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넷째에게 빚도 하나 만들어 줬고.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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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넷째에게 빚도 하나 만들어 줬고.
숙소에서 아침 식사까지 해결한 우리는
영주의 자비대로 도시를 벗어났다.
"피오네 왕실 상황은 어떻지?"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의 반항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랬겠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왕이 될 거란 생각에
망나니 같이 행동하던 첫째도,
그런 형을 보며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며
뒤에서 수작질하던 둘째도 셋째만 견제했니
귀족들이 넷째를 선택할 거란 생각은
못했을테니까."
"첫째 왕자가 넷째 왕자의 궁에서
제2 기사 단장에 의해 잡혔고,
둘째 왕자는 재상 가문의 기사단에 의해
궁에 감금되었어 있다고 합니다.
재상이 홀로 둘째 왕자를 만났다는 정보까지
들어왔습니다."
"쯧."
가볍게 혀를 차며 나무 그늘에 앉았다.
"폐하! 바닥이 찹니다!"
"하하하. 바이 괜찮다.
너희도 편하게 쉬어."
"저희가 어찌.."
"명령이야."
명령이란 말에 기겁하며 바이가
내 오른쪽에 앉으며 아공간에서 차 세트를 꺼냈고,
메튜는 맞은 편에 앉았다.
"왕세자로 올리기 전에 이미 군대를 출발시켰군."
"네. 폐하."
"그리고 넷째에게 빚도 하나 만들어 줬고."
넷째를 왕으로 만든다는 위험한 도박을 하는 재상이
왕세자에 관한 발표 이후,
왕위에 관심이 없는 셋째는 몰라도
첫째와 둘째의 반대를 예상 못했을 리 없다.
일을 도모하기 앞서 넷째 왕자는 물론,
넷째 왕자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왕비의 안전을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첫째 왕자가 넷째의 궁까지 가는 것을
제1 기사 단장과 손을 잡고,
제 가문의 기사단까지 왕성으로 불러온 재상이
굳이 넷째 왕자의 궁에서 첫째를 제압했다.
11살의 어린 왕자와
힘없는 가문을 뒤에 두고 있는 왕비에게
목숨이라는 빚을 안겨주려는 것이
피오네 왕국의 재상다웠다.
"폐하. 피오네 군이 이곳에 도착하려면
며칠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수아르 황제가
너무 편의를 봐주는 바람에. 하하"
"굳이 이곳에서 그들을 맞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피오네의 왕성이 목적지라면
중간에서 그들을 만나도 괜찮을 듯합니다."
메튜의 말대로 그들이
이곳까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일지 모른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진을 치고 앉아, 피오네 군의 이동이나
상황을 파악하고, 일테라쇼 성도에서 출발한
기사단과 병력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피오네 군을 먼저 맞이한 뒤, 왕성으로 이동해
피오네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넷째 스펜타가
왕세자가 아닌 왕이 되는 시간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내가 장시간 제국을 벗어나 있는 동안
발톱을 드러낸 이들을 움직이게 할 시간도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특수성이 재밌다.
제국 내 모든 귀족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내가 마스터라는 것을 알고, 어떤 아티펙트를 이용해
멀리 떠났다가 바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여기서 `전쟁`이라는 것이 배경이 되면
존경과 부러움, 경외의 대상이 되는 텔레포트가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만약 폴리아리스 공작이 탐욕적인 자이며,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는 시점을
피오네 군과 일테라쇼 군이 충돌하는
그때로 잡는다면,
제국의 영토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대륙 통일을 꿈꾸며 일으킨 정복 전쟁이라 선포하고
왕성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이때.
내가 폴리아리스 공작을 벌하기 위해 돌아간다면,
목숨이 경각에 달렸고,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복잡한 사정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을 버렸다며 원망할 것이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정복에 눈이 멀어,
가족의 목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황제가 될 것이다.
물론, 폴리아리스 공작이나 가신단의 인물은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1년을 자리를 비워도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황족과 폴리아리스 공작,
나폴레이, 다른 `네 기둥` 가문의 공작들,
칠흑 기사단과 메튜, 그리고 일부 처음부터 함께했던
가신들을 제외하고
일레라쇼 제국을 다른 제국이나 왕국,
역사 속 나라들로 생각하는 이들이 문제인 것이다.
정치란 돌고 도는 것이고,
정치인이란 언제나 고이기 마련이다.
내가 두 번이나 귀족들을 물갈이했다고
그들이 맑게만 흐르리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고작 몇 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이들이
벌써 탐욕에 젖겠느냐고 생각하는 것도 바보 같다.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른 원인이 권력과 금화라면
시간과 세월은 소용없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것이듯,
훗날 부패하고 어리석은 황족은 물론,
귀족들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건국 초기인 지금 그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면,
천 년의 일라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일테라쇼라는 이름이 사라질 것이다.
튼튼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황성의 편안함 따위는 잊을 수 있다.
이것이 제국을 위한 이유라면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나는 비참한 죽음을 기억한다.
