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이미 정이 들어버린 것 같은걸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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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이미 정이 들어버린 것 같은걸요..
카온이 일테라쇼 기사단과
1만의 병사들을 텔레포트 시켜
피오네의 성도로 진군하기 시작한 그때,
피오네 왕국의 재상 노벨리타 유클리드는
출병과 동시에 왕세자에 올라
내일 왕위 계승식을 준비하고 있는
스펜타 왕세자를 찾아갔다.
"왕세자 저하.
내일 즉위식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재상이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기사 단장이 이끄는 군이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
들려 온 소식은 없습니까?"
재상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스펜타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단장의 연락을 받고
이렇게 저하를 찾아뵌 것입니다."
"단장의 연락을요?"
"카샤미와 하루거리에서
잠시 군에게 휴식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왕국과 왕실에 충성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단장인지라..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한 번 더
저하의 의사를 확인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스펜타는 눈썹이 잠시 꿈틀거린 거 말고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재상의 모습에 표정 관리가 힘들어
테이블 밑 허벅지를 꼬집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왕국을 바로잡고,
왕국을 망치는 재상 같은 존재들을 벌하기 위해
제국의 황제를 이곳에 모시어
그동안 피오네가 저질러온 잘못들에 용서를 구하고
제국과 왕국 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거라는..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신이 아니기에 스펜타가 입 밖으로 꺼낸
마지막 말만 들은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제가 선택한 분이십니다.
네. 그러셔야지요.
이 왕국의 백성일지라도 반란입니다.
집권 초기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셔야지요."
"하지만 재상님."
"네. 저하. 말씀하시지요."
"만약에 말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일테라쇼 제국이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피오네 군이 일테라쇼 군에게 패한다는 뜻이었고,
제국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혹시라도 제국이 피오네를 상대로
죄를 묻고, 전쟁을 선포한다는 뜻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재상은
인자하게 웃으며 답을 했다.
"이 재상이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하."
예전과 같이 피오네 군을 찬양하고,
일테라쇼 제국을 깎아내리며
승리를 확신하는 재상이 아니었다.
"그래요. 재상이 있는데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그럼. 저는 단장에 저하의 뜻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리고,
내일 있을 즉위식을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재상."
"하하하 그러지요."
재상이 나가고 열린 문으로 자신의 시녀이자
제국의 정보원인 에셀이 들어왔다.
"재상이 피오네 군을 신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피오네 기사들은
제국의 정예 병사만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재상은 여자가 어떻고,
마스터가 어떻고, 황후가 어떻고,
제국의 황제가 어떻고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1 기사단과 단장, 그리고 7만의 병력이
폐하를 포함해 단 세명..
아니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마법사 한 명의 마법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내일 즉위식은 그대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에셀은 아공간에서 차 세트를 꺼내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재상이 왜 왕세자가 되었고,
왜 왕으로 만들려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요. 카온 라이거 일테라쇼 폐하께 내어줄 목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향긋한 차향이 왕세자의 집무실에 가득 퍼졌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잘 참았고, 잘 견디시지 않았습니까.
혹시나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씀을 왕비님께 드리지 마세요."
"제 표정이.. 아.."
거울을 바라본 스펜타는 짧게 탄식했다.
에셀이 그런 스펜타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례라는 것은 알지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스펜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셀..?"
"제가 존경하는 나폴레이 책사님께서
사람은 태어날 때만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을 뿐,
죽을 때까지 `선택`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란 이름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선택하며 살아간다.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누군가를 사귀고 만나는 것,
배우고자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
누군가의 바람과 나의 바람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심지어 누군가는 자기 죽음마저 선택한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뭐 하고 놀지 같은 선택은
수십 년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어떤 기로에서의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바꾼다고 해요."
"저 같은 경우를 말하는 건가요?"
"왕자님의 경우 같은 것도 있겠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크고 작음은 다 다르니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아.."
"아무튼. 사람들은 선택 후, 그 결과가 다가오면
반드시 걱정과 고민을 한다고 해요.
하지만 책사님은 그 고민과 걱정이야말로
무의미하다고 했어요."
말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듯
생각에 잠긴 스펜타의 머리를
마지막을 쓰다듬어 준 에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책사님의 말씀을 듣고
왕자님과 같은 표정이었죠.
그때 책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다.
너의 선택이 자신에게 떳떳하고
남들에게도 떳떳한 선택이라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자신에게는 떳떳하지만,
남들에게 손가락 받을 선택이라면
네가 생각하는 걱정이 일어날지라도
너 하기에 손가락질이 박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에게도 남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면
모든 걱정과 고민은 반드시 일어나
너의 목을 조를 것이다.라고요."
"저는 무엇에 해당합니까..?"
차 세트를 다시 아공간에 넣던 에셀이 동작을 멈추고
스펜타를 향해 싱긋 웃었다.
"두 번째. 하지만 왕자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왕자님께 손가락질하는 그 손가락들은
폐하께서 다 처리 하실 테니까요."
순간 에셀의 표정이 무심하게 변했다.
