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작위를 박탈한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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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작위를 박탈한다.
제라드 선왕과 헤이라스 대왕후의 장례는
일라인이란 성을 가진 이들만 참석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무슨 생각인지 제이슨과 제퍼트가 한목소리로
장례는 왕실장으로 치러야 하다고 소리쳤지만
내가 나서기도 전에 라이가
`두 분의 서거에 슬퍼할 백성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분노에 돌이 날아들겠지요..
망국의 길로 이끌었고..
무책임하게 떠난 분들입니다.
두 분의 시신이라도 훼손되지 않게 하려면
조용히 끝내야 합니다.`
라는 말로 그들의 의견을 일축했다.
장례가 끝난 뒤,
제이슨과 제퍼트는 칠흑 기사단의
철저한 감시 속에 지하 감옥으로 거처를 옮겼고,
로자이 왕비 또한 반역 공모죄가 적용되어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귀족 회의 하루 전날 밤.
아직 처분이 결정되지 않은
로즈 일라인이 나를 찾아왔다.
"지난 저의 죄를 물으실 건가요?"
"아니."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건가요?"
제이슨과 같은 마지막 의무가 있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없어."
"그럼..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건가요?"
"그것도 없어."
"그럼.. 왜?"
"너는 로즈 일라인이 아닌 로즈로 살게 될 거야.
네가 태어나고 제라드가 `로즈`라는 이름을
왕국 유일의 이름으로 만들었으니
이름을 바꾸는 것도 좋겠군.
원하는 이름이 있으면 에르제에게 말해.
처리해 줄 거야."
귀족도 아닌 평민으로 살게 될 것이란 말이었다.
"그렇군요."
"넉넉한 자금을 내어줄 테니
그 돈으로 무엇을 하든 알아서 해."
새로운 신분과 살아갈 자금.
딱 거기까지가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럴 주제가 아닌 건 알지만..
한가지 청을 올려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이슨의 출정 명령을 거부하고
감옥에 있는 제 호위 기사가 한 명 있어요.."
카시오스가 제이슨을 감옥에 넣을 때
반쯤 죽어가는 몸으로 기어와
로즈의 생사를 묻던 남자가 있었다는데,
그자인 듯했다.
"그자의 치료가 끝나면 왕성을 나가도록."
왕녀와 호위 기사의
관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약 그녀가 진실하게 살아보자 한다면,
뛰어난 미모와 많은 돈은 살아갈 힘이 아니라
독일 뿐이었다.
물론, 나에게 기회를 받은
모든 이들 주변에 칠흑 기사들이
그들의 곁에 숨어있었지만,
이유와 관계가 무엇이든 죽어가면서도
왕녀를 걱정하는 호위 기사 하나쯤은
곁에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날이 밝고 귀족 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귀족들은 벌써 갈렸다는구나."
대회의장으로 가는 길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정상적인 회의라면
라이거 가문의 작위가 나에게 있기에 아버지는
귀족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지만,
라이가 권한 대행의 권리를 이용해 참석을 부탁했다.
"동부 귀족들의 도망만큼 빠르군요."
"그렇게 말이다."
노도우 테슬린의 부재, 아폴론의 반란.
왕국이 혼란에 빠질 것을 예상한
동부 일부 귀족들은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포이든 왕국으로 도망치려 하다가
끝났다는 말에 모두 되돌아왔다.
"어떻게 손을 잡았다고 하던가요?"
"가장 큰 세력은
페이트 공작을 중심으로 한 동부 귀족들이다.
도망치려 했던 귀족들이 모두
페이트 공작에게 붙었다는구나."
그들이 외치는 건 왕권의 후계 순위와
라이거 가문의 왕성 점거였다.
제이슨이 라이에게 권한 대행을 맡긴 것은
라이거 가문의 협박 때문이고,
라이거 가문이 무력으로 왕성을 장악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과 함께
정당한 왕실의 주인은 제퍼트라 외치고 있었다.
