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하찮은 목숨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180. 하찮은 목숨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르베 자페이가 데리고 온 사람은
왕세자 한 명이 뿐만이 아니었다.
"카온 라이거!"
"포이든의 왕이여. 오랜만이군.
그리고.. 카온 라이거가 아니라..
카온 라이거 일테라쇼 황제다."
보자마자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지만
내가 알고 있던 포이든 국왕의 모습은 아니었다.
살이 빠진 자리에 주름이 깊게 생겼고,
등은 굽었으며, 기름으로 번들거리던 머리는
건초처럼 푸석했다.
그가 입고 있는 화려한 옷만이
일라인 왕국을 집어삼키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포이든의 왕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찌...이찌하여 내 백성,
내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더냐!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네 놈들의 무릎은 내 앞에서만 꿇어야 하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제 나라의 국왕이 아무리 소리쳐도
일어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아둔한 왕이여.
그대의 아들이자, 이 왕국의 왕세자가
그대에게 뭐라고 하던가?
보잘것없던 라이거 가문이 황제가 되었다고
죄 없는 자신을 억압하려 한다고 하던가?
아니면.. 제국이 쳐들어와
이 왕국을 집어삼키려 한다고 하던가?"
"지금 너의 행동이 증명하고 있다!"
"증명이라.. 카시오스. 데리고 와라."
"충!"
카시오스가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일테라쇼 제국의 마차의 문을 열자
그 좁은 공간에서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치의 배려도 없는 카시오스의 행동에
그들은 구르고 넘어지면서
나와 포이든 왕 앞에 도착했다.
"그대의 잘난 아들 델타 왕자가 포섭한
제국의 귀족들이다.
일테라쇼가 아닌 포이든을 원하는 자들이니
저들이 모시고 싶은 주군인 그대나 왕세자에게 선
물로 적당하겠지.
아담. 데리고 와."
"충!"
아담이 카제 신조르를 왕 앞에 던졌다.
"주제도 모르고 델타 왕자의 명을 받아
제국의 황후를 제거하려 했더군.
포이든 왕국의 자랑이자 비밀인 카제다.
4조의 대장, 카제명 4다시 1.
본명 신조르.
아니라고, 모른다고 하지 말도록.
지금도 카제들은 칠흑 기사의 손에
죽어가고 있을테니."
"죽어간다니.."
"일테라쇼 제국의 자랑이 칠흑 기사단이듯..
포이든 왕국의 자랑은 카제가 아니었던가?
아.. 양지에서 활동하는 칠흑 기사단과 달리,
음지에서 활동하기에 하나씩 소리소문없이
죽어 나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왕실에서 생각하는 카제는 그저
살인 도구일 뿐이라 관심이 없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포이든 왕 앞으로 한발 다가갔다.
"내가.. `아.. 포이든 왕국에는
카제라는 존대들이 있구나..` 라는
생각만 하고 가만히 있을 거로 판단했던 것인가?
제국이 건국되고 내가 포이든 왕국에 요청한
첫 번째가 무엇인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감히.. 감히.."
"포이든의 왕족이 제국의 내란을 유도하고,
황후를 시해하려 했다.
그런데 실패하여 화가 난 제국의 황제가 직접
칠흑 기사단을 이끌고 찾아왔다.라는 말은
저 왕세자가 하지 않던가?"
왕이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왕세자를 노려봤다.
"왕족의 잘못은 왕족이 책임져야 하며,
책임질 대상은 당연히 왕세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저는 책임이 없습니다!
델타 왕자의 잘못이지 제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델타 저놈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저는! 왕세자지 왕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대 제국의 황제 폐하!
폐하의 요청에 유일하게 찬성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아버지부터 귀족들까지 모두 반대하는데 저만!
유일하게 저만 찬성했습니다!"
"왕세자!"
포이든 왕의 황당해하는 부름과,
"왕세자 저하!"
이르베 자페이의 분노가 담긴 외침이 동시에 들렸다.
"부모고 가신도 없는 왕세자여."
왕세자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털썩.
"그런 말을 할 때는 이런 자세가 어울리는 법이다."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치켜올렸다.
"포이든의 왕이여.
왕세자가 참으로 훌륭해
그대가 주신의 품으로 돌아가면..
이 포이든 왕국이 부유하고 강성한
왕국이 될 것 같군."
자신의 안위를 위해 형제인 델타 왕자를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망쳐 놓은 자이며,
그전에도 많은 형제를 계승을 문제로 죽였던 자다.
귀족들을 등에 업고 왕을 칩거시킨 왕세자이며,
지금에 와서는 아버지의 등에 숨은 것이 아닌,
자신을 숨겨주려 했던 아버지의 등을
적의 아가리로 밀어 버린 자다.
왕세자의 고개를 이르베 쪽으로 돌렸다.
"그대가 모시는 주군이 그대와 가문을
버리려 했음에도 따르는 것을 보니..
이 모든 것을 눈감아 줄 만큼
왕세자의 인품이 훌륭한가 보군.
만약. 귀족의 힘이 강한 것이 아니라
왕족과 왕세자의 힘이 강했다면 그대를 이곳이 아닌,
제국의 알현실에서 봤을 텐데 말이야."
실제로는 자페이 가문이 왕세자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왕세자의 머리 위에 자페이 가문이 있었던 것이다.
대륙 진출이 무산된 뒤 모든 것을 잃은 왕을 버리고
왕세자의 편에 섰다.
