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시리도록 뜨거운 빛이 되어 나타나리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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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시리도록 뜨거운 빛이 되어 나타나리다.
피오네 군이 벽을 허물기 위해
기사까지 동원하는 동안,
도시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죽음을 각오할 시간을 준 벽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를 단속하든,
미처하지 못했던 인사를 나누든,
각자 나름의 마지막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째 망치 두드리는 소리와
망치를 든 자들의 욕설만 들릴 뿐,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헷갈리기 시작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반란`이라 이름이 붙여질 만큼
잘못을 한 것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전보다 더한 자유가 아니라,
예전과 같은 자유가 아니었던가.
영주의 `목숨을 건 투쟁`이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역사의 길이 남을 이름에
자신의 이름은 과연 존재할까.
벽이 가져다준 살아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살아감`에 대해 생각할 것이고,
`산다`라는 단어가 생각에 박히는 순간.
그때야 주변이 보일 것이다.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한 부인은 무슨 죄인가.
운이 좋아 가족들이 살아남고,
운이 좋아 본이 적장의 목을 베고
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해도
운이 좋아 살아남은 가족들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를 외치다
숭고한 희생을 한 후손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깨달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영주의 말에서 시작되었음을.
"폐하. 도시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죽음이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
"숭고한 희생.."
"저들에게는 지금까지
타인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숭고한 희생이라 할 수 없지.
실상을 알지 못한 이들은
저들의 각오가 대단하게 느껴지겠지.
허나. 저들 중에 가족을 피난시킨 자가 있더냐?
아니면 전 재산을 털어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한 자가 있더냐?
영주부터 입으로는 죽음을 각오했다면서
영주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다.
영주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 역사는
저들의 죽음을 허망한 것으로 기록할 것이야."
"이기심에 눈이 먼 것 이군요."
"뭐.. 그렇다고 숭고한 희생도 잊혀지기 마련지만.."
"네?"
"잊혀진 제국."
"아!"
잊혀진 제국은 정복 당한 왕국의
독립 운동으로부터 다시 역사가 쓰인 곳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했고,
온 국민이 똘똘 뭉쳐 결국 독립을 이루고
잃어버린 왕국을 되찾은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왕국을 제국으로 키웠다.
하지만 왕국의 이름을 되찾은 초기,
그들은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만다.
빠른 사회적 안정을 위해 자신을 지배했던
왕국 측 인물들을 재 등용해 요직에 앉혔다.
왕국의 발전에만 관심이 있었던 당시의 왕은
독립 운동 세력들을 겉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민심을 견제했고,
왕국에게 제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결국, 독립 운동 세력들은
국민들에게도 점점 잊혀져 갔다.
그리고 제국은 멸망하기 전까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황실에 대한 민심이 흔들릴 때마다
독립 운동 세력의 업적을 꺼내
성난 민심을 달랬고,
어느 황자는 눈물로 그들의 기리며
민심을 얻어 황제가 된 뒤,
독립 운동 세력의 후손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걷어 자신의 사치에 쓰기도 했다.
이 역사를 배울 때 나는 차라리 영원히 잊혀졌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과 백성들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는데,
죽은 지 몇 백 년이 지나도록 권력자들의
정치적 이용 도구로 이용되는 것.
그랬다면 눈물을 흘릴지라도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 같다.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자
망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 벽의 주인이 나타날 차례다."
메튜의 오러와 바이올렛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둘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전장 한복판의 압박감을
아직 이기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남도록."
"네. 폐하.."
"아쉬도워 참아.
가까운 곳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할 바에
멀리서 보고 듣는 게 나을 테니."
망치 소리가 완전히 멈추고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사라진 벽.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튕겼고,
나와 메튜, 바이올렛은 사라진 벽이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카온? 카온 라이거?!"
등 뒤, 도시 쪽에서 들리는 웅성거림보다
가까이 있던 피오네 왕국의
제1 기사단의 목소리가 더 커
피오네 군을 먼저 상대하기로 했다.
"감히 제국의 황제 이름을 함부로,
그것도 바르지 못하게 부르는 그대는 누구인가?"
"저들의 반란이 제국의 수작이구나!"
"제국의 개도 먹지 않을 피오네의 것이거늘,
왜 내가 수작질을 부려야 하는지 모르겠군."
기사 단장의 검에 오러가 씌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회색의 오러.
서스에게 목이 떨어져 나갈 때 보고,
회귀 이후 서스가 익스퍼트에 오르기 전
그의 목을 쳤으니 이번 생에서는
처음 보는 회색의 오러였다.
"일라인은 늘 그래왔지!
뒤에서 수작질 부려 우리의 것을 너희들 것으로.."
피오네인다운 헛소리라 그의 말을 무시하고
메튜를 바라봤다.