"다음은 힘든 몸을 이끌고 온
하인즈 공작을 중심으로 한 중부 귀족들이다."
"주인의 목을 물어 놓고 빨리도 꼬리를 흔드는 군요."
아들인 노아스 하인즈가 제이슨의 목에 검을 겨누고
라이의 편에 섰다는 것을
반란군 진압의 공으로 생각한 것인지,
그는 라이가 왕국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다음은 북부 귀족들이
안테르 가문을 중심으로 뭉쳤다."
"안테르 가문이라.. 역시 움직이는군요."
안테르 가문은 북부의 남작 가문이었다.
북부의 귀족들이
고작 남작 가문의 밑으로 모여든 이유는
그 가문이 왕국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피오네 왕국의 귀족인 차르나 가문의 힘으로
귀족이 되었고, 차르가 가문의 자금과 힘으로
성장한 일라인 왕국의 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피오네의 사상과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릇되고 멍청한 옛 영광에 사로잡혀
다시 피오네의 그늘로 들어간 그들은
누가 되었든 제국의 조건을 철회해줄 이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남부에서는 폴리아리스 후작이,
서부는 이미 와있는 쇼페라 후작이 참석했다."
두 후작은 회의를 목적으로 왕성에 온 것이 아니라
쇼페라는 에르제를 돕기 위해
이미 와 있어 회의에 참석한 것이고,
폴리아리스 후작은 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딸인 에르제를 돕기 위해 온 것이었다.
"장인어른께 한 소리 들을 것 같습니다."
"부인을 그렇게 굴리는데!
당연히 혼이 나야지. 하하"
대회의실 문 앞에 도착하자
라이거 기사 한 명이 예를 올렸다.
"고생이 많군."
"고생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대공 각하!"
"고하라."
단순히 우리가 왔음을 알리는 행동임에도
오러까지 방출하는 기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카온 라이거 대공 각하 입장하십니다!
펠리스 라이거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을 열어주는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대회의실에 안으로 들어갔다.
일라인 왕국의 모든 권한을 가진 라이와
새롭게 테슬린 가문의 가주가 된
키엘을 앞에 두고도 파벌끼리 언쟁을 벌리던 모두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아버지와 내가 자리에 앉자
페이트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대공! 아무리 대공이라도
왕실의 정당한 핏줄을 가두고
죄를 물을 자격은 없소!"
"맞습니다! 대공작도 엄연히 왕국의 귀족이거늘!
왕실의 죄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왕실의 사람들 뿐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도망친 귀족들
모두의 얼굴을 모르지만,
적어도 페이트 공작의 말에 동조하는 이는
얼굴을 아는 자였고,
도망친 귀족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죄가 적힌 문서에는
라이거 가문의 인장이 아닌,
일라인 왕실의 인장이 찍혀있다."
내 말에 페이트 공작이 피식 웃었다.
"아니지요. 대공! 라이 왕자께서
스스로 왕실을 인장을 찍은 것이 아니라!
대공께서 왕자님이 찍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지요."
"아.. 그런가?"
"저희도 할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는지
페이트 공작의 파벌이 아닌
동부 귀족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저 키엘이라는 자를
동부 대표 가문인 테슬린 가문의 가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동부의 두 세력이 목소리를 내니
중부도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늙은이가 한 마디 올리죠."
개 주제야 사람 행세를 하는 모습이 퍽 가소로웠다.
"무엇이 되었든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이죠.
허허허.. 이런말 하는 것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거지만..
선왕과 제이슨 전하께서는
성군이라 말하기 힘드시죠.."
"그들의 더러운 짓거리를 앞장서서 했던 것이
그대고! 그대 가문이 아니었던가?"
"그렇지요..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그 모든 죄를 제가 감당하고
이번 반란군 토벌에서 공을 세운
제 아들에게 공작의 작위를 완전히 넘길까 합니다."