"제국에 충성하는 제가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왕자께서 생각하시는 왕국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만약 피오네가 다시 피오네스러워지면
그때 왕자님의 목을 베는 것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저일 겁니다."
스펜타는 웃었다.
"웃지 마십시오. 정듭니다."
"황제께서 오시면 떠나야 합니까?"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뜻대로."
문을 닫고 나가는 에셀을 보며 스텐타는 중얼거렸다.
"저는 이미 정이 들어버린 것 같은걸요..
여기 남아 저의 누님이 되어달라는 것은
욕심이겠지요.."
잠을 이룰 수 없던 그날 밤.
왕세자 침실 창문이 천천히 열렸다.
스펜타는 에셀이 준 아티펙트의 버튼을 누르고
베개 밑에 숨겨둔 단검을 손에 쥐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제국의 황제를 맞이해야 했다.
피오네 왕실의 핏줄이
제국의 황제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죽더라도 모든 것을 바로잡은 뒤여야 하지
지금은 아니었다.
점점 다가오는 누군가를 느끼며
에셀이 늦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왔음을 느낀 스펜타가
눈을 뜨고 단검을 누군가에게 겨누려는 순간,
문을 박차고 들어온 에셀이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속도로 뛰어와
그의 목에 단검을 겨눴다.
"누구냐?"
남자의 등 뒤에서 단검을 겨누는 에셀은
보지 못했지만 정면에 있던 스펜타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형..님?"
"동생아 목이 따갑구나."
왕위 계승권을 버리고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에 머물던
피오네 왕국의 셋째 왕자 아네스 피오네였다.
"에셀. 괜찮다."
에셀의 단검이 거둬지자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아네스 왕자는 의자를 끌고 와 스펜타 앞에 앉았다.
"불을 켜지 않는 것이 좋겠지?"
"형님.."
"차는 준비 하겠지만,
두 분만 계시는 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에셀의 모습에
아네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시녀인지 호위인지 헷갈리는군.
동생의 사람이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할 테니
그대 뜻대로 하라."
"배려 감사합니다."
차를 준비하는 에셀에서
스펜타로 눈을 돌린 아네스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스펜타. 내일 왕이 되거든
왕위를 바로 나에게 양도하거라."
"네?!"
"쉿. 눈과 귀는 너를 향할지라도
입은 다른 이를 향할 자들이 있으니
목소리를 줄이거라."
"형님.. 갑자기 무슨.."
"반란. 아니..
재상이 말하는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던 군이
일테라쇼 황제와 바이올렛 마법사,
일테라쇼 기사단 단장 메튜 몬스,
단 세 사람에 의해 전멸했다.
재상은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는 제국의 황제에게
너의 목을 바칠 것이다.
모든 것이 미쳐버린 왕의 뜻이고,
그 왕의 의지를 잇는 왕실의 탓,
내일이면 왕이 되는 너의 탓으로 돌릴 것이란 말이다."
"형님.."
"그래. 이제 와서 이러는 내가
너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겠지..
단 한 번도 너에게 형다운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고..
너를 다정하게 안아 준 적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왕실이 싫었다..
나 자신이 피오네 왕실의 핏줄을 타고난 것도 싫었다.
내가 왕성을 떠나기 전까지 본 것들은..
매일 밤 여자를 갈아치우는 아버지와,
어린 나를 궁중 암투 속으로 넣으려는 어머니,
온갖 패악질을 왕자라는 이유로 용서받는 첫째 형과,
뒤에서 수작질 부리는 둘째 형..
그리고 충성이 갈대와 같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젯밤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귀족들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뱉은 아네스가 말을 이었다.
"어린 동생이 태어나고
외가가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안심했다.
어린 동생이 검이나 마법, 학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너를 멀리하려 했다."
"형님께서 저를 보호하시면
제가 더 위험해지기 때문입니까..?"
"똑똑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똑똑하구나.."
"왕위를 양위하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목을 바칠 거라 말했지만
재상은 피오네 왕실의 핏줄 그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
제국의 황제가 죽이려 해도 재상이
이 피오네를 완전히 집어 삼키기 전까지는
왕실의 핏줄이 꼭 필요하니까..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숨만 쉬는 왕이 될 것이야.."
"형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재상이 바라는 대로 죽어 줄 수 있다.."
"형님!"
스펜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국처럼 몬스터로부터 왕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왕성을 떠날 수 있다.
너와 왕비님의 거처와 안전은 내가 마련하마."
"참으로 이기적이십니다. 아네스 피오네 왕자님."
스펜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네스의 시선이
에셀에게로 돌아갔다.
"뭐라 하였는가?"
"참으로 이기적이라 했습니다.
이제 와 핏줄의 정에 끌린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 와 동생이 안타까워
스펜타 왕자님을 위해 주시는 겁니까?"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꺼내는 것이 아니다.
동생의 사람이라 넘어가지만 명심하도록.
아무것도 모르면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바로
아네스 왕자님이지요."
아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셀을 향해 한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