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결과는 그 두 가지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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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결과는 그 두 가지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뭘 모른다는 거지?
고작 11살의 동생이 왕이 되면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왕성 밖만 떠돌던 내가
뭘 알겠냐고 해석하면 되는가?"
"아니요. 스펜타 왕자님께서
있을지도 모를 기회를 기다리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신다는 겁니다."
"어떤 삶이라니! 당..연.."
아네스 피오네는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스펜타의 침대 위에 단도가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에셀이란 여자가 일찍 도착한 것까지도
경계에 신경 썼다면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까지 스펜타는 몇 가지 질문만 했을 뿐,
살려달라, 구해달라라는 말은 물론,
왕위를 양도하고 살길을 마련해 주겠다는
자신에게 고마운 눈빛조차 보내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곤란하다는 눈빛에 가까웠다.
스펜타를 한번 쳐다본 아네스는 에셀을 노려봤다.
"누구냐?"
"스펜타 왕자님의 전속 시녀이자
일테라쇼 제국 정보부 소속 에셀이라고합니다."
"일테라..쇼..?!"
"목소리를 낮추길 바라셨던 건
아네스 왕자님이십니다."
에셀은 스펜타를 보호하듯
아네스와 스펜타 사이로 자리 잡았다.
"형님."
"스펜타.. 이 어찌된.."
"솔직히 저는 제 어머니와 여기 있는
에셀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아네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머니를 믿는 것은 당연하지만
타국의 첩자와 다름없는 이를 믿는다는 것이
믿기 힘든 듯했다.
"스펜타. 이 자는.."
"네. 피오네 왕국 입장에서 보면 첩자지요.
허나.. 진짜 저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진짜.. 너라니.."
"형님이 알고 있는 저는
글과 그림을 좋아하는 어린 왕자..
왕비라는 자리에 있지만 힘없는 본가이기에
아무런 세력이 없는 왕비를 어머니로 둔 왕자..
아버지는 미쳐버렸고,
위에 두 형님은 감금된 상황에서..
재상의 손에 꼭두각시가 될 차기 왕..
정도겠지요?"
"그..그건.."
아네스가 뭐라 변명하려 하자 스펜타는 옅게 웃었다.
"솔직히 기쁜 마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을 온전히 표현하고
형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제가 너무 외로운 삶을 보냈습니다."
"그건 너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에셀은 자신의 치맛자락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고 스펜타 대신 입을 열었다.
"아네스 왕자님의 말씀이
전부 진실이라 가정했을 때,
왕자님에게 있어 그 방법은 최선일지 모르나..
스펜타 왕자님에게는 최선이 아니었습니다.
제 형의 무관심에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당시 스펜타 왕자님은 너무 어렸고..
스펜타 왕자님의 천재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후에는
이분 주변에 왕비님뿐이었으니까요."
"천..재성?"
"스펜타 왕자님께서 재능을 보인 것이
그림뿐만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 그림을 부각했을 뿐..
제국의 책사이신 나폴레이님께서는
스펜타 왕자님을 피오네의
프레시아 라이거 백작님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림을 좋아한다는 이유가
왕의 자질이 아니라 판정되어
이렇게 살아남으셨습니다."
"그러나.."
"네. 그뿐이라면 아네스 왕자님의 손을
잡았을 수도 있지요.
에셀은 스펜타를 위해 아공간에서
진정에 효과가 있는 향을 꺼내 피우고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세력이 없는 가문인
왕비님의 가문을 이용하셨습니다.
그 누가 그런 가문에서 보낸 물건을 의심했을까요.
그렇게 왕자님은 천재성에 배움이 더해졌습니다."
"11살이.."
"네. 11살이 말이죠.
그런 11살이 저희 폐하께
피오네를 좀먹기고 있는 것들을
치워달라고 청을 올렸습니다."
아네스의 놀란 눈이 스펜타를 향하고,
에셀은 우려진 차를 두 사람 앞에 놓았다.
"형님. 일테라쇼 황제 폐하를 부른 것은 저입니다.
감히 왕국의 왕자가 제국의 황제를 부른 벌은
달게 받아야겠지요."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설마.. 네 목숨을 마쳐 피오네 백성들을 구하고,
왕국을 제국에 바칠 생각이더냐?"
"저희 폐하의 분노가 고작 그것으로
가라앉을 거란 생각은 아니시지요?"
"뭐라! 분노?"
"아네스 왕자님께서는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다른 왕족들과 다를지 모르나,
그 머리에 든 사상은 역시 피오네인입니다.
그러기에"
"형님께서는 피오네 왕이 되어
제국의 황제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에셀의 말을 스펜타가 이었다.
"피오네는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형님.
이제 고작 6백 년이 지난 역사를 가진 왕국에서
천년이 가까워졌던 왕국을
아들의 나라, 속국으로 불렀고,
피오네 왕국이 건국 되기 전부터 있던 문화를
우리의 것이라 속였습니다."
"우리는 잊혀진 제국의 영토에서..!"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아직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왕국이고..
일라인은.. 부모에게서 독립한 형님 국가입니다..
형님 국가는.. 이미 성공하시여 제국이 되었고요.."
"그..건!"
"오래 박힌 사상에 관해
서로를 이해하기란 힘드니 여기까지 하죠.
하지만.. 왕국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은
형님도 잘 아실 겁니다.