"그런다고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네. 그렇지요.. 제가 지은 죄에
선왕과 제이슨 전하의 명령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공작.
제가 예전 같지 않아 저에게 죄를 명했던
모든 이들의 잘못을 감당하기 힘드니
저는 선왕과 제이슨 전하의
명에 따른 죄만 안으려 합니다.
이조차도 벅차니 이 늙은이 목숨 하나로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제퍼드가 왕자 시절 왕실의 개인
하인즈 가문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인즈 공작은 이렇게 말하며
제퍼드는 왕의 자격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전 라이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왕의 자리를 경매라고 생각하는지
북부가 동부와 중부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희는 솔직히.. 라이 왕자가 왕이 되든,
제퍼드 공작이 왕이 되든 상관없습니다.
누가 되었든 점점 최악으로 향하고 있는
북부의 재건에 힘써 주시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래도..
북부에 귀족은 아무도 없을 것 같군요."
안테르 남작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모를
하인즈 공작과 페이트 공작이 아니었다.
"페이트 공작의 파벌은
제퍼드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동부 귀족들은
키엘이 테슬린을 잇는 것을 거부하고..
중부는 하인즈 공작이 죄를 인정했고..
북부는 귀족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 했는가?"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북부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두 피오네 왕국으로 귀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라인 왕국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라이 일라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아무리 피오네의 돈과 힘으로 범벅되었다지만
일라인 왕국의 귀족이 일라인의 핏줄 앞에서,
대공작인 내 앞에서, 왕국의 귀족들 앞에서
귀화를 입에 담고 있었다.
"그대와 뜻을 같이하는 귀족은 몇이나 되는가?"
입꼬리를 올린 남작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북부 귀족의 9할입니다."
"그렇군."
남작이 건네준 명단을 읽지도 않고
라이이에게 다시 건넸다.
"현재 일라인 왕국을 이끄는 권한 대행이자
왕실의 핏줄인 나 라이 일라인이 명한다.
카온 대공은 이 명단에 적힌 이들의
작위를 몰수하고 본인과 가족 모두를 추방하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안테르 남작을 포함한
동부 귀족 대부분이 벌떡 일어났다.
"라이 왕자님!"
남작의 외침에는 `북부 귀족들 없이
어떻게 북부를 운영할 수 있겠습니까?`
이라는 말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이거 기사들에게 끌려 나갈
더이상 귀족이 아닌 자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대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라이거 기사들이 들어왔다.
"귀족이 아닌 자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끌어내라."
"충!"
절규와 분노, 원망과 억울함,
그리고 잘못을 외치는 소리가 가득한
소란이 끝나고 대회의실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자. 이제 하나 해결했고.. 키엘을
테슬린 공작으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그것이.."
"됐고. 라이 권한 대행.
저들은 키엘 공작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키엘 테슬린은 비록 방계이기는 하나
테슬린의 피가 흐르는 자이다.
이를 `네 기둥` 가문인
일라인, 라이거, 쇼페라가 인정했다.
그러나 `네 기둥` 가문의 뜻이
모두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기에 충언은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대들이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충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대들의 이권과 욕심에 비롯된 것이기에
충언이라 볼 수 없다.
옮고 그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혼란한 왕국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이권만 탐하는 자를 귀족이라 할 수 없다."
"왕자님!"
"이처럼!
비록 권한 대행이라지만 `네 기둥` 가문의 후손이며!
일라인 왕실의 핏줄이 흐르는 이의 말을 끊는 것은!
왕실과 `네 기둥` 가문에 대한 모욕이다.
본인 가문의 일이 아님에도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왕실의 결정을 문제 삼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죄에!
왕실과 `네 기둥` 가문의 모욕죄를 더해
저들의 작위를 박탈한다.
작위 박탈에 대한 권한은 라이거 대공에게 위임한다."
"왕..왕자님!"
"라이 왕자님께서 이러실 권한이 없습니다!"
당황해하는 동부 귀족의 말을 끊고
페이트 공작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