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남부와 서부도 지지하죠.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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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남부와 서부도 지지하죠.
다시 신성국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베로니카 후작의 전령이 도착했다.
아버지는 심각하게 읽던 서신을 건네주고,
깊은 한숨을 쉬셨다.
안타까움이나 답답함의 한숨이라 아니라
분노가 섞인 어이없어하는 한숨에
건네준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항복 서신은 맞았다.
후작이 `요구`한 `조건`은
가문과 영지의 보존이었고,
항복의 댓가로 남부와 인접한 영지와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한 가문의 가주로서, 한 영지의 영주로서
가문과 영지민들을 위해
가문과 영지의 보존을 희망하고,
패배했기에 보상으로 영지의 일부와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상적이다.
하지만 내용의 순서와 표현에는 문제가 많았다.
첫째. 후작의 서신 어디에도
서부가 먼저 침략했다는 내용이 없었다.
둘째. 그 어떤 반성과 사죄의 말이 없었다.
셋째. 귀족답게 돌려 표현했지만,
항복의 내용을 요약하면
`가문과 영지의 보존을 약조`한다면`
항복을 한다.` 였다.
항복을 요청하는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항복을 할 테니 가문과 영지를
보존해 달라.`가 맞았다.
넷째. 보상금의 대략적인 금액도 적혀있지 않았고,
넘기겠다는 영지도 후작령이나
후작을 모시시는 가신단의 영지,
심지어는 이번 전쟁에 참여한
서부 귀족의 영지가 아닌,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자,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영지였다.
만약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남부 전체가 라이거 가문의 땅이기에
서부와 경계를 마주한 영지를 내어주고
그곳을 관리하는 귀족과 영지민을
이주시키면 된다.
하지만 서부는 통합된 영지가 아닐뿐더러
후작이 댓가로 주고자 하는 땅도
후작의 영지가 아니다.
이런 경우 경계의 영지를 보상으로 주는 것이 맞지만,
그 영지는 자기 영지가 아니기에 이에 해당한 금액을
대신하겠다고 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건과 요구가 달린 항복 서신,
서부 전체가 마치 자기 영지라도 되는 양
보상을 언급하는 후작의 모습에
아버지도 나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전령은 잘 듣고 후작에게 전하라."
"네? 네!"
"가문과 영지를 보존해주면
항복하겠다는 것에 대한 답은 이와 같다."
"네? 그렇게 적혀있단 말입니까?!
아! 죄.죄송합니다."
눈앞에 있는 그도 어이가 없었는지
발로 전쟁을 치르는 전령임에도
놀라서 물었다가 본분을 자각하고
급히 사과하며 입을 닫았다.
"그래. 전령인 그대가 들어도 어이가 없겠지..
라이거 가문의 가주이자 라이거 군을 이끄는
나 펠리스 라이거는 그대의 가문과 영지를
보존할 마음이 없으니 항복을 하지 않아도 된다."
"백..작..님! 아니! 총사령관님!"
전령 또한 한 명의 군인이기에 아버지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보상으로 내주려 했던 지금 이 영지는
어차피 라이거 가문의 그늘 속으로 들어올 땅이기에
이 또한 필요 없다."
"백작님.."
전령은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전령."
아버지의 말이 끝났음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불렀다."
"네.. 카온 라이거님.."
"그대의 등에 꽂힌 깃발의 색이 무엇인가?"
"흰색입니다."
"라이거 군은 흰색이 있는 곳에서
쉬어가며 진군하겠다."
"흰색이.. 아!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의 용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였다.
*
21살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날.
나는 백작의 신분으로
일라인 왕국 왕성의 대회의실 문 앞에 서 있다.
그동안 나와 라이거 가문,
그리고 라이거 영지에 변화가 있었다.
먼저 아버지께서
라이거 군을 이끌고 서부를 장악했다.
베로니카 후작은 항복이 거부당하자 영지로 도망쳤고,
라이거 군은 천천히 뒤를 따랐다.
베로니카 후작령은 서부의 중간이 아닌,
약간 왕국의 중앙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라이거 영지의 경계에서 베로니카 후작령까지는
서부의 반이 조금 안되는 규모였다.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후작이 도망치면서
길목의 영주들에게 라이거 군을 막으라고 명했지만,
영주는 물론 그곳의 영지민들은 듣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몇 안 되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후작이 영지를 벗어나면 백기를 걸었다.
