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인연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나자꾸나.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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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인연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나자꾸나.
마치 어린 황제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든 영주의 입이 열렸다.
"폐하. 폐하처럼 세상에 명성을 펼치지 못하고,
한낱 변방의 영주로,
역사 속 한 줄도 장식하지 못할 제가..
제 이름과 가문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 인가요?
그리고.. 폐하의 말처럼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폐하께
이 늙은이가 자비를 베풀 터이니 날이 밝으면
평화롭고 부유한 제국으로 떠나시지요."
치 시중을 들던 바이올렛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노하는 그녀를 손을 들어 말린 뒤 물었다.
"자비?"
"무슨 생각으로 어린 계집 하나와
호위 기사 하나만 데리고 다른 곳도 아닌
이 피오네 왕국으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방을 무사히 나가지 못하면,
제 가문의 집사가 폐하께서 이곳에 계심을
도시 전체에 알릴 겁니다."
"그래서?"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둘 중 하나겠지요.
일테라쇼 제국의 황제가 타국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또는, 저와 저의 영지민들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든."
"두 번째가 차라리 낫지 않나?
나를 잡아다가 왕실에 바치면
그대는 죽을지라도 영지민들은 살 텐데?
그대의 바람대로 역사에 제국의 황제를 잡기 위해
희생한 영주로 기록될 수도 있고."
영주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를 보인 뒤,
다시 문으로 다가가다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럼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제 이름은 두 왕국이 주인공인 전쟁사에서
고작 조연일 뿐이지요."
끼익, 탁.
영주가 방을 나가자 헛웃음이 나왔다.
"허? 미친놈인가?"
"고작.. 그런 이유로..
이곳 영지민들은 생각이 없는 건가요?
어떻게 저딴 미친놈의 생각에 동조하고
목숨을 걸 수 있는 거죠?"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들어온 메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메튜. 아직도 이런 자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래도 폐하.. 어린아이들이나..
지금 영주의 상태라면 자기 뜻에 반대하는 이들을.."
"네 말처럼 어린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고,
피오네인 모두가 영주나
영주와 뜻을 같이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중에는 `사람`이 있을터이니,
이곳 모두는 일단 살 것이다."
오늘 막 도착해 피오네 왕실군이 도착할 때까지
살려야 할 자와, 죽어야 할 자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제국 정보부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마에 낙인처럼 영주 편, 반대편이라고
적히지 않은 이상, 찾아내기 힘들다.
"죽음이라고는 주신의 부름에 따른 죽음과
가축들의 죽음밖에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과연..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순간 앞에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지는 구나.
며칠 내로 왕실군이 곧 도착할 것이다.
바이는 오늘의 일을 두 황후에게 전하,고
날이 밝는 대로 도시 외곽에
텔레포트 아티펙트를 설치할 것이니 점검하도록."
"네. 폐하."
"메튜는 피오네 왕실의 상황과 군의 이동을 파악하라."
"명을 따릅니다."
진짜 하찮은 자비라도 줄 생각인지
영주가 나간 뒤에도 밖은 고요했다.
마스터가 밤손님으로 오지 않는 이상
셋 중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할 수 없기에
마음 편히 잠을 청했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대륙 어디의 모습도 아니었다.
회귀 이후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던 꿈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정신이 너무 멀쩡했다.
마스터가 완벽하게 기척을 죽이고 오지 않는 이상
괜찮다고 생각하고 잠을 청했던
내 자만심이 가져온 결과일까?
나는 죽었고, 첫 죽음 뒤의 모습과 다르지만,
주신의 품으로 가는 길인 것일까?
"포르테님.. 아직은 아닙니다.."
"별 시답잖은 잡생각을 심각하게도 하는구나."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뫼비우스 고리를 회전시켰지만,
마치 겁을 먹고 도망치듯 마력의 기운이 사라졌다.
"허허. 어디 감히 내 힘 앞에서."
내 힘?
뫼비우스 고리의 주인?
안개를 헤치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필립님!"
"황제가 되었다고 건방지게
시조의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감히 고리를 회전시킨 건방진 후손아."
"아.. 필립님.."
터져 나오는 눈물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위에 서는 자의 눈물은 가볍지 않아 하였거늘."
또 다른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유진 일라인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 계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유진님의 발치에
두 무릎을 끓고 앉아 고개를 숙여
왕국이 끝이 났음을, 나의 손에 의해 끝이 났음을
고하려던 나보다 먼저 말을 한 존재가 있었다.
"일어나거라. 너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유진의 후손들과 나의 후손들에게 있고,
너는 그것을 바로 잡았을 뿐이다."
"카온. 어서 일어나거라.
너를 탓할 것이었다면 살아생전
`네 기둥`의 권한과 안배는 남겨두지 않았을 거야."
"피토님.. 유진님.."
피토님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네 기둥` 가문의 시조님들 중 세분이 있었다.
반드시 사사님도 계실 거란 생각에 더욱 집중해서 살피자,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사사님.."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고맙구나.. 다시 쇼페라가 세상에 나왔어."
"죄송합니다.."
내 생각이라도 읽은 듯
사사님이 안았던 팔을 풀고 어깨를 두드렸다.
"핏줄은 아니지만,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진
의지를 이은 아이다."
"자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자.
우리도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흡하지만,
잠깐의 손님을 맞이할 정도는 된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에
시조님들의 고난이 끝났음을,
잠깐은 손님이란 말에 네 분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사사님이 찻잎을 꺼내고, 유진님이 우려내기 시작했다.