왕국민들에게도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는 왕국이,
왕실이, 귀족들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 왕국에도 법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만약 형님께서 어디든 방문해
이건 이렇게 고치고, 저건 저렇게 고치라고 명하면
그것이 곧 그 영지의 법이 됩니다.
왜? 왕국의 왕자는 왕, 왕세자 다음의 권력이니까요.
그리고 형님.
이 왕국은 살인자도 돈이 있으면 무죄로 풀려나고..
배고파서 빵을 훔친 아이도
돈이 없으면 죽을 만큼 매를 맞는 곳입니다."
"..."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아네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생활에 필요한, 자기 능력에 맞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배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왕실의 위대함을 배우고..
세상이.. 이 대륙이 피오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얼마나 왕국을 위해 노력하는 자를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닌,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바쳤고,
얼마나 빠르게 꼬리를 흔드냐에 따라
작위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중요한 자리에 앉기도, 좌천되기도 하는 곳이
바로 이 피오네 왕국입니다."
아네스는 에셀의 말에도 인정할 수 없던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또박또박 말을 하는 동생이
11살의 어린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기술을 무시하면서, 그 기술을 베끼고..
베낀 그 기술을 또 우리는 우리의 것이라 속여
다시 세상에 내놓습니다.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통제한 왕실과 귀족들은
그런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버리죠.
하.. 좋습니다.. 다 좋습니다..
어느 나라든 권력자들이
배가 부르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번 것들을 동화 하나
백성들에게 베풀지 않는 곳은
피오네 왕국 말고는 없습니다.
에셀의 말을 들어보니..
겉과 속이 다른 포이든의 귀족들도
친절한 귀족을 연기하기 위해
꾸준히 기부하고 빈민 사업을 한다더군요.
우리는 그런 귀족도 없습니다. 형님."
"그래서 제국과 손을 잡을 것이다?"
"네. 제가 왕이 되어 제국과 손을 잡을 겁니다.
아니, 손을 내밀어 주시면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고..
이 대륙에 피오네를 존재 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
"아니요."
스펜타의 너무나 단호한 말에
아네스의 두 눈이 커졌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사는 우물은 너무 썩었으니까요.."
"진심이구나..?"
"저는 이 세상에 어머니와
단 둘뿐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늘 진심이었습니다..
오늘 낮에 보여준 재상에 한 연기까지도요."
아네스가 천천히 일어나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이 자리에서 너와 저 첩자를 죽이고
재상을 찾아갈 수도 있다."
단도를 꺼내기 위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에셀을 말리며
스펜타는 아네스를 향해 웃었다.
"일테라쇼 황제 폐하께서는
재상의 거짓 조아림에 속으실 분이 아닙니다."
텅.
아네스의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것이냐?"
"없습니다.
제가 살아서 제국의 황제를 맞이는 순간
제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고,
제가 죽어 주신의 품에서 제국의 황제가
이 성도에 도착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날이 피오네의 마지막 날이 될 뿐입니다.
형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결과는
그 두 가지 중 하나일 뿐입니다."
아네스가 들어왔던 창문이 아닌
문 쪽으로 걸어가다 발을 멈췄다.
"오늘 밤.. 너를 찾아와서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탁.
아네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
스펜타는 침대에 허물어졌다.
에셀이 떨리는 스펜타의 손을 잡았다.
"아네스 왕자는 진심이었습니다."
"에셀.. 네. 알고 있어요.
기뻤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지금껏 전혀 몰랐지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 거잖아요?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전 진심도 의심해야 하는걸요."
에셀은 11살의 어린 왕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건네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
활짝 열린 성도의 관문을 지나 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마중 나온 제국 정보부 소속 에셀에게 물었다.
"에셀. 여기가 진정 피오네 왕국의
성도가 맞는 것이냐?"
"네.. 폐하."
"혹시 관문 옆에 빈민촌이 있는 것인가?"
지금은 황성 상업의 중심이 된
옛 라이거 영지의 남부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바이올렛도 같은 것이 떠 올랐는지
역한 냄새와 더러운 몰골의 사람들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아닌,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아.. 감히 제가 폐하의 물음에
답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나,
아닙니다. 폐하."
"편히 말하라."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피오네의 왕성은 성도의 제일 안쪽에 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건물도 사람도 화려해집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나를 선두로 한
일테라쇼 제국군의 행렬을 바라보는 이들을 중
몇 명과 눈이 마주쳤고,
그들의 손가락을 확인한 나는 메튜를 불렀다.
"메튜."
"네. 폐하."
"피오네 왕국에 파견 나와 있는
정보부 인원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라 전해라.
아무리 임무라지만.. 마음이 편치 않구나."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바이올렛."
"네. 폐하."
"저기 짙은 갈색 머리에
검은 짐을 옮기는 남자가 보이느냐?"
바이올렛의 마나라면 충분히 보일 거리에 있는
남자를 지목했다.
"네. 폐하."
"그자가 지금 어떤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느냐?"
"양손 모두 엄지와 검지를 붙여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서로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너도 외형을 마법으로 감추지 않고
본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너의 힘과 권력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니."
"네. 폐하."
"그때 어디에서든
저 모양을 한 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자는 너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자일 것이다."
"아!"
"그래. 이런 곳에서조차 충심으로 활동하는
제국 정보부의 중요한 이들이다."
바이올렛은 이후 왕성 입구에 도착 할 때까지
말 위에 있으면서 한 번도 손가락 고리를 풀지 않았다.