그런 왕세자가 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겁 많은 왕세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칠 뿐,
이미 결과는 반대로 결정 나 있었다.
제국에 겁을 먹고,
귀족들이 등을 돌릴까 걱정하는
왕세자에게 접근한다.
괜찮다. 이해한다.
누군가는 찬성해야 제국에 할 말이 생기고,
그 누군가가 왕세자라 오히려 다행이다.
왕세자는 자신들의 주군이며
우리의 충심은 변함이 없다.
이런 말들을 속살거리며
앞에서는 충실한 개처럼 행동하면서,
뒤에서는 왕세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안주 삼아
왕국을 자기들끼리 논했을 것이다.
"윽!"
왕세자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어리석은 왕세자여.
그대는 처음부터 꼭두각시였다.
귀족들의 꼬임에 넘어가 아버지를 몰아냈다.
유일하게 그대만 내 요청을 찬성했다고 했는가?
아니. 멍청한 그대는 모두가 반대하는 것을
찬성할 용기가 없다.
문명 누군가가 그대의 입에서
찬성을 말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귀족들에게 빚이 되었고
빚을 진 그대는 귀족들의 아량에 감동했겠지.
모든 것이 함정인지도 모르고..
그대는 한 번이라도 의심했어야 했다.
왜. 버리려 했던 것이
아직도 꼬리를 열심히 흔드는지.
그대의 핏줄이 포이든 이라면 더욱더."
무릎을 굽혀 왕세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책임이 없다?
왕족은 죽어서도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델타 왕자의 음모를 몰랐던 것도
무능한 자신의 책임이며,
귀족들의 달콤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도
그대의 책임이며,
가까이한 가신이 충신인지, 가신인지
구분하지 못한 것도 그대의 책임이며,
백성들이 굶고 있는 것도 그대의 책임이고,
백성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늙었다는 이유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도 왕국을 다스리는 그대의 책임이다.
나는 분명 그대가 왕성 입구에서 나를
맞이 하라 했었다.
그대는 귀족의 뒤에 숨었고,
들키자 원로회의 뒤에 숨었다.
그것으로도 불안했는지 본인의 손으로
칩거시킨 왕의 뒤에 숨어 나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 대가가 바로
타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백성들이며,
귀족들이고, 기사들이다.
이 모든 것이 너의 책임이다. 왕세자."
왕세자의 눈빛이 죽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왕세자의 고개가 떨어졌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뫼비우스 고리를 천천히 회전시켰다.
"나 카온 라이거 일테라쇼 황제는
포이든 왕국의 전권을 가진 왕세자에게
기회를 주었다.
허나! 왕세자는 자신의 아둔함으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감히 제국의 내란을 도모하고
황후을 시해하려 한
포이든 왕국의 왕족들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
칠흑 기사단을 명을 받으라!"
"카시오스가 칠흑 기사단을 대표하여
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포이든 왕국 왕족의 죄가 결정 날 때까지
왕성을 제국의 관리하에 둔다!
반항하는 자의 생사는 리아 황후의 명에 따르라."
"카시오스 이하 칠흑 기사단은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칠흑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수아르 황제도
자신의 기사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수아르 제국의 기사들은
일테라쇼 제국의 기사들을 지원하라."
수아르 황제의 외침을 들으며
천천히 포이든 왕 앞으로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왕세자의 등을 밟고
왕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래도 왕족이고 체면이 있으니 참도록 하지."
"..."
답은 하지 않아도
왕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수많은 포이든 왕국 백성들이
내 앞에 강제로 무릎을 꿇었고,
귀족은 물론 왕세자까지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왕국 중심부인 왕성이
두 제국 기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미 왕족과 포이든 왕국의 체면은
박살 난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포이든 왕국의 알현실.
나는 화려한 왕좌에 앉아
앞에 있는 이들을 내려다봤다.
"델타 왕자는 제국으로 압송한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오만하고 자신만만하던 왕의 모습도,
조금 전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왕의 모습도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은 포이든의 왕이
고개를 숙였다.
"꼬리는 델타 왕자 선에서 잘라 주지."
"폐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은혜라.. 쯧.
델타 왕자에게 포섭된 제국 귀족들의 처분은
그대에게 맡긴다."
끌려온 제국 귀족들에게
편치 못한 삶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문제로 더 이상의 보상은 요구하지 않겠다.
그대와 포이든 왕국에게
델타 왕자가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나
그래도 왕족의 목숨이면 충분한 보상이니."
"감사..합니다.."
델타 왕자의 계획대로 되고,
최악의 상황에서 두 황후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면
왕자의 목숨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와 제국에게는 델타 왕자의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직접 온 이유,
큰 문제를 더 크게 문제 삼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국이 건국되고 찾아온 사절단에게
나는 한 가지 요청을 하였다.
자페이의 후계자는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명부를 내리셨고..
그들을 제국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들은 결국 오지 않았고,
같잖은 수작질에 내가 직접 이 왕국을 방문했다."
털썩! 털썩!
명부에 적힌 포이든 왕국의 귀족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지금의 가문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예전과 달리 농업으로
겨우겨우 가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억울합니다!
저희 가문은 왕실로부터 내쳐졌단 말입니다!"
한 명이 입을 열자
너도나도 얼마나 지금이 힘든지,
얼마나 억울한지 외쳐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조와 가문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그대들의 하찮은 목숨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두의 눈이 반짝였고,
나는 그들을 향해 피식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