물론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라이거 군을 앞길을 막으려 했던 자들은
이번 전쟁에서 참여한 가문이면서,
영지에 남아있던 가주와 후계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조차
손목에 흰 손수건을 감은 영지민들이
성문을 열면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결국 도착한 베로니카 영주성.
베로니카 후작의 마지막을 보고 싶어
잠시 리아와 함께 들린 그곳의 풍경에
어이가 없었었다.
마린다와 바이올렛에 의해 엉망이 되어버린
영주성에 안에 틀어박힌 후작과,
그런 후작을 보호하듯 관문을 지키는
수백의 여성들, 그리고 일반 여성들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라이거 군.
어쩔 수 없이 리이가 나섰다.
수백 여성들의 아우성을 온몸으로 받으며
리아는 딱 한 마디 했다.
`꺼지세요.`
조절했다지만 마스터의 기운을 담은 한마디에
서로의 팔짱을 끼고 절대 항전을 외치던
여성들은 가장 먼저 도망치면 죽기라도 하듯
흩어져 버렸다.
반쯤 미친 모습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후작을
감옥에 넣는 것을 끝으로 서부 정벌이 끝이 났다.
이틀 뒤 찾아온 자브레 가문을 시작으로
서부 귀족들의 깃발이라이거 가문의 깃발 뒤로 꽂히며
서부와 남부가 라이거의 이름 아래 통합되었다.
아버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직 남은 잔당 처리를 위해 일부 기사들과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군의 권한을
아키 단장에게 주며 몬스터 숲 정벌을 명했다.
그리고 현재, 아키 단장이 이끄는 라이거 군과
메튜가 이끄는 방위군이
몬스터 숲을 장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제 귀족 회의 참석을 앞둔 나에게
아버지는 백작의 작위를 넘기셨다.
"카온 라이거 백작님 드십니다."
기사의 알림에 필립 시조님의 반지와
라이거 가문의 가주 반지를
번갈아 만지며 빠져있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가장 늦게 도착했지만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비어있는 왕의 자리 오른쪽에는
헤이라스 왕비와 제이슨 왕자,
로즈 왕녀가 앉아있었고,
왼쪽에는 로자이 왕비와 제퍼드 왕자가 앉아있었다.
귀족들 자리 중 왕좌가 가장 가까운 곳에는
테슬린 공작이 앉아있었고, 그 맞은편 자리는
나라는 주인을 기다리는 듯 비어 있었다.
왕실의 일원들과 작위 순으로 앉은 귀족들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번 귀족 회의의 안건은 다들 알고 계실테니
따로 언급하지 않지만!
왕실과 `네 기둥` 가문 중 하나인 테슬린 가문이
전하께서 주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음에도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는
그대들도 알아야 하기에 말해 주겠소."
테슬린 공작의 발언은 나름 좋은 판단이었다.
제국 연회 이후 정세에 관해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은 모르고 관심 없다.
직접 경험하지 못했고, 직접 듣고,
보지 않은 이들이 내는 소문이 더 확대되고,
자극적이기 마련이다.
왕국이 어떤 지경인지도 모르고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내가 왕국의 충성스러운 귀족이네.` 하며
온갖 말을 쏟아내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말과 행동을 한다.
왕실과 힘 있는 귀족들은
그런 귀족들의 입을 닫게 할 권력이 있으나
백성들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헛소리를 잠재우려는
공작의 행동에 속으로 박수를 쳐줬다.
공작의 설명이 끝나고 나온 귀족들의
`이런`, `저런`이라는 탄식이 웃기기만 하다.
"그래서 전하를 폐위하고 정통 후계자
서열 1위인 제이슨 왕자를 일라인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자 합니다."
"찬성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가장 먼저 찬성하며 지지를 표한 이들을 바라봤다.
왕실의 개라 불리는 하인즈 후작과, 아비게일 백작.
역시 왕실의 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래 주인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짖는 대신,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자 꼬리부터 흔들고 보는
멍청한 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두 고위 귀족을 시작으로
모두가 지지를 표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남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나였다.
"남부와 서부도 지지하죠."
남부와 서부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왕실 일원들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이제 즉위식만 남은 제이슨 왕자와
회의 내내 나만 노려보고 있던
제퍼드 왕자의 표정이 특히 좋지 않았다.
축하와 박수가 이어져야 했을
회의장의 분위기가 식었다.
"큼. 다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소.
헤이라스 왕비, 아니 이제는 태왕후께서
연회를 마련했으니 다들 참석해 주길 바라오."