"너의 예상대로 미물로 태어나는 고난은 끝이 났다."
무려 천 번을 미물로 태어나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야 해야 하는 고난이었다.
내가 회귀하고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몇 년 만에 고난이 끝났을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작 년 만에 천 년의 죽음을 맞이한 고통에
아파해야 하는 것일까.
섣불리 판단하지 못해
좁아진 미간을 본 사사님이 크게 웃었다.
"카온. 네가 걱정할 만큼의 삶은 아니었다."
"사사 너야 그렇지.. 나는.."
"하하하 필립은 좀 짜증 났을 거야! 하하하"
유진님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른 분들의 의미 모를 말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미물로서의 삶까지,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천 번을 미물로 살았던 것은 맞다.
하지만 주신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보고자 하신 것 같구나.
또한, 우리의 희생이 만들어낸 결과를
궁금해 하신 것 같다."
유진님의 설명에 따르면,
네 시조님께서 미물로 환생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태어나 쏟아지는 잠에 눈을 감고
다시 눈떠보니 다른 미물이 되어있거나,
분명 어떤 미물의 알 속에 있었는데 알을 깨고 나오면
다른 미물의 새끼가 되어있는 등,
수난과 고통의 연속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주신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장난기가 있으신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번을 환생하는 와중에도
한 번씩 알에서 태어나 성체가 되고
생명이 다해서 죽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유진님은 일라인 왕국 시절 성도의 풍경이,
피토님은 테슬린 영지의 풍경이,
필립님은 라이거 영지의 풍경이,
사사님은 아사가 영지를 받은 뒤부터는
그녀가 다스리는 서부의 풍경이.
유진님께서는 주신 포르테님이
장난기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셨지만,
나는 아니었다.
당시의 성도가, 당시의 테슬린 영지가 어떠하였는가.
왕은 피오네와 손을 잡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감금했다.
공작은 왕위를 노리고,
그의 아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모든 모습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물의 모습으로
사람의 의지와 생각을 가진 채 지켜봐야 하는
시조님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힘들었을 거라 예상했던 두 분은 웃고 계셨고,
나의 회귀 후 점점 번성해 가는 영지를 보았을
필립님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나는 이들과 달리 네가 남부를 통합 할 때 쯤,
한번 주신 포르테님을 만났다.
눈떠보니 포르테님은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고 계시더구나.
그리고 물으셨지.. `좋냐?` 라고."
"풉! 좋냐라니.. 다시 들어도 웃겨!"
"하하하 그때부터 시작이지? 하하하"
"그래.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주신께서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나는 다시 미물의 모습이었고..
너의 애마 카오스의 말발굽이
바로 내 위에 있더구나."
"헉!"
"네가 바이올렛인가 하는 아이의
마법을 가르쳐 주며 날린 마법에 죽었고,
네가 갑자기 몸을 돌려 걷는 바람에 밟혀 죽었고..
텔레포트 마법에 미물의 몸이 버티지 못해 죽었으며..
네가 얼려버린 이들과 함께 얼어 죽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는 주신의 장난기도 아니고,
혼자 후손과 가문의 번영을 보고 기뻐한
필립님에게 내리는 주신의 벌도 아니었다.
시조님들의 고난은 끝이 났다.
그리고 포이든을 무릎 꿇리고
피오네를 벌하기 전 시조님들을 만났다.
시조님들이 이곳에서 다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지난 모든 삶의 기억을 잊은 채
새로운 삶을 살기 직전,
마지막을 소중한 이들과 보내라는
주신의 배려일지 모르나,
이분들의 공간으로 내가 들어온 것은
주신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경고였다.
피오네까지 내 앞에 무릎 꿇고 나면
이 대륙에서 나와 제국을 감당할 곳이 없다.
내 후손이 일테라쇼 제국을 다스리기 전에
과연 나는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네 시조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 있었다.
나는 물론, 내 후손들도
올바른 군주의 길을 걷게 할 자신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자만이었다.
내가 성장하고 라이거 가문이 번창할 때마다
나의 시조이신 필립님은 비록 미물의 모습일지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을지라도, 나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주신께서는 알고 계신 것이다.
나 카온 라이거 일테라쇼라는 그릇의 한계는
일테라쇼 제국을 담는 것으로 끝임을.
내 그릇에서 이미 넘친 물은
시조님들의 그릇으로 흐르고 있었고,
이제 이분들이 새로운 삶이 시작되면
나를 지탱해주고, 넘쳐흐르는 물을 받아줄
그릇이 없어짐을 주신께서는 경고하시는 거였다.
그리고 이것은 주신께서
나에게 주는 기회이자 시험이기도 했다.
몸이 떨려왔다.
떨리는 몸을 팔로 감싸도 그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네 분은 미소 지으셨다.
"일라인 왕국의 의지를 이어주고
내 핏줄들을 돌봐 줘서 고맙구나."
유진 일라인님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테슬린을 부탁한다."
피토 테슬린님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국과 새로운 `네 기둥`에 번영이 있기를."
사사 쇼페라님의 미소가 점점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지금의 떨림을 기억하거라. 나의 후손아.
인연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나자꾸나."
내 손을 감싸던
필립 라이거님의 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흐려지고 사라지는 네 분을 붙잡으려 몸부림치고
목 놓아 울다가 눈 떠보니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