류를 보내지.
작위는 새로운 왕의 즉위식에서 내려질 것이야."
"그럼 귀족 회의에서 뵙죠."
원하는 것을 얻은 카온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테슬린 공작이 일어나 막사를 나갔다.
*
"카온. 대공이라니.. 그것이 너의 뜻이더냐?"
테슬린 공작이 나가자마자 아버지께서 물었다.
"아버지.
발정 난 개새끼가 왕이 되든,
욕심 많은 여우가 왕이 되든..
어차피 일라인 왕국은 무너집니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며,
지친 몸이 누울 수 있는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때가 오면.. 저는 우리 백성들에게
제가 만든 집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장하고 대견하구나! 우리 아들."
아버지께서는 이 말을 끝으로 나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