아직 새로운 왕의 즉위 때마다 있었던
승작과 보상, 죄인들의 사면 같은 것들의 안건이
남아있었지만 테슬린 공작은 추후로 미루고
회의를 끝냈다.
도망치고 쫓겨나듯 귀족들이 나가고
넓은 회의실에 왕실의 인원과 공작, 나만 남았다.
"신성국의 영토는 언제 왕실로 넘길 거지?"
길게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을 제퍼드 왕자가 깼다.
"분명. 라이거 자치령이 안정을 찾고,
새로이 왕이 된 제이슨 왕자가 그곳의 땅과 백성들을
품을 준비가 되면 넘긴다 했습니다.
그런데.. 제퍼드 공작께서
신경 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퍼드 왕자는 제이슨 왕자가 즉위하는 순간
공작의 작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대는 왕실과 전하를 무시하는 것인가!?"
"네."
"뭐..?"
"무시하는 겁니다.
테슬린 공작이 자치령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인력을 설명했을 텐데,
그럴 자금과 인력이 없고, 준비되지 않았음도
말을 꺼내는 왕실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제이슨 전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비.. 이제는 태왕후께서도 아니고..
심지어 조약의 주체나 다름없은
테슬린 공작도 가만히 있는데
왜 제퍼드 공작께서 신경 쓰고 말을 꺼냈냐고
여쭤보는 겁니다."
"신성국의 영토는 나! 제퍼드가 다스릴 영토다.
공작령이 될 영지를!
그 영지의 주인인 내가 묻는 것이야!"
순간 나폴레이가 예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주군. 그냥 넘어갈
로자이 왕비와 제퍼드 왕자가 아닙니다.
공작 이상의 작위와 왕권에 근접한 권한을
약속받았을 겁니다.`
아마 언제나 그랬듯
처음에 그들이 목표로 했던 영지는 남부였을 것이다.
공작의 작위와 남부.
어쩌면 그 이상인 공국을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꼬이고 남부와 서부가 합쳐지고
라이거 가문은 대공작이 되었다.
이제야 왜 제퍼드가 작위와 영토를
동시에 받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왕실이 하사할 수 있은 영지는
중앙과 북부, 동부뿐이다.
만약 공국을 약속했다면 적어도
북부를 내어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온전히 왕국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중앙과 동부밖에 없었다.
결국 남는 것은 라이거 자치령된 신성국 뿐이었다.
"자치령의 땅을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단, 지금까지 들어간 자금은 어쩔 수 없지만,
계획된 자금은 회수하고, 라이거 가문이 파견한
인재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그.. 무슨!"
"또한, 자치령의 백성은
현재 모두 라이거 영지에 등록되어있습니다."
에르제의 의견으로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신성국의 백성들을 라이거 영지의
영지민으로 등록하는 것이었다.
"라이거 영지법에 따라
모든 라이거 영지민은 이동의 자유가 있기에
자치령의 영지민들은 남부로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통합된 라이거 영지에는
그들이 와도 충분한 땅이 있었다.
자금과 인재의 회수, 백성들의 이동.
신성국의 영토에는 땅과 비어버린 건물,
짓다가 중단된 건물 말고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 요즘은 줄어들긴 했지만.. 제국과 두 왕국,
그리고 각국 신전에서 날아오는 항의 서한도 있군요.
같이 넘겨드리죠."
"그대는 왕국의 귀족이다!"
"닥치고 말을 들어라?
닥치고 자금과 인력을 지원하라?
맞습니다. 네.. 왕국의 귀족이죠.
대공작이자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귀족이기도 합니다.
더 쉽게 설명해 줘야 합니까?
공국에 준하는 완전한 자치권은
반역을 제외한 모든 것에 왕국이 아닌 공국법.
우리 같은 경우에는 영지법을 우선하고,
타국에 침략이 아닌, 타국의 침략을 받을 때만
왕명을 따른다. 이제 이해가 좀 가십니까?
그리고.. 아직도
그대와 내가 왕자와 후계자로 보이나?"
마력이 회의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왕자 시절 `네 기둥` 가문에 대해서도 모르더니.
공작이 되어도 공작과 대공작의 위계를 모르는 군."
"감히..감히.. 라이거 따..!"
"그만! 네 이놈! 대공께 무슨 무례더냐!
대공께서도 기운을 거두시지요."
"형님..?"
제이슨 왕자, 이제는 제이슨 일라인 왕이 된
그의 개입에 마력을 거뒀다.
"기다리거라."
제퍼드 왕자에게 하는 말이지만 그의 눈은
증오와 분노를 담고서 나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