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죄인이면 꿇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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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죄인이면 꿇어야지.
"폐하! 억울합니다!
포이든 왕국과 손을 잡았다니요!"
"맞습니다. 폐하!
이 시국에 조금만 눈에 띄는 행동만 해도
큰일 나는데..
어찌 저희가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한단 말입니까!"
리아가 포이든 왕국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 날,
에르제의 명령을 받은 메튜가
동부 일부 귀족들을 황성으로 압송했다.
"손을 잡지 않았다?"
"네! 폐하!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럼.. 그대들이 종종 만나는 그 모임은 뭐지?"
나의 물음에 한 귀족이 무릎을 꿇은 채 다가왔다.
"그 모임은..
이렇게 된 마당에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이든 왕국과 손을 잡았다는 오해를 받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요."
스칼렛이 모든 것을 자백하였는지도,
리아가 카제들을 제거하고
포이든 왕국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그 얼빠진 계획을 수립한 장본인이
누군지 이미 다 밝혀진 지도 모르는 그는
벌떡 일어나 옆에 앉은 에르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 가문을 포함한 여기 잡혀 온 가문들은!
폐하의 본 가문인 라이거 가문보다는
유서가 깊지 않지만, 적어도 황후 폐하의 가문인
폴리아리스 가문보다 더 역사가 깊은 가문으로
오랫동안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영지와 영지민들에게 헌신한 가문입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귀족들의 모습이 같잖았다.
"물론! 대역 죄인인 전 테슬린 공작과
그의 가문의 억압에
숨죽여 지낸 시절이 길다고는 하나,
엄연한 일라인 왕국의 귀족이었고,
지금은 새로운 제국의 태양을 모시는 귀족입니다!"
"그래서?"
"하지만 동부와 중부, 북부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의 처우가 어떠합니까?
우리는 사라진 가문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에르제 황후님께서 펼치신 정책 어디에도
유서 깊은 가문을 위한 배려가 없습니다.
일라인 왕국의 역사도 앞으로 쓰일
일테라쇼 제국 역사의 한 부분이 될 겁니다.
왕국과 제국의 역사를 이어주는 가문이
몇 남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왕국의 부정을 인정하고,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모임을 만들고 그대들끼리 협력했다?"
"맞습니다!
폐하께서 알고 계시는 그 모임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임입니다.
동부가 힘들어진 것도, 일라인 왕국이 망한 것에도 모두
포이든 왕국이 있습니다.
남부나 서부와 달리 우리 동부 귀족들은
포이든 왕국이라면 치를 떱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하죠.
저희는 옛 테슬린 공작의 흉포 앞에서
살기 위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중간보다 못한 대우에 살기 위해
작은 모임을 만들었더니..
하.. 포이든 왕국과 손을 잡았다는 오해를 받고
폐하 앞에서 서 있습니다."
"그렇군.. 서있군.. 그럼 꿇어."
내가 손짓하자 기사 한 명이 뛰어와
그의 무릎 뒤를 차 꿇어 앉혔다.
"죄인이면 꿇어야지."
"폐..하?"
"나는 분명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저들이 일테라쇼 제국의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페이트 공작과 동부 귀족들이 설치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작위를 박탈당해 평민이 되던 날,
귀족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무슨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든,
그들은 그렇게 살아남았고 기회가 되었다.
"왕국과 제국을 잇는 역사의 증인이라
존중받아야 한다?
`네 기둥` 가문이 더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너희 같은 증인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그대 가문이 폴리아리스 가문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 말고는 뭐가 있지?
노도우의 억압에 숨죽여 지낸 것이
지금에 와서 억울한가?
왜 그때는 이런 모임을 만들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지?
노도우는 무섭고 남작 가문의 영애에서 황후가 된
에르제 황후는 가소롭나?"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한 정책이라..
왜 귀족들을 위한 정책을..
특히 너희들 같은 귀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하지?
아직도 제국을 이끌어가는 것이
너희들 같은 귀족이라 생각하는가?
제국의 정책을 이끄는 이 중 하나인
나폴레이보다 그대들이 똑똑한가?"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황후의 신분으로 주기적으로 평민들과 어울려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에르제 황후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가 있는가?"
에르제는 여전히 발로 뛰는 정치가였다.
"그리고.. 영지와 영지민을 위해 헌신한다라..
개소리도 참으로 아름답게 하는군."
옆에 서있는 폴리아리스 공작에서 눈빛을 보내자
그가 품에서 서류를 꺼내며
꿇고 있는 동부 귀족들에게 다가갔다.
"영지와 영지민을 위해 그런 짓을 하였나?"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이
안정되고 강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문제 삼으면
그 어느 가문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까지 너희들을 그냥 두었던 것이다."
공작이 그들에게 준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지만
조금은 합법에 가깝고 벌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 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단합`이 형성되고 불법에 조금 더 가까워졌으며,
영지민들에게 피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칼렛이 제국으로 들어온 후,
사적 모임이 결성되었고,
이제는 경계가 아닌 완전히 불법적인 모습을 보였다.
"딱 거기까지가 내가 귀족이란 것들에게
눈감아 줄 수 있는 한계였다."
황실에 튼튼해야 제국이 튼튼하듯,
가문이 튼튼해야 영지가 튼튼해지는 것은 맞다.
그래서 황실에 바쳐야 할 세금이 10이라면
뻔히 보이는 이유로 9만 내도 넘어갔다.
작위마다 정해진 기사나 병사의 수를 조금 넘겨도
그만큼 치안이 안정되리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 선을 넘어버렸어. 공작."
"네. 폐하."
폴리아리스 공작이 이번에는 다른 서류를
각자 하나씩 건넸다.