제국을 건국하고
황제의 삶을 사는 지금이 있기 몇 년 전,
나는 서스의 손에 죽었고 내가 죽기 전,
내 가족과 라이거 영지민들이 죽었다.
공허의 공간 속에서 죽어 나간 영지민들의
진짜 절규를 들었다.
하지만 저 눈앞에 보이는 도시의
영주와 주민들은 어떠한가.
목숨을 걸었다고 입으로는 외치지만
그것은 절규가 아니라 욕심이다.
누군가와 몇몇 욕심이 만들어낸
세뇌이며 어리석음이다.
"메튜. 나는 저들에게
진짜 죽음의 문턱을 보여주려 한다."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몇 날 며칠을 이곳에서 지낼 수 없으니,
이참에 제국의 북부나 돌아보자."
"폐하.. 아직 아티펙트 설치를 안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네?"
주신 포르테님께서 나에게 경고와 기회를 주시면서
선물까지 내리셨다.
본인의 모습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동안 놓지 않으셨던
필립님의 손을 통해,
태초의 뫼비우스 고리가 내 몸에 자리했다.
후손을 걱정하는 시조의 마음과
그것을 허락한 주신의 선물이었다.
딱!
손가락을 튕겼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제국의 북부.
피오네 왕국과의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파레앙?"
"폐하. 여긴 파레앙 아닙니까?"
마탑을 이끄는 마린다와 함께
대륙을 다니며 수련한 바이올렛과
일테라쇼 기사단의 단장으로
국경을 둘러보았던 메튜가 도시의 풍경만 보도고
어디지 아는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맞다. 제국의 남부에 있는 황성과
가장 먼 곳이면서, 피오네와 수아르 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지."
딱.
손가락을 튕기자 바이올렛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메튜는 용병에 가까운 모습으로
외모뿐만 아니라 옷까지 바뀌었다.
"이 복장.. 오랜만이군요."
메튜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로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제국 북부를 관리하는 라이 일라인 공작에게
처음으로 명한 것이 국경 부근 마을을
도시화 시키고, 이미 도시인 곳은
더 번창시키라는 거였다.
남부 몬스터 숲이 평정되기 이전,
검, 창, 방패의 마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국경 지역 도시들을 성장시키고,
제국 곳곳의 중요 영지들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풍족한 자본 덕분이었다.
권력 위에 돈이 있다고 외치던
페페 자작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아! 아버지!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네?"
"놓아주면 도망갈 거 아니냐!?"
"당연! 아니 그게 아니고 안 갑니다!"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20대 초반 남자의 귀를 찢어지라 잡아 끌고 가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끌고 가고, 끌려가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닌 것처럼
주변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지나가거나
상점의 주인은 끌려가는 남자를 놀리기라도 하듯
남자의 주머니에 사과 하나를 집어넣어 주기도 했다.
"아저씨! 고마워! 잘 먹을게!"
"잘 먹기는 무슨!"
"아야! 아프다고요. 아버지!
그리고! 저 먹으라고 준 거잖아요!"
"너 먹으라고 서류를 많이 준비해 놓았다!"
"그건 먹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형님의 일을 제가 왜!?"
두 남자가 멀어지고 메튜를 바라봤다.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면..
파레앙 백작이 아닌가?"
"맞습니다. 폐하. 파레앙 백작입니다.
귀족 회의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파레앙 백작.
일라인 왕국 시절 피오네 왕국과의 거래와 수교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제라드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그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자작의 작위와 영지를 잃고
북부의 작은 마을로 쫓겨났던 인물이었다.
일라인 왕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가문에서
이제는 일테라쇼 제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가문이 된, 카르엘 가문의 가주가
천거한 인물이기도 했다.
메튜의 말대로 회의장에서 보여주던
그의 모습과 달라 지나가던 이를 붙잡고 물었다.
"저들이 저러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모양이오?"
"큼! 외부에서 오셔서 모르는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는 저분들을 무시하는 듯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역시나 메튜가 바이올렛을 말리고 있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여행이 자유로워진 덕분에 남부에서 온 사람이라.."
"나도 미안하오.. 외지인들이
우리 영주님과 도련님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
"이곳 영주님과 도련님이었단 말이오?"
"이곳의 떠나기 전에도,
황제 폐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온 뒤에도
훌륭한 영주님입니다!"
자랑스럽게 외치는 남자의 어깨가 펴졌다.
"그런데 어찌.."
"아.. 도련님 말이오?
하하하. 영주님이 셋째 도련님을
후계자로 지목해버리는 바람에
매일 쫓고 쫓기고 있지요. 하하하"
아무래도 이자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
밥을 사겠다고 권유해 그를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고.. 이 도시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로
이런 대접을 받다니. 하하하"
"혹시 압니까? 저 아이가
이곳 영주님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쓸지?"
뜬금없이 작가 지망생이 된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오! 그거 좋군요! 재미날 겁니다. 하하하"
남자는 먹성도 입담도 좋았다.
영주에 대한 자랑을 빼고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파레앙 백작에게는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쫓고 쫓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막내인 셋째의 능력을
가족들이 알아차린 후부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