"메튜."
"네. 폐하."
"아카데미 시절..
내가 너를 살린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당시 폐하의 자비심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저도 모르게 이용당했다지만
그때의 저는 분명 폐하의 목숨을 노렸으니까요."
"그때의 넌.."
"카온 라이거!"
나와 메튜의 대화를 기다려 줄 마음이 없던 단장이
검을 높게 들며 덤벼들었다.
내 머리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검.
입꼬리가 올라간 단장과 달리
메튜나 바이올렛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툭.
단장의 회색빛이 넘실거리는 검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두 손가락에 의해 멈춰버렸다.
"어..어..?"
"오러 폭주로 인해 잠시 보았던 너의 오러 색이
이 자와 같은 탁한 색이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정신을 놓은 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을 것이다."
메튜에게서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에 잡힌 검을
빼내려는 단장을 바라봤다.
"피오네의 마스터가 고작 손가락에 잡힌
검 하나 뽑지 못하는 것인가?"
"마스터?"
"내가 마스터라는 사실은
일테라쇼 제국의 꼬맹이들도 아닌데..
설마 검의 길을 걷고 마스터에 오른 자가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나는 그대가 진짜 마스터가 아님을 알고 있는데 말이지..
서운하군.
아! 혹시 그대도 포이든의 누구처럼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진실을 외면한 것인가?
그럼 바보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미안한데..
사과해야 하나?"
손에 마력을 집중해 단장의 오러를 흡수하려했지만,
역시나 더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
뫼비우스 고리는 그의 오러를 거부했다.
"마력에서 태어난 오러이거늘..
마력도 거부하는 오러라..
그럼 부셔야지."
파지직. 쾅!
산산조각이 난 검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단장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피오네의 거짓 마스터여.
그대가 모.시.는. 재상의 자만심이 하늘을 찔러
너무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주었다."
단장이 생각하는 재상과의 관계는 동급이지
상하 관계는 아니었다.
일부러 일부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자
단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 정보들이 가리키는 것이
너무나 괘씸해 피오네를 벌하고자 온 것이지
저 미련한 것들을 돕고 살리려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란을.."
"개소리."
"피오네 군은 감히 자신의 앞을 막는 것들을 치우고
직진만 한다지?
나도 처음으로 피오네 영토에 온 기념으로
그대들의 방식을 따르고자 한다.
그대들처럼 내 가는 길에
하필이면 그대들이 있기에 치우는 것뿐이니
원망하려거든 피오네 왕국과 왕실을 원망하도록."
점점 거리를 벌리는 단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흥분과 당황이 조금 진정되었는지 이제야
내 주변에 메튜와 바이올렛만 있음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일테라쇼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
재상이 자만했다고 하셨습니까?
하하하 자만으로 가득한 자는
재상 말고도 있는 듯하군요.
남들이 대단하다 떠드는 마스터를
왜 피오네 왕국에서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마스터도 한낱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피오네 군이 마스터라는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을
이곳에 처음 오신 기념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단장이 손을 들자 피오네 군은
인간 방패와 인간 창으로 변했다.
"주신 포르테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끔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힘을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선물로 주셨지.
하지만 그 힘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에게 실망한
주신께서는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그 힘을 하나씩 거두고 계셔.
나는 감히 이런 생각을 해.
어쩌면 하나씩 본인의 안배와 힘을 거둬들이며
신의 힘에 기대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시는 건 아닐까 하고.."
"망상이 심하십니다. 폐하."
"그런데 너희들을 보면
왜 주신께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힘을 거두셨는지 알 것 같아.
아직 인간은 미개하고,
그런 미개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거든."
주신의 선물을 아직 간직한 바이올렛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나 바이올렛이 마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힘과 권력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사람의 목숨의 목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려는 자를 벌하고자 한다."
마법에는 이런 주문은 없었다.
바이올렛이 하늘을 향해 외치는 주문은
그녀의 분노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차갑게 얼어가고 화염이 이를 감싸니."
그렇지 않아도 해가 점점 넘어가고 있어
어두워지고 있는데, 바이올렛의 주문이 만들어낸
먹구름 때문에 저녁인지 밤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어둠을 밝히는
시리도록 뜨거운 빛이 되어 나타나리다."
바이올렛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어두워졌던 세상이 밝아졌다.
시간을 되돌려 넘어갔던 해를
다시 떠오르게 한 것도 아니고,
시간을 빨리 감아 아침을 밝힌 것도 아니었다.
바이올렛 만의 마법. 고대어로 `선더`라는
수천, 수만 개의 번개 마법이 세상을 밝혔다.
하늘이 진동하고 비가 내기가 시작했다.
빗줄기가 강해질수록 번개 모양의 창이
더욱 지직거리며 그 빛을 더해갔다.
한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벌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