"이..이건.."
"왜? 꽁꽁 감춰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보니 신기한가?
그대들의 뿌리가 일라인 왕국이라
제국을 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군.
숨는 것이 특기요, 꼬리 흔드는 것이 장기이며,
뒤에서 헛짓거리나 하는 것이 취미인 그대들이니,
일테라쇼 기사단만큼이나 예산을 받아 가는 곳이
정보부라는 것을 몰랐겠지.
그대들의 헛짓거리로 피해를 본 자 중
정보부 인원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공작. 다음."
공작이 마지막 서류를 그들 앞에 놓았다.
"포이든 왕국과 손을 잡은 적 없다?
일라인 왕국부터 시작된 귀족들의
권리를 위해서 뭉쳤다?
레베카 남작.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귀족 중 한 명이
고개를 들며 씨익 웃었다.
"폐하. 팔목이 아파서 말하기 힘듭니다."
"팔목이 아픈데 말하기 힘든 것도 재주군.
풀어줘라."
"충!"
묶여있던 손이 풀리자 레베카는
찌뿌둥하다는 듯 몸을 풀기 시작했다.
"레베카..남작.. 이 무슨.."
"하.. 너희들과 어울린다고 마신 술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로진 레베카 남작.
그가 모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가문은 여기 있는 다른 가문들과
비슷한 시기에 작위를 받았으며,
다른 가문들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고,
다른 가문들과 같은 이유로 살아남은
동부 귀족이라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제국이 건국된 후
레베카 가문은 저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유약한 가주와 그를 빼닮은 후계자 대신,
머리가 좋고 배짱이 두둑한 3남이
가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가주가 된 로진 레베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가문의 인장과 깃발을 스스로 들고
황성으로 찾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일이었다.
별 감흥 없던 충성 맹세가
그와의 대화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폐하. 분명 포이든은 수작질을 할 겁니다.`
`폐하. 두 황후님의 안위를 더욱 챙기셔야 합니다.`
`폐하. 각 지역에 신흥 귀족들이 생겼습니다.
그중에는 평민이었던 자들도 있죠.
그들이 올바른 정치를 한다면
그동안 눈치만 보며 몸만 건사했던
동부 일부 귀족들이 목소리를 내려고 할 겁니다.
그들은 힘도 돈도 자존심도 없지만..
뼛속까지 귀족인 자들입니다.`
나는 다음 날 레베카 남작과
키엘 테슬린 공작을 연결해주고,
둘 사이만 정보를 전달 할 수 있는
통신구과 휴대구를 지급했다.
스칼렛의 잠입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해서
모임까지 결성한 그들 사이에
같은 처지를 이유로 레베카는 속으로 숨어들었다.
레베카 남작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아공간이 생겨나고,
그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아공간!?"
놀라는 주변 동부 귀족들을 보며 피식 웃은 뒤,
끊임없이 무언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폐하. 이 아공간 아티펙트 저 주시기로 했습니다?"
"어찌 더 뻔뻔해진 것 같은데?"
"하.. 이것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뻔뻔함만 늘었나 봅니다.
뭐가 이리도 많아!
내가 넣어 놓고 내가 놀라겠네."
귀족들과 포이든 왕국,
더 정확히는 동부 일부 귀족들과
포이든 왕국의 왕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을 모두 쏟아낸 레베카 남작이
짧게 한숨을 쉬며 손을 털었다.
"뭐? 손을 안 잡아? 지랄..
아! 폐하! 저희가 잘못 생각한 게 있습니다."
"음?"
"저들은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개에게는 앞발만 있지 손은 없으니까요."
"풉"
에르제가 결국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휴 하며 웃음을 진정 시킨 에르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레베카 남작이 가져온 증거 속에는
`조이`이란 이름이 자주 등장하죠?"
"네. 황후 폐하."
"그리고 `델`라는 이름도 종종 등장합니다."
"네. `조이`가 `델`의 명령을 받은 것 같은 분위기죠."
에르제와 레베카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귀족들은 사색이 되어갔다.
"`조이`. 소소리 가문과 미토세이 가문..
`델`. 포이든 왕국의 델타 왕자겠지요.
포이든 왕국의 국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지는군요."
"꼬리를 자르겠지요."
"잘린 꼬리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썩는 것."
"어머!"
에르제는 과장된 모습으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에르제 황후께서는 병자의 고름 냄새와
열심히 일한 후 흘린 땀 냄새는 참아도
잘린 꼬리의 썩는 냄새와
탐욕에 찌든 이들에게서 나는 악취만큼에는
비위가 약하지.
리아 황후가 포이든 왕국에 도착하는 날에 맞춰,
곧 썩어갈 것들을 그곳에 버리고 오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해맑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던 에르제의 미소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사라졌다.
"제국의 황후가 명한다.
제국의 기사들은 저 죄인들을 지하 감옥에 가둬라!"
""충!""
"레베카 남작은 명을 받아라."
"신 로진 레베카. 황후 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장난기를 완전히 지운 레베카 남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폴리아리스 공작과 테슬린 공작과 협력하며
저들의 영지를 정리하고 인재들을 파견해
혼란이 없도록 하라."
"신 로진 레베카. 황후 폐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정리되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에르제에게 물었다.
"스칼렛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저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지금쯤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새로운 신분, 넉넉한 자금과 함께
자유도시로 갈지..
아니면 그녀 본인도 몰랐던 재능을 살려
정보부에서 일할지..
그것도 아니면.. 포이든 왕국으로 끌려갔던 이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제국에 적응하는 것을 도울지."
"모든 것이 에르제 황후 폐하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