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아침을 맞이했으면 좋겠구나.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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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아침을 맞이했으면 좋겠구나.
조인 소소리는 델타 왕자의 인정이 기뻤는지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일테라쇼 제국의 황제는 부인들 간에 차별이나
서열을 두지 않을 생각 듯,
한 명의 황후에 황비를 둔 것이 아닌
두 명 다 황후로 책봉했습니다."
"그렇지. 아무리 법 위에 황권이 있다지만..
두 명의 살아있는 황후라니.. 쯧."
"네. 분명히 그 점에서 언젠가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어려운 시기부터 함께한
두 황후는 서로 사이가 좋을지 모르나
귀족들은 다르죠."
델타가 추종자들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놈들도 줄을 서야 할 테니까.
황자라도 태어나는 날이면 더 심해질 것이고."
"바로 보셨습니다. 왕자님.
언젠가 벌어질 일..
우리가 조금 더 앞당기면 됩니다.
제국의 귀족들이 싹 물갈이된 지금이
적기이기도 하고요."
이미 안정적이고 두 황후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던
성도가 있는 남부와 서부는
충성심이 높아 건드리기 힘들겠지만,
다른 지역 귀족들은 이제 막 귀족이 되었으니,
자신의 성공과 가문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
조인 소소리의 의견이었다.
"언제나 옳은 말만 한다고 충신입니까?"
델타에게는 아니었다.
델타가 본 그런 올곧고 단단할수록 인물일수록
모두가 힘을 모아 제일 먼저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들의 충심은 사람이 아닌
포이든 왕국으로만 향해 있었다.
`왕이 곧 왕국이다.`라고 생각하는 델타 입장에서
그들은 충신이 아니었다.
"무력이 뛰어나고 영지의 군사력이 뛰어난 가문이
충신 가문입니까?"
델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바다 몬스터로부터 영지민이자 왕국민들을 지키고,
혹시 모를 타국의 침입을 대비하는
국경 영지의 영주들을 왕실은 언제나 경계했다.
그들이 가진 실전 무력이 언제,
누구에 의해 왕실로 향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치를 잘하는 귀족이 충신입니까?"
델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들은 정치를 한다.
두 파벌, 세 파벌, 때로는
각자의 세력들끼리 의견을 주고받으며 정치를 한다.
얼마 전 일테라쇼 제국의 요청에 관한
회의를 할 때가 떠올랐다.
그냥 한번 고개를 숙이면 된다고
떠들던 왕세자 파벌과, 죽어도 그럴 수 없다는
명부에 적힌 귀족들의 의견이 대립했다.
델타가 보기에는 참 웃긴 장면이었다.
명부에 적힌 귀족들을 제국에서는 죄인이라 부르지만
포이든 왕국 입장에서는 공신 가문이었다.
그런 공신 가문들을 주축으로
왕세자를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왕세자는
그저 고개를 숙이면 되는 일로 치부하고
그들을 제국으로 보내려 했다.
그날 결정이 나지 않아 다음 날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결국 결정이 났다.
전날 밤, 왕세자를 포함한
찬성파와 반대파 대표들이 모인 술자리.
그리고 그날,
반대로 돌아선 왕세자.
또 그리고 그날 밤,
희희낙락 서로 웃으며 벌였던 파티.
델타가 지금까지 보아온 귀족과 정치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추종자들을 쓱 둘러봤다.
이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단지 조금 나은 것이 있다면,
적어도 이들은 자기 뜻을
거스를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네. 아니지요.
세상에는 소설 속 `충신`은 없습니다.
단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가까이 지내는 존재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간지러운 곳을 긁어준다.`입니다."
"하하하 그렇군!
충신은 고작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자였어!
하하하"
"네! 바로 그런 자가 충신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충신도 사람인지라
간지러운 곳이 분명 있을 테고요."
"내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으로
간지러움을 해결하는 존재."
"그런 존재를 우리는 권력자라 부르지요."
"긁어주는 존재들을 우리는 세력이라 부르고?"
"맞습니다. 즉.
황후가 직접 세력을 만들지 않아도
결국 주변에 다른 권력자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력이 형성될 겁니다."
"권력은 나누기 싫지."
"충신이 간신이 되는 순간이지요."
"하하하 조인! 그대가 가주가 되어야 해!
내가 처리해 줄까?
그럼 조금 빨리 가주가 될 텐데?"
"이미 무너지고 있는 가문입니다.
때가 되면 왕자님께 청을 올리겠습니다."
"귀족들을 회유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델타와 조인의 화기애애한 대화에
찬물이 끼어들었다.
"조인님의 의견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 갓 귀족이 되어
무한 충성을 보여야 하는 것들이
지금 제국의 귀족들입니다.
만약 잘못 접근했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추종자가 끼어들자 델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표정을 가장 빠르게 눈치챈
하세 미토세이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조인님께서 그것도 모르고
의견을 내셨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새파랗게 어린놈이 비난하듯 따지고 들자
말을 꺼낸 추종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그의 표정을 못 본 척 하세가 말을 이었다.
"귀족들의 가장 큰 권력자는
왕과 공작, 조금 눈높이를 낮추면
후작이나 부유한 백작 정도까지겠군요.
그럼 시녀와 집사들은 어떨까요?"
"집사장이나 시녀장을 말하는 건가?
멍청하긴! 황실에서 일하는
집사장과 시녀장이 다 귀족이고
대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가?"
"집사들과 시녀들 사이의 최고 권력가는
집사장과 시녀장이 아닙니다.
바로 황제나 황후의 전담들이지요."
"하세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노려야 할 이들은 귀족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그들이라고 쉽게 포섭이 될 것 같은가?!"
"하.. 조금만 더 깊게 생각이 안 되십니까?
황후에게는 그들이 충신일 겁니다.
그런 충신의 입에서 황궁에 떠도는
거짓 소문이 들어가면 어떨 것 같습니까?"
"떠도는.. 아!"
"이제야 감이 오십니까?
어디든 딱 한두 명만 잠입시키면 됩니다.
그들이 `누가 누구 편에 붙었다.`라는
딱 한 마디만 남기면 되는 겁니다."
이름 모를 하찮은 시녀의 한마디가
황후의 귀에 닿을 때 즘이면,
`단순한 만남`이 어디까지 덩치가 커져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 둘 다 그만하게.
앞서가는 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 법이니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지.
지레짐작하고 멋대로 판단하는 것보다
이렇게 의문을 표하고 의견을 내는 것도 중요해."
"죄송합니다. 왕자님."
"저도 흥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결정을 내리지.
첫 번째 목표는 두 왕후 중 한 명을
암살하는 것으로 한다."
가장 빠르게 결과가 나오고
이후 일어날 효과도 확실했다.
"동시에 암살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괜찮은 년을 골라 잠입,
에르제 황후를 흔드는 것을 두 번째 목표로 하지."
두 황후 중 한 명의 목을 들고 왕과 왕세자,
그 둘에게만 충성하는 귀족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왕의 그릇임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제국의 흔들림의 원인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또한,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었다.
다시 술과 여자들이 들어오고,
추종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것을 끝으로
밀회는 끝이 났다.
*
"향이 좋은 차란다."
에르제는 맞은 편에 앉아
벌벌 떨고 있는 시녀에게 차를 권했다.
"아..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편한 대로 하게."
에르제는 찻잔이 한번 비워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테라쇼 제국에서 지내보니 어때?
황궁 생활은 할 만하고?"
"황후..폐하.."
에르제의 부드러운 음성에 시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죽여주세요.."
스칼렛.
죽여달라고 청을 하는 시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제국이 포이든 왕국 시절
`카제`에 의해 납치 당해
포이든 왕국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여인이었다.
어릴 때 부모를 죽이고 자신을 노예로 끌고 간
포이든 왕국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당시 끌려가던 자신을 보고도 눈을 돌렸던 몇몇이나,
아무런 조치도, 찾으려 하지 않았던
일라인 왕국에 대한 분노도 컸다.
다행히 몸을 파는 노예로
끌려가기 전 한 귀족에 의해
가문의 노예 생활을 하며 아이에서 소녀,
소녀에서 여인이 된 그녀에게
어느 날 새롭게 가주가 된 주인이
`복수`라는 달콤한 말로 그녀를 유혹했다.
카온이 황제가 되고 포이든 왕국 사절단을 통해
명부에 적힌 귀족들과 함께 억울하게
노예가 된 일라인 왕국 시절 백성들을
함께 돌려보내라 명했던 것을 몰랐던 그녀는
주인의 유혹에 넘어갔다.
때마침 황궁의 시녀를 뽑는다는 공문이 내려졌고,
포이든 왕국으로 끌려간 노예라는 신분이
큰 힘을 발휘해 쉽게 황궁 정원을 관리하는
시녀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그녀가 일했던 가문의 가주,
심지어는 델타 왕자도 일테라쇼 제국의
정보 조직의 힘을 가볍게 여겼다.
이미 자신의 정체가 들킨 지도 모르고 그녀는
주인의 명령이자 자신의 복수를 실행시켰다.
하지만 주인이 알려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조금의 동요가 있으면 어떤 거라도 좋으니
서신을 달라는 주인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다.
동요는커녕,
시녀의 입으로 귀족을 논한다고
혼내는 이들도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배식을 받는 것에,
다른 이들보다 보급품이 더 많은 것에.
대견해하는 눈빛에,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에,
따스한 눈빛에,
안타까워하는 눈빛에.
그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린 만큼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도 심각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의 잡초를 뽑고 있는 자신의 곁에
에르제 황후가 다가왔다.
그때도 오늘과 같이 물었다.
`일테라쇼 제국에서 지내보니 어때?
황궁 생활은 할 만하고?`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철저하게 웃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 그녀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돌아온 것에 너무 행복하고
이렇게 황궁에서 일할 수 있어 너무 좋아요.
오늘은 황후님을 뵙게 되어 더없는 영광이고요.`
자신보다 어린 황후의 미소에
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 다행이구나.
너를 이곳으로 배정한 것이 나란다.
네가 경험한 아픔과 절망.. 그리고 원망을
다 이해한다는 말은 못 해.. 왜냐면..
감히 내가 가름하지 못할 고통이었을 테니까..
어둠만 보았을 너에게 빛과 색을 보여주고 싶었어..
흔히들 검정에 흰색이 섞인다 해도
여전히 검정이라고 하지..
하지만 밤은 언제나 찾아오고
밤이 지나면 해가 뜬단다.
어린 시절이 너에게 낮이었다면..
포이든 왕국에서는 밤이었겠지..
나는 다시 네가 밤을 이겨내고 빛과 색이 가득한
아침을 맞이했으면 좋겠구나."
이 말을 끝으로 돌아선 황후에게
그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잡초는 어느새 떨어지고,
그